비릿한 향기, 주사기의 행방
철컥.
고요하다 못해 죽음 같은 침묵이 흐르던 은지원의 침실 문이 난폭하게 열려 젖혀졌다. 문을 열고 들어선 것은 은성병원 원장이자 대저택의 수석 주치의인 오만석이었다. 그의 반짝이는 금테 안경 너머로 비치는 눈빛은 차갑고 비장했다. 그 뒤를 따르는 안 간호사의 손에는 차가운 스테인리스 트레이가 들려 있었고, 그 위에는 투명한 유리 앰플과 일회용 주사기들이 날카로운 금속음을 내며 부딪치고 있었다.
침대 옆에 서 있던 이지안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숙이며 뒤로 물러섰다. 오른손바닥에 새겨진 메스 자상 흉터가 욱신거렸고, 지난밤 유리 파편에 베인 발목이 붕대 안쪽에서 비명을 질렀지만 지안은 내색하지 않았다. 지금 그녀는 돈에 굶주려 미치광이 재벌 후계자의 수발을 드는 가난한 미술 교사 역할을 연기해야 했다.
오만석은 침대에 창백하게 누워 있는 지원을 내려다보았다. 지원은 지안과 미리 모의한 대로, 초점을 잃은 눈동자로 천장을 응시하며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전신이 마비된 듯 손끝 하나 움직이지 못하는 무력한 모습. 그 완벽한 폐인의 연기에 오만석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갔다. 최 비서가 전송한 ‘상태 악화 보고서’가 완벽한 사실임을 확신한 주치의의 오만함이었다.
“지원의 상태가 생각보다 훨씬 심각하군. 이지안 씨, 지난밤 아틀리에에서 대체 무슨 짓을 한 겁니까? 환자의 정신을 이토록 자극해 발작을 유도하다니, 당신의 무면허 미술 치료가 지원의 뇌 신경을 완전히 망가뜨리고 있어요.”
오만석이 지안을 향해 매서운 호통을 쳤다. 지안은 어깨를 잘게 떨며 비굴하게 고개를 더 숙였다.
“죄, 죄송합니다, 원장님…… 상무님이 갑자기 물레를 걷어차고 흙을 던지시는 바람에 저도 너무 겁이 나서…….”
“시끄럽습니다. 당신의 무식한 치료법 때문에 환자가 영구적인 정신 분열 상태로 빠져들기 직전입니다. 당장 오늘부로 치료를 중단하고 나가라고 하고 싶지만, 부회장님의 지시가 있을 때까지는 이 방 구석에서 숨만 쉬고 계십시오.”
오만석은 지안을 쓰레기 보듯 밀쳐내고는 안 간호사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안 간호사, 영양제 투여 준비해. 오늘은 환자의 극심한 흥분을 가라앉히기 위해 용량을 두 배로 늘린다.”
‘용량을 두 배로…….’
지안의 가슴속에서 경고음이 요란하게 울렸다. 오만석이 가죽 왕진 가방에서 꺼낸 갈색 유리 앰플을 뜯는 순간, 지안의 코끝으로 미세한 공기의 흐름이 타고 들어왔. 그녀의 ‘향료 화학적 직관력’이 극도로 날카롭게 가동되었다.
스읍.
지안은 숨을 미세하게 들이마셨다. 병원 특유의 알코올 냄새와 소독약 냄새가 진동하는 방 안이었지만, 오만석이 뜯어낸 약액의 미세한 기화 입자 속에서 전혀 다른 이질적인 취기가 섞여 있었다.
그것은 비릿하고 차가운, 마치 축축한 그늘에서 자라난 야생 미나리과 독초를 짓이겼을 때 나는 특유의 독성 냄새였다. 동의보감과 전통 향료 고문헌에서 수없이 필사했던 맹독성 유기 화합물, ‘코니인(Coniine)’의 냄새가 분명했다.
‘코니인…… 척수 신경을 마비시켜 호흡 곤란과 사지 경련을 유도하는 만성 마비독. 이걸 영양제라는 명목으로 매일 주입해 온 것도 모자라, 이제는 아예 지원 씨의 숨통을 완전히 끊어놓으려고 용량을 두 배로 늘린 거야!’
