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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장된 방패, 거래의 조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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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저택에서, 내 사람에게 함부로 손대지 마라. 은혜라.”


성북동 대저택의 광활한 대리석 로비에 은지원의 서늘한 저음이 벼락처럼 내리꽂혔다.


그는 스스로의 두 발로 대리석 바닥을 딛고 서 있었다. 지안이 조제한 침향 해독제의 약성이 그의 마비된 척수 신경을 깨운 기적적인 결과였다. 지원의 오른손은 은혜라의 손목을 부러뜨릴 듯이 움켜쥐고 있었고, 그의 왼손바닥에서는 신경 안정 한방 펜던트를 너무 세게 쥔 탓에 생긴 손톱 자상에서 붉은 피가 뚝뚝 떨어져 대리석 바닥을 적셨다.


“아악! 오빠, 이거 놔! 놓으라고!”


은혜라는 비명을 지르며 몸을 뒤틀었지만, 지원의 손아귀는 강철처럼 단단했다. 평생 휠체어에 갇혀 죽어가는 미치광이인 줄 알았던 사촌 오빠가 보여준 압도적인 신체적 지배력에, 그녀의 오만한 눈동자는 극도의 경악과 공포로 물들었다.


지안은 지원의 등 뒤에서 숨을 죽인 채 그를 지탱했다. 오른손바닥의 깊은 메스 자상 흉터가 욱신거렸고, 혜라가 던진 현금 뭉치에 스쳤던 뺨과 깨진 유리 조각에 베인 발목에서 찌르는 듯한 통증이 밀려왔지만, 그녀는 등을 똑바로 폈다. 지원의 등 뒤에서 전해지는 묵직한 고동이 지안의 떨리는 호흡을 차분하게 붙잡아 주었다.


“최 비서.”


지원이 혜라를 거칠게 밀쳐내며 차갑게 불렀다. 뒤에서 태블릿을 든 채 사색이 되어 있던 최 비서가 몸을 바르르 떨었다.


“이 무례한 불청객들을 당장 내 저택 밖으로 쓸어내라. 한 번만 더 내 허락 없이 이 문턱을 넘는 자가 있다면, 그 배후가 숙부일지라도 은성그룹 법무팀이 아닌 사설 경호팀의 무력으로 대응하겠다.”


지원의 매서운 경고에 은혜라는 짓밟힌 현금 더미를 쳐다볼 엄두도 내지 못한 채, 최 비서의 부축을 받으며 허겁지겁 저택을 빠져나갔. 무거운 목재 대문이 쾅 소리를 내며 닫히자, 로비에는 기괴할 정도로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지안은 그제야 긴장이 풀려 무릎이 꺾이려 했다. 발목의 유리 자상 통증이 다시금 생생하게 뇌리를 찔렀다. 그런 지안의 허리를 지원이 떨리는 팔로 단단히 감싸 안았다.


“괜찮나, 지안아.”


“네…… 상무님도 왼손에서 피가 많이 흐릅니다. 어서 서재로 올라가 치료해야 합니다.”


옆에서 묵묵히 상황을 지켜보던 한 집사가 조용히 걸어 나왔다. 그의 노련한 눈빛에는 지원의 신체적 회복에 대한 깊은 경외와 함께, 이 비밀을 은정학의 감사팀으로부터 지켜내겠다는 굳건한 신의가 서려 있었다.


“메이드들에게 로비를 정리하라고 지시해 두었습니다. 상무님, 이지안 선생님. 2층 서재로 이동하시지요. 최태준 변호사님이 방금 저택 후문을 통해 도착하셨습니다.”


한 집사의 철저한 보안 통제 하에 세 사람은 은밀히 2층 서재로 이동했다.


서재 안에는 단정한 셔츠에 안경을 쓴, 신뢰감 주는 중년 신사 최태준 변호사가 무거운 가죽 서류 가방을 든 채 대기하고 있었다. 최 변호사는 서재 문이 닫히자마자 지원의 왼손바닥 상처와 지안의 피 묻은 발목을 보며 깊은 한숨을 쉬었다.


