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밖의 발걸음, 첫 번째 균열
지원의 발걸음이 철문 너머 눈부신 햇살 속으로 향하는 순간, 플래시 불빛이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은지원 상무님! 정신병설은 사실입니까?”
“수년간 성북동 저택에 은둔하셨던 진짜 이유가 무엇입니까!”
“방금 전 비서실을 통해 흘러나온 가마터 압류 소식과 상무님의 행보가 관련이 있습니까?”
정문을 가로막고 서 있던 수십 명의 기자들이 굶주린 하이에나처럼 마이크를 들이밀었다. 찰나의 순간, 수년 만에 마주한 세상의 소음과 강렬한 햇빛이 은지원의 감각을 사정없이 난도질했다. 절대 음감과 공감각 능력을 지닌 그의 귀에 기자들의 질문은 날카롭게 깨진 유리 조각들이 되어 고막을 찔렀다. 눈앞이 하얗게 번지며 가벼운 이명이 귓가를 맴돌았다. 굳어있던 척수 신경이 다시 비명을 지르려던 그때, 그의 오른손을 감싸 쥔 온기가 더욱 단단해졌다.
이지안이었다.
지안은 메스에 베여 거즈로 칭칭 감긴 자신의 오른손바닥 통증을 악물고 참아내며, 지원의 손을 강하게 움켜잡았다. 지안의 정직하고 따뜻한 숨소리가 지원의 공감각 청각을 타고 들어와 그의 요동치던 심박수를 정상 범위로 차단했다. 지원은 지안의 숨결을 닻 삼아 눈동자의 초점을 흐트러뜨리지 않고 똑바로 정면을 응시했다. 수년간 갇혀 있던 성북동 대저택의 차가운 요새를 깨고 나온 황태자의 눈빛은 서늘하리만치 예리했다.
“비켜서십시오.”
지원의 목소리가 낮고 무겁게 울려 퍼졌다. 휠체어 없이 제 발로 당당히 정문을 통과해 선 그의 모습에 기자들은 압도당한 듯 주춤하며 길을 열었다. 지원의 곁에 선 최태준 변호사가 품 안에서 법적 신원 보증서와 성명서를 꺼내 들며 차분하고 정교한 어조로 기자회견을 주도하기 시작했다.
“은성그룹 후계자 은지원 상무의 법률 대리인 최태준입니다. 은 상무님은 수년간의 요양을 마치고 오늘부로 공식 경영 일선에 복귀하셨음을 선포합니다. 아울러, 은 상무님의 전담 치료 자문관인 이지안 선생과 그녀의 가문 공방 ‘은광요’에 가해진 골든캐피탈의 사채 압류 집행은 전면 불법 추심임을 밝힙니다. 은 상무님은 자신의 명목상 후계자 권력과 주식 지분을 활용하여, 금일 오전부로 은광요 공방에 가해진 사채 압류 집행을 임시 동결하라는 법적 지시를 은성그룹 법무팀과 채권단에 정식 발송하셨습니다.”
기자들의 카메라 플래시가 다시 한번 광적으로 터져 나왔다. 은지원이 완전히 정상적인 정신과 신체 상태로 복귀했다는 사실, 그리고 은정학 부회장의 비열한 압류 공작을 단숨에 동결시켰다는 소식은 이사회 내부와 언론을 발칵 뒤집어놓기에 충분했다.
기자회견이 끝나고, 지안과 지원은 기자들의 추격을 피해 저택 내부의 대리석 로비로 무사히 대피했다. 굳게 닫힌 정문 너머로 여전히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저택 안은 기괴할 정도로 고요했다. 지안은 참았던 숨을 내쉬며 자리에 주저앉으려 했다. 아버지가 쓰러지셨다는 소식에 온몸의 피가 마르는 것 같았고, 발목의 유리 자상 상처에서 다시 붉은 피가 배어나와 양말을 적시고 있었다.
“지안아.”
지원이 다급히 지안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의 왼손바닥 역시 펜던트를 너무 세게 쥔 탓에 손톱이 살을 파고들어 붉은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두 사람의 상처가 맞닿으며 차가운 로비 바닥에 붉은 흔적을 남겼다.
“최 변호사가 사설 경호팀을 여주 공방으로 급파했다. 아버님은 서울 은성병원 VIP 병동으로 이송 중이야. 내가 직접 최고 의료진을 배치했으니 걱정하지 마라.”
지원의 차분한 목소리에 지안은 겨우 떨림을 가라앉혔다.
“고맙습니다, 상무님…… 저를 위해 이 감옥 같은 저택 밖으로 나와주셔서.”
“내가 말했지. 네가 무너지면 나를 구원해 줄 사람도 없다고.”
지원의 눈동자 속에 깊은 신뢰와 맹목적인 보호 의지가 깃들어 있었다.