지안의 심장이 갈비뼈를 부수고 나올 것처럼 쿵쾅거렸다. 오만석이 주사기 바늘을 앰플 속으로 찔러 넣어 투명한 약액을 빨아들이는 모습이 슬로우 모션처럼 지안의 시야에 박혔. 주사기 실린더 안으로 채워지는 저 액체가 지원의 정맥 속으로 들어가는 순간, 그의 오른손 마비는 영구화될 것이고 심하면 호흡 근육이 마비되어 급성 질식사로 이어질 터였다.
당장 주사기를 빼앗아 바닥에 내팽개치고 싶었다. 하지만 방 문앞에는 거구의 박 경호원이 버티고 서 있었고, 최 비서가 CCTV로 이 모든 상황을 실시간으로 감시하고 있었다. 만약 지안이 여기서 오만석의 손을 잡고 말린다면, 그녀는 즉각 ‘진료 방해 및 무단 의료 침입’ 혐의로 경찰에 체포되어 저택 밖으로 영구히 축출될 것이 분명했다. 법과 대기업의 지배 구조라는 비정한 사슬이 지안의 온몸을 옭아매고 있었다.
‘침착해야 해. 합법적인 장벽을 물리력으로 깰 수는 없어. 적들의 방심을 이용한 우회 전술이 필요해.’
지안은 침대 머리맡에 서 있는 지원의 눈동자를 살며시 바라보았다. 초점을 잃은 척 연기하고 있던 지원의 검은 눈동자가 지안의 시선과 찰나의 순간 마주쳤다. 지안은 아주 미세하게 고개를 두 번 끄덕였다. 지난밤 약속했던 ‘기습적인 발작 소동’의 신호였다.
안 간호사가 지원의 창백한 오른팔을 붙잡고 알코올 솜으로 피부를 문질렀다. 푸르스름한 혈관 위로 주사 바늘이 다가오는 순간, 지원의 전신이 활처럼 팽팽하게 꺾이며 비명이 터져 나왔다.
“으 아 아 악—!”
지원의 거친 몸부림에 안 간호사가 비명을 지르며 뒤로 자빠졌다. 스테인리스 트레이가 바닥으로 떨어지며 쨍그랑거리는 날카로운 굉음이 방 안에 울려 퍼졌다. 지원은 이성을 잃은 미치광이처럼 온몸을 흔들며 침대 시트를 찢어발겼다.
“가까이 오지 마! 내 몸에 손대지 마!”
“상무님! 진정하세요!”
안 간호사와 오만석이 당황하여 지원의 팔을 억누르기 위해 침대 위로 몸을 던졌다. 방 문 앞을 지키던 박 경호원까지 지원의 폭주를 막기 위해 침대 머리맡으로 다급히 뛰어들었다.
방 안의 모든 시선이 지원의 처절한 연극에 쏠린 단 3초의 순간.
지안은 한 걸음 앞으로 다가서며 자신의 오른발 끝을 휠체어 뒤편, 그리고 침대 모퉁이를 따라 길게 늘어져 있던 링거 호스 라인으로 슬며시 밀어 넣었다. 발목의 유리 자상 통증이 찌르듯 밀려왔지만 지안은 이를 악물고 발가락 끝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그녀의 손끝과 발끝은 평생 0.1mm의 미세한 도자기 균열을 읽어내던 절대 촉각의 감각 기관이었다. 지안은 보이지 않는 침대 그림자 속에서 링거 호스 중간에 매달린 미세 유량 조절 밸브(로라 클램프)를 정확하게 발가락 끝으로 감싸 쥐었다.
스륵, 탁.
지안은 발가락 마디의 미세한 악력을 가동해, 조절 밸브의 휠을 가장 아래쪽으로 강하게 밀어내려 잠가버렸다. 튜브 내부의 실리콘 통로가 완벽하게 압착되며 수액의 흐름이 원천 차단되었다. 이제 그 어떤 압력으로 주입하더라도, 약액은 지원의 혈관 속으로 단 한 방울도 들어갈 수 없었다.
