렌즈 뒤의 눈, 역습의 시나리오
지안의 손끝이 점토를 쥔 채 허공에서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물레가 웅웅거리며 도는 지하 아틀리에의 고요 속에서, 지안의 온 신경은 점토 건조대 구석의 어둠으로 쏠렸다. 젖은 흙내음 사이로 소독약 냄새가 얇게 스며드는 공간. 그 차갑고 정적인 선반 틈새에서 아주 미세하게 깜빡이는 붉은 불빛은 명백한 인공의 눈이었다.
초소형 감시 카메라.
지안의 등 뒤에 밀착해 있던 은지원이 그녀의 갑작스러운 변화를 가장 먼저 눈치챘다. 그의 예민한 ‘숨소리 공감각 청각’이 지안의 멈춰버린 호흡과 급격히 요동치는 맥박 소리를 잡아낸 것이다. 지원의 창백한 이마에 미세한 주름이 잡혔다.
“지안아? 왜 그러지?”
그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지원은 지안의 시선이 향한 곳을 따라 고개를 돌리려 했다. 지안은 반사적으로 물레 위의 흙을 만지던 오른손을 뻗어 지원의 뺨을 조심스럽게 감싸 쥐었다. 메스에 베여 아직 붉은 새살이 돋아나는 그녀의 손바닥 상처가 지원의 창백한 피부에 닿았다.
“움직이지 마세요, 상무님. 제 눈을 보세요.”
지안은 나지막이 속삭이며 지원의 검은 눈동자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시선은 고정하되, 손끝의 절대 촉각을 가동해 지원의 뺨을 가볍게 쓸어내리며 미세한 진동으로 신호를 보냈다. 그리고 턱끝을 아주 미세하게 움직여, 건조대 바로 옆에 놓인 유약 칠해진 청자 항아리의 표면을 가리켰.
거울처럼 매끄러운 비색 청자 표면 위로, 건조대 구석에서 깜빡이는 붉은 불빛이 선명하게 반사되고 있었다.
지원의 동공이 순식간에 수축했다. 그의 눈동자에 일렁이는 칠흑 같은 어둠은 분노와 살기로 가득 찼다. 하얗게 붕대가 감긴 그의 왼손이 휠체어 손잡이를 부서질 듯 꽉 쥐었다. 평생을 갇혀 지낸 성북동 대저택, 그 안에서도 유일하게 지안과 단둘이 온기를 나누던 지하 아틀리에까지 숙부의 더러운 감시망이 침투했다는 사실은 그의 이성을 단숨에 끊어놓기에 충분했다.
“당장…… 부숴버리겠어.”
지원이 이빨을 악물며 일어나려 했다. 그의 사지가 분노로 가늘게 떨렸다. 하지만 지안은 지원의 어깨를 묵직하게 누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 돼요, 상무님. 저 카메라를 지금 부수면 적들은 더 은밀하고 강력한 감시 수단을 쓸 겁니다. 우리가 감시 장치를 찾아냈다는 사실을 숨겨야 해요.”
“그럼 저 가증스러운 눈을 그대로 두고 보라는 건가?”
“아니요. 적들이 우리에게 덫을 놓았다면, 우리는 그 덫을 아주 기쁘게 밟아주는 척해야 합니다. 그들이 보고 싶어 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거예요.”
지안의 눈빛이 영리하게 빛났다. 가난한 공방을 지키기 위해 온갖 사채업자들의 협박 속에서도 살아남았던 그녀의 ‘위기 대처 즉흥 연기력’이 본능적으로 가동되는 순간이었다. 지안은 지원의 귓가에 입술을 바짝 대고 오직 그만이 들을 수 있는 아주 미세한 숨소리로 속삭였다.
“상무님, 제 연기에 맞춰서…… 완벽하게 망가져 주세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지안은 지원의 어깨를 거칠게 밀쳐냈다.
“이봐요, 은지원 상무님!”
아틀리에의 고요를 깨부수며 지안의 날카로운 고함이 터져 나왔다. 방금 전까지 지원을 따뜻하게 어루만지던 온화한 미술 치료 교사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돈에 굶주리고 환멸에 가득 찬, 거칠고 천박한 사기꾼의 목소리였다.