바로 그때, 저택 로비의 무거운 목재 대문이 거칠게 열렸다. 또각, 또각. 날카롭고 오만한 하이힐 소리가 대리석 바닥을 신경질적으로 때리며 다가왔다.
최신 트렌드의 화려한 디자이너 수트를 걸치고, 짙은 명품 향수 냄새를 풍기며 걸어 들어온 여인. 은정학 부회장의 딸이자 은성패션 상무인 은혜라였다. 그녀의 뒤에는 태블릿을 들고 눈치를 살피는 최 비서가 뒤따르고 있었다.
“어머, 이게 무슨 꼴값들이야?”
은혜라가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비웃음을 흘렸다. 그녀의 날카로운 눈동자가 지안의 흙먼지 묻은 린넨 셔츠와 거즈로 감긴 손바닥, 그리고 바닥에 떨어진 붉은 피를 차갑게 훑어내렸다.
“오빠가 미쳐서 저택 구석에서 자해나 일삼더니, 결국 이딴 천박한beggar 장이 딸년한테 영혼이라도 팔아넘긴 거야? 이사회에 지분 위임 서류를 제출했다고? 오빠 정신이 어떻게 되지 않고서야 은성그룹의 주식 의결권을 이 가난뱅이 도자기 복원가 따위한테 넘길 수가 있어?”
은혜라의 목소리가 웅장한 대저택 로비에 찌렁찌렁 울려 퍼졌다. 청소를 하던 메이드들과 정원사들이 가던 길을 멈추고 숨을 죽인 채 상황을 지켜보기 시작했다. 혜라는 고용인들을 향해 턱을 치켜들며 목소리를 더욱 높였다.
“모두 똑똑히 들어! 이지안이라는 저 계집은, 삼촌 이만수라는 도박 중독자가 은광요 공방을 담보로 사채 3억 원을 빌려 야반도주하는 바람에 가문 전체가 빚더미에 앉은 거지떼야! 돈 몇 푼에 눈이 멀어 미술 치료 교사라는 그럴듯한 가면을 쓰고 우리 지원 오빠한테 접근한 꽃뱀이라고!”
고용인들 사이에서 미세한 웅성거림이 시작되었다. 지안의 얼굴이 수치심으로 붉게 물들었지만, 그녀는 기죽지 않고 등을 똑바로 폈다. 지안은 혜라의 눈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조목조목 반박했다.
“은혜라 상무님. 저는 은지원 상무님과의 정당한 치료 자문 계약서에 따라 이곳에 상주하고 있는 복원가입니다. 제 가문의 빚은 상무님의 건강이나 계약의 법적 효력과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장인으로서의 제 자부심과 기술을 돈벌이 수단으로 비하하지 마십시오.”
“자부심? 기술? 웃기고 있네.”
은혜라가 가죽 가방을 열어젖히더니, 현금 뭉치 몇 개를 꺼내 지안의 얼굴을 향해 거칠게 던졌다. 촤르르륵—! 빳빳한 오만 원권 지폐들이 지안의 뺨을 스치며 바닥으로 어지럽게 흩날렸다.
“ Beggar 장이 딸년 주제에 어디서 자존심을 논해? 푼돈에 몸과 기술을 파는 꽃뱀이면 꽃뱀답게 기어 다녀. 이 돈 들고 당장 내 저택에서 꺼져!”
지안은 뺨에 닿았던 차가운 지폐의 촉감을 느끼며, 바닥에 떨어진 돈을 단 한 푼도 줍지 않았다. 그녀는 혜라의 오만한 눈빛을 피하지 않고 장인의 단단한 눈빛으로 똑바로 마주 보았다. 부서진 도자기를 금빛으로 메울 때 필요한 장인의 인내와 자존심이 그녀의 영혼을 지탱하고 있었다.
“돈으로 사람의 존엄을 살 수 있다고 믿는 상무님의 태도야말로 가장 천박합니다.”
“이게 어디서 말대꾸야!”
지안의 당당함에 이성을 잃은 은혜라가 얼굴을 붉히며 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혜라의 하얗고 고운 손이 지안의 뺨을 향해 허공을 갈랐다.
바로 그 순간.
휠체어에 앉아 있던 은지원이 기적처럼 자신의 두 발로 대리석 바닥을 딛고 스스로 일어섰다. 해독제의 약성이 그의 척수 신경을 깨운 것이었다. 지원은 순식간에 지안의 앞을 가로막으며, 허공을 가르던 은혜라의 손목을 허공에서 낚아채 그대로 꺾어 내렸다.
탁!
“아악! 오빠, 이거 놔!”
은혜라가 비명을 지르며 몸을 뒤틀었지만, 지원의 손아귀 힘은 강철처럼 단단했다. 지원은 피가 흐르는 왼손으로 혜라의 손목을 꽉 쥔 채, 서늘한 살기를 띤 눈빛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내 저택에서, 내 사람에게 함부로 손대지 마라. 은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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