“박 경호원! 환자 팔 꽉 잡아! 안 간호사, 정맥 라인 고정해!”
오만석이 이마에 핏대를 세우며 소리쳤. 박 경호원이 지원의 오른팔을 침대 보드에 강력하게 밀착시켰고, 안 간호사가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링거의 Y-포트 고무 마개에 주사 바늘을 찔러 넣었다.
지안은 지원의 목덜미를 바라보았다. 그의 척수 근처에 새겨진 무수한 바늘 자국들이 떠올라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았지만, 지안은 지원에게 눈빛으로 강한 확신을 보냈다.
‘걱정하지 마세요, 지원 씨. 독약은 들어가지 않아요.’
오만석이 주사기의 피스톤을 거칠게 밀어붙였다.
지이익.
하지만 밸브가 완벽히 잠긴 탓에 링거 라인 내부에 강력한 압력 저항이 발생했다. 주사기 피스톤이 뻑뻑하게 굳어지며 밀리지 않자, 오만석이 미간을 찌푸렸다.
“왜 이렇게 뻑뻑해? 링거 라인이 막혔나?”
오만석이 의아한 듯 중얼거렸다. 지안의 심장이 멎을 것 같았다. 만약 오만석이 링거 호스를 따라 내려가 조절 밸브를 확인한다면 모든 음모와 지안의 기지가 발각될 절대 위기였다.
지안은 즉각 자신의 ‘위기 대처 즉흥 연기력’을 가동했다. 그녀는 바닥에 주저앉아 머리를 감싸 쥐고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다.
“아악! 무서워요! 상무님이 저를 죽이려고 해요! 원장님, 제발 저 좀 여기서 나가게 해주세요! 돈이고 뭐고 다 필요 없으니까 살려달란 말입니다!”
지안의 가식적이고 요란한 비명이 서재 사방에 울려 퍼지자, 오만석의 시선이 지안에게로 쏠렸다. 오만석은 비열한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겁쟁이 기집애 같으니라고. 안 간호사, 환자 혈관이 수축해서 저항이 심한 거니까 그냥 힘으로 밀어 넣어.”
오만석은 주사기를 쥔 손에 강한 완력을 주어 피스톤을 끝까지 밀어붙였다.
투둑, 툭.
엄청난 압력으로 인해 링거 호스의 Y-포트 윗부분이 터질 듯 팽팽하게 부풀어 올랐지만, 약액은 결국 지원의 혈관이 아닌 압착된 튜브의 빈 공간으로 밀려 들어가 고여버렸다. 지원은 주사 바늘이 흔들리며 정맥 부근의 혈관이 터져 오른팔에 심한 멍과 통증을 느꼈지만, 신음 소리를 삼키며 눈을 질끈 감았다.
“후우, 끝났군.”
오만석이 이마의 땀을 닦으며 주사기를 뽑아 들었다. 그는 주입이 완벽하게 끝났다고 믿고 있었다. 자신의 의학적 권위와 완력이 완벽한 치료를 끝냈다는 오만함이 그의 눈을 가린 것이다.
“안 간호사, 정리해. 오늘 밤까지는 환자가 깊은 수면에 빠질 테니 최 비서에게 감시를 철저히 하라고 일러두고.”
“네, 원장님.”
안 간호사가 바닥에 떨어진 트레이와 주사기 공병을 수거해 가방에 챙겨 넣었다. 오만석은 차가운 눈빛으로 지안과 지원을 한 번씩 훑어본 뒤, 만족스러운 걸음걸이로 침실 문을 향해 걸어갔다.
지안은 바닥에 엎드린 채 안도의 숨을 내쉬려 했다. 마침내 치명적인 마비독의 투여를 몸으로 막아낸 것이었다.
그러나 오만석의 구두 발자국 소리가 정문 문턱 앞에서 뚝 멈추어 섰다.
지안의 전신이 다시 한번 얼어붙었다.
천천히 몸을 돌린 오만석의 시선이, 침대 머리맡에 매달려 있는 링거 백과 그 아래로 늘어진 투명한 호스 라인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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