쨍그랑—!
지안은 일부러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흙 주걱과 황동 도구들을 바닥으로 쓸어버렸다. 날카로운 금속음이 지하실 사방으로 흩어졌다.
“내가 여기 자선사업 하러 온 줄 알아요? 은성그룹 후계자라면서 돈도 제대로 안 주는데, 내가 왜 이 미친 환자 수발을 언제까지 들어야 하냐고요! 맨날 발작이나 일으키고 피나 흘려대는 인간 옆에서 나도 미쳐버릴 것 같단 말입니다!”
지원은 순간 지안의 급작스러운 목소리 톤에 흠칫 놀랐으나, 이내 그녀의 의도를 완벽하게 이해했다. 그의 입꼬리가 아주 미세하게 호선을 그렸다가, 이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지원은 자신의 ‘공황 발작 강제 제어’ 능력을 역으로 가동해, 만성 신경독에 중독되어 서서히 미쳐가는 폐인의 모습을 신들린 듯 연기하기 시작했다.
“아, 아악! 시끄러워! 그 입 닥치지 못해!”
지원은 머리를 감싸 쥐고 휠체어에서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하얀 붕대가 감긴 그의 왼손이 머리칼을 쥐어뜯으며 거칠게 흔들렸고, 창백한 얼굴은 고통으로 붉게 충혈되었다.
“머리가…… 머리가 깨질 것 같아! 내 방에서 나가! 당장 꺼지란 말이야!”
지원은 바닥을 뒹굴며 주변에 놓인 점토 덩어리들을 사방으로 집어 던졌다. 물레가 덜컹거리며 멈추어 섰고, 회청색 비색 태토가 바닥에 뭉개졌다. 지안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서는 척, 바닥에 주저앉아 겁에 질린 연기를 이어갔다.
***
같은 시각, 성북동 대저택 1층 모니터실.
어두컴컴한 방 안에서 모니터를 지켜보고 있던 최 비서가 차가운 안경테를 슬며시 밀어 올렸다. 그의 입가에 비열하고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모니터 화면 속에는 은지원이 미친 사람처럼 바닥을 뒹굴며 울부짖고 있었고, 이지안은 돈을 요구하며 소리를 지르다가 겁에 질려 구석에 웅크리고 있었다. 최 비서가 아틀리에 내부를 감시하기 위해 설치한 초소형 감시 카메라는 두 사람의 완벽한 파멸 과정을 실시간으로 전송하고 있었다.
“결국 본색을 드러내는군, 이지안.”
최 비서는 차가운 손가락으로 노트북 키보드를 두드렸다. 그는 지원의 정신 상태가 극도로 악화되었으며, 미술 교사인 이지안 역시 통제 불능의 상태에 빠졌다는 내용의 ‘상태 악화 보고서’를 작성했다. 그리고 이 메일의 최종 수신처인 은성그룹 부회장, 은정학의 개인 비밀 사서함으로 보고서를 전송했다.
하지만 최 비서는 알지 못했다. 그의 노트북 화면이 실시간으로 다른 누군가에게 통째로 털리고 있다는 사실을.
***
서울 강남구 역삼동, 허름한 상가 건물 3층에 위치한 수현 흥신소 사무실.
낡은 소파와 수많은 모니터가 일렁이는 어두운 방 안에서, 흥신소 정보원 송은아의 손가락이 키보드 위를 폭풍처럼 날아다녔다. 그녀의 큰 안경 너머로 비치는 모니터에는 대저택 보안 서버의 데이터 흐름이 실시간 주파수 그래프로 표시되고 있었다.
“수현 언니, 걸려들었어! 최 비서 그 자식 노트북 포트 열렸어!”
송은아가 헤드폰을 고쳐 쓰며 소리쳤다. 옆에서 가죽 재킷을 입은 채 초조하게 담배를 만지작거리던 차수현이 즉각 모니터 앞으로 상체를 밀착했다.
“메일 내용 가로채, 은아 사. 그 새끼가 은정학한테 뭘 보내는지 전부 긁어와!”
“‘디지털 잠입 감청 기술’ 가동합니다. 3, 2, 1…… 복제 완료!”