“은혜라 상무가 기습적으로 들이닥칠 줄은 몰랐습니다. 이지안 선생, 가문의 빚더미 내막이 저택 고용인들 앞에서 폭로되었으니, 은정학 부회장 측 감사팀이 이를 빌미로 선생을 ‘신용 불량 및 품위 유지 위반’으로 즉각 해고하려 들 것입니다.”


지안은 소독약을 적신 거즈로 지원의 왼손바닥 손톱 자상을 조심스럽게 닦아내며 입술을 깨물었다.


“제 개인의 명예는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제가 이 저택에서 쫓겨나면 상무님의 독극물 해독 치료가 중단됩니다. 삼촌의 사채 빚 3억 원은 상무님이 임시 동결해 주셨지만, 그것은 임시 조치일 뿐…… 은정학 부회장이 법적 맹점을 파고들면 언제든 공방이 다시 압류될 수 있습니다.”


지원은 지안의 오른손바닥에 새겨진 메스 자상 흉터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자신을 구하기 위해 피를 흘렸던 그녀의 고귀한 손끝이, 가난이라는 비정한 현실 때문에 짓밟히는 것을 그는 결코 용납할 수 없었다. 지원의 눈동자에 후계자 특유의 차가운 지배자적 카리스마가 일렁였다.


“최 변호사. 지안이를 완벽하게 보호할 수 있는 법적 방패를 만들어라. 은정학이 내 저택의 고용 계약을 함부로 뒤흔들지 못하게.”


최태준 변호사는 안경테를 밀어 올리며 정교하게 작성된 서류 한 장을 테이블 위에 펼쳤다. 그것은 ‘대저택 미술 치료 교사 고용 계약서’의 개정 초안이었다.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기존의 단순 미술 교사 계약을 전면 개정하여, 이지안 선생의 신분을 은지원 상무 개인의 ‘전담 뇌 신경 치료 자문관(Special Neuro-Therapy Advisor)’으로 격상시키는 조항을 준비했습니다.”


최 변호사의 손가락이 계약서의 특정 조항을 짚었다.


“여기에 ‘후계자 직속 특별 의료 면책 특권(Successor's Direct Medical Immunity)’ 조항을 추가했습니다. 이 조항에 따르면, 자문관의 모든 고용, 해임, 급여 지급 권한은 오직 피치료자인 은지원 상무 본인에게만 독점 귀속됩니다. 은성그룹 이사회나 법적 보호자인 은정학 부회장이라 할지라도, 치료의 연속성을 해칠 수 있는 임의 해고나 계약 파기를 가할 수 없도록 법적 장치를 걸어둔 것입니다.”


지안은 서류를 들여다보며 최 변호사의 천재적인 법리 해석에 감탄했다. 이것이 있다면 은정학이 아무리 감사팀을 움직여도 지안을 저택 밖으로 쫓아낼 수 없었다.


“이것으로 지안이의 신분은 보장되는군.”


지원이 떨림 없는 오른손으로 만년필을 쥐고 개정 계약서 서명란에 단호하게 자신의 필체를 남겼다. 지안 역시 거즈가 감긴 오른손으로 펜을 쥐고 정성스레 서명했다. 두 사람의 법적, 정서적 결합이 한층 더 단단해지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성북동 저택의 방패가 완성되던 그 시각, 경기도 여주의 은광요 공방에는 또 다른 추악한 음모의 어둠이 드리우고 있었다.


***


경기도 여주의 울창한 소나무 숲속, 검은 그을음이 묻은 붉은 황토 가마터 마당.


지안의 남동생 이지호(19세)는 덥수룩한 머리를 쓸어 올리며 가마터 입구에 서 있었다. 누나 지안이 자신과 아버지를 위해 자존심을 꺾고 재벌가 대저택의 치료 교사로 들어갔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지호의 가슴은 분노와 미안함으로 타들어 가고 있었다. 투병 중인 아버지는 병원에 누워 있었고, 공방에는 지호와 막내 수습생 김민우만이 남아 쓸쓸히 가마터를 지키고 있었다.


쿠우우웅—!


갑자기 고요한 소나무 숲의 정적을 깨뜨리며, 귀를 찢는 듯한 요란한 배기음이 가마터 마당을 엄습했다.


화려한 네온 그린 컬러의 초고가 수입 스포츠카 한 대가 흙먼지를 광적으로 일으키며 은광요 마당 한가운데로 돌진해 들어왔다. 거칠게 급제동을 건 차량에서 내린 사내는 피어싱을 주렁주렁 매달고 삐딱한 자세로 서 있는 청년, 은정학 부회장의 아들이자 사교계의 악명 높은 망나니 은석우였다.


석우는 가죽 장갑을 낀 손으로 코를 쥐며 침을 뱉었다. 그의 등 뒤에는 검은 양복을 입은 사설 경호원 3명이 삼엄한 표정으로 대기하고 있었다.


“아, 냄새나네. 이딴 흙구덩이에서 어떻게 사람이 살지?”


석우는 오만한 발걸음으로 걸어와, 이만길 장인이 청자를 빚기 위해 마당에 정성스레 다듬어 둔 백토 점토 더미를 구두 굽으로 사정없이 짓밟아 뭉개버렸다.


“어이, 꼬맹이.”


석우가 지호를 향해 턱을 짓까불며 비열하게 웃었다.


“네 누나가 성북동 저택에서 우리 지원 오빠 꼬셔서 돈 뜯어내고 있는 꽃뱀 이지안 맞지? 그 걸레 같은 년 덕분에 사채 압류가 임시로 풀렸다고 좋아하더라고?”


“뭐라고? 이 개새끼가 어디서 입을 함부로 놀려!”


지호의 얼굴이 순식간에 분노로 벌겋게 달아올랐다. 지호는 주먹을 꽉 쥐며 석우를 향해 돌진하려 했으나, 옆에 있던 수습생 김민우가 지호의 팔을 다급히 붙잡아 말렸다.


“지호야, 참아야 해! 저 사람 대기업 놈들이 보낸 자들이야!”


석우는 지호의 분노를 비웃으며, 품 안에서 은광요 가마터의 토지 강제 수용 공고장 조각을 꺼내 바닥에 던졌다.


“참지 마, 이 무식한 흙쟁이 새끼야. 네 아비 늙은이는 병실에서 다 죽어가는 폐병 환자라며? 빚 3억도 못 갚아서 누나를 재벌가 미치광이 침실에 밀어 넣은 집구석 주제에 자존심은 있어 가지고. 어차피 이 가마터는 우리 아버지가 리조트로 싹 밀어버릴 거니까, 더러운 흙자루 챙겨서 당장 꺼져.”


“우리 아버지 모욕하지 마!”


지호는 이성을 완전히 상실했다. 그는 민우의 손을 거칠게 뿌리치고 마당 옆에 있던 물 양동이를 들어 석우의 스포츠카와 그의 명품 수트를 향해 거칠게 뿌려버렸다. 차가운 물과 흙먼지가 석우의 얼굴과 옷을 엉망으로 적셨다.


“악! 이 더러운 새끼가 미쳤나!”


석우가 비명을 지르며 얼굴을 닦아내는 사이, 지호는 그대로 달려들어 석우의 비열한 뺨을 향해 주먹을 날렸다.


퍽—!


둔탁한 타격음과 함께 석우의 고개가 거칠게 돌아갔다. 석우는 바닥에 주저앉아 입술에서 흘러내리는 붉은 피를 손끝으로 훔쳐냈다. 하지만 그의 일그러진 얼굴에는 분노 대신, 사악하고 비열한 미소가 짙게 피어올랐다.


“걸려들었네, 무식한 새끼.”


삐용, 삐용, 삐용—!


그 순간,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공방 입구 도로에서 사이렌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지며 은성경찰서 순찰차 두 대가 가마터 마당으로 들이닥쳤다. 차 문이 열리고 몽둥이와 수갑을 찬 경찰들이 떼를 지어 내려 지호를 에워싸기 시작했다.

HẾT CHƯƠ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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