송은아가 엔터 키를 강하게 내리치자, 최 비서가 방금 전송한 이메일 원본과 첨부된 아틀리에 녹화 영상 파일이 흥신소 모니터로 고스란히 복사되었다. 수현은 최 비서가 작성한 보고서를 정독하며 차갑게 읊조렸다.
“지안이 이 기집애, 연기력 하나는 여전하네. 고등학교 때 연극부 부장 어디 안 가네.”
“언니, 그게 문제가 아니야. 이것 좀 봐.”
송은아의 얼굴에서 장난기가 싹 사라졌다. 그녀가 최 비서의 개인 메일 서버 깊숙한 곳에서 추출해 낸 신원 조회 데이터베이스 파일을 모니터에 띄웠다.
그곳에는 최 비서의 본명과 가족관계증명서 원본이 나타나 있었다. 최 비서의 어머니 쪽 가계도를 타고 올라가자, 은성그룹 부회장 은정학의 어머니 가문과 연결되는 붉은 선이 선명하게 그려졌다.
차수현의 눈동자가 경악으로 크게 벌어졌다.
“최 비서 이 자식…… 단순한 고용 비서가 아니었어. 은정학의 먼 외가 친척이잖아? 처음부터 지원 씨를 감시하고 폐인으로 만들려고 정학이 심어놓은 진짜 스파이였던 거야!”
“대기업 핏줄 암투라는 게 진짜 무섭네. 지안이한테 당장 이 사실을 알려야겠어.”
수현은 마른침을 삼키며 즉각 암호화 텍스트 통신망을 통해 지안의 복제 스마트폰으로 메시지를 전송했다.
***
대저택 지하 아틀리에.
최 비서가 CCTV 화면을 확인하고 보고서를 전송하느라 모니터실을 비운 사이, 지안은 바닥에 뭉개진 점토를 정리하는 척하며 지원에게 다가갔다.
지원은 여전히 바닥에 엎드린 채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연기였지만, 과거 아버지 은태웅 회장에게 학대당했던 비밀 방의 기억이 순간적으로 뇌리를 스쳐 지나가 그의 전신에는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지안은 조심스럽게 그의 어깨를 짚으며, 품 안에서 은은한 침향 향을 풍기는 ‘신경 안정 한방 펜던트’를 그의 코끝에 대어주었다.
“상무님, 괜찮으세요? 이제 숨을 깊게 쉬세요.”
지원의 거친 호흡이 지안의 따뜻한 숨소리와 침향 향에 반응하며 서서히 안정을 찾아갔다. 지원은 지안의 손가락 끝을 꽉 맞잡으며 나직하게 속삭였다.
“지안아…… 네 목소리가 내 어둠을 깨워주었다. 고맙다.”
두 사람은 서로의 상처 입은 손을 쥔 채, 어둠 속에서 말없이 서로를 깊이 위로했다. 비록 렌즈 뒤의 눈이 자신들을 감시하고 있을지라도, 이 차가운 지하 밀실에서 두 사람의 금빛 동맹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 단단하게 봉합되어 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 평화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지안의 가방 안감 속에 숨겨진 복제 스마트폰이 아주 미세한 진동을 울렸다. 지안은 최 비서의 정체와 은정학의 친인척 관계가 담긴 수현의 긴급 경고 메시지를 확인하고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바로 그 순간, 은성병원 원장실.
최 비서가 전송한 ‘은지원 상태 악화 보고서’와 아틀리에 가짜 발작 영상을 모니터링하던 주치의 오만석의 눈빛이 차갑게 번뜩였다. 그는 지원이 완전히 통제 불능의 정신병 상태로 빠져들었다고 확신했다.
“드디어 한계에 다다랐군. 이번 기회에 지원의 뇌 세포를 완전히 마비시켜서 영구 격리해야겠어.”
오만석은 비정한 미소를 지으며 책상 서랍 깊숙한 곳에서 미량의 신경 마비독 ‘코니인’ 성분이 가득 담긴 새로운 갈색 약병과 일회용 주사기를 꺼내 가방에 챙겨 넣었다. 그의 차가운 구두 발자국 소리가 병원 복도에 울려 퍼지며, 그는 즉각 대저택을 향해 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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