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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빛 동맹, 그리고 다가오는 어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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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정학 부회장이 휩쓸고 간 침실에는 비정하리만치 차가운 적막만이 감돌았다. 바닥에 처참하게 박살 난 기계식 괘종시계의 유리 파편들이 아침 햇살을 받아 날카로운 이빨처럼 번뜩였다.


이지안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자리에 서 있었다. 긴장이 풀리자 그동안 억눌러왔던 신체적 고통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지난밤 은지원의 자해 폭주를 맨손으로 막아내다 메스에 깊게 베인 오른손바닥 상처가 맥박을 따라 욱신거리며 타는 듯한 통증을 뿜어냈다. 게다가 서재 안쪽 비밀 방에서 깨진 크리스탈 꽃병 파편에 긁힌 발목 상처에서도 다시 붉은 피가 배어나와 양말을 적시고 있었다. 지안은 신음소리를 삼키며 절뚝거리는 다리로 지원에게 다가갔다.


침대 끝에 선 은지원은 미동도 없이 서 있었다. 평생 자신을 옭아매던 아버지의 학대 트리거이자 숙부의 지독한 가스라이팅 도구였던 시계를 제 손으로 때려 부순 사내의 얼굴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예리하게 각성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의 왼손바닥에서는 붉은 피가 뚝뚝 떨어져 바닥의 대리석을 적시고 있었다. 숙부의 교활한 불시 검문 속에서 미치광이 연기를 하지 않고 이성을 유지하기 위해, 지안이 준 ‘신경 안정 한방 펜던트’를 살을 파고들 정도로 움켜쥔 대가였다.


“상무님…….”


지안이 나지막이 그의 이름을 부르며 아틀리에에서 가져온 오동나무 킨츠기 도구 상자의 구석 서랍을 열었다. 그 안에는 한 집사가 미리 챙겨둔 구급용 소독약과 붕대가 들어 있었다.


지원은 대답 대신 지안의 손길에 자신의 왼손을 맡겼다. 지안은 조심스러운 손길로 그의 주먹을 폈다. 길고 창백한 손가락 마디마디가 굳어 있었고, 손톱이 살을 깊게 파고들어 생긴 네 개의 반달 모양 자상에서 피가 고여 있었다. 지안이 약솜에 소독약을 묻혀 상처를 닦아내자, 지원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렸다. 그러나 그의 시선은 상처가 아닌, 지안의 짓무른 손가락 끝과 거즈로 칭칭 감긴 오른손바닥에 고정되어 있었다.


“너는…….”


지원의 목소리는 낮고 낮았지만, 더 이상 예전의 광기 어린 울부짖음이 아니었다. 그의 예민한 ‘숨소리 공감각 청각’이 지안의 귓가를 맴돌았다. 지안의 호흡은 상처의 통증으로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지만, 그 안에는 한 올의 거짓도, 가식도 없었다.


“왜 나를 위해 이토록 피를 흘리는 거지? 내가 진짜 미치광이가 아니라는 걸 어떻게 확신하고 목숨을 건 거냐.”


지안은 그의 상처 위에 깨끗한 붕대를 정성스레 감으며 눈을 맞추었다.


“상무님의 등에 새겨진 무수한 자해 흔적들…… 그리고 척수 근처에 미세하게 남겨진 붉은 주사 바늘 자국들을 제 손끝의 절대 촉각으로 느꼈습니다. 상무님의 공황과 마비는 나약한 정신 때문이 아닙니다. 주치의 오만석과 숙부 은정학이 상무님을 폐인으로 만들기 위해 주입한 비정한 신경독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부서진 것을 보면 그대로 지나치지 못하는 장인입니다. 깨진 도자기를 금빛으로 메워 세상에 단 하나뿐인 예술품으로 복원하듯, 상무님의 깨진 영혼도 제가 반드시 복원해 드리겠습니다.”


지안의 정직하고 단단한 선언에 지원의 눈동자가 격렬하게 흔들렸다. 평생 그 누구도 믿지 못하고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세웠던 ‘제한적 신뢰 장벽(Limited Trust Barrier)’이 모래성처럼 허물어지는 순간이었다. 지원은 지안이 감싸 쥔 자신의 왼손에 힘을 주어 그녀의 손을 꽉 맞잡았다. 두 사람의 상처 입은 손바닥이 맞닿으며 묘한 온기가 번져나갔다. 그것은 비정한 은성그룹의 암투 속에서 서로의 영혼을 구원하겠다는 최초의 ‘금빛 동맹’의 맹세였다.


바로 그 순간, 지안의 앞치마 주머니 속에서 날카로운 진동음이 울렸다. 수현이 전해준 추적 불가능한 세컨드폰이었다. 지안은 불길한 예감에 휩싸이며 서둘러 전화를 받았다. 수신 화면에는 여주 공방을 지키고 있는 남동생 이지호의 이름이 떠 있었다.


“지호야? 무슨 일이야?”


“누나! 누나 어떡해! 지금 공방에……!”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지호의 목소리는 극도의 공포와 절망으로 찢겨 있었다. 그리고 그 뒤편으로 둔탁한 쇠파이프가 도자기를 사정없이 때려 부수는 파열음과 낯선 사내들의 거친 고함, 가마터의 황토 벽돌이 무너져 내리는 굉음이 고스란히 흘러나왔.


“조상식 그 사채업자 깡패 새끼들이 수십 명이나 들이닥쳤어! 아버지가 쓰러지셨어! 마당에 쌓아둔 옹기들을 전부 부수고 딱지를 붙이고 있어! 누나, 제발 도와줘!”


“뭐라고? 아버지가 쓰러지셨다고?!”


지안의 얼굴이 순식간에 핏기를 잃고 창백하게 질렸다. 투병 중인 아버지가 충격으로 쓰러졌다는 소식에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버렸다.


그때, 수화기 저편에서 지호의 비명과 함께 폰을 거칠게 빼앗는 소리가 들렸다. 이내 낮고 비열한, 가죽 냄새가 물씬 풍기는 기름진 목소리가 지안의 귓전을 때렸다. 골든캐피탈의 사장, 악덕 사채업자 조상식이었다.


“어이, 이지안 선생. 오랜만이지? 네 삼촌 이만수 그 인간이 은광요 공방을 담보로 빌린 사채 3억 원 말이야. 오늘이 만기인 건 알고 있지?”


“분명 만기는 다음 달 말이라고 하셨잖아요! 계약서에도 그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지안이 수화기를 쥔 손을 부르르 떨며 소리쳤다. 조상식은 혓바닥을 차며 비웃었다.


“아하, 원래는 그랬지. 그런데 아주 친절하신 대기업 법무팀에서 우리 쪽에 정보를 주더라고. 은광요의 재정 상태가 영구 파산 수준이라 담보 가치가 상실되었다고 말이야. 그래서 계약서 제12조에 적힌 ‘기한이익상실’ 조항을 발동했지. 오늘 당장 3억 원을 현찰로 상환하지 않으면, 이 유서 깊은 공방은 내일 아침 경매 법정으로 넘어가고 가마터는 철거될 거다. 은정학 부회장님이 이 땅에 아주 멋진 리조트를 짓고 싶어 하셔서 말이지.”


조상식의 배후에 은정학 부회장이 있음을 숨기지도 않는 노골적인 협박이었다. 은정학은 저택 내부에서의 실패를 만회하기 위해, 지안의 가장 취약한 아킬레스건인 가문의 공방 ‘은광요’를 통째로 압류해 그녀의 숨통을 끊어놓으려는 비열한 ‘사채 담보 강제 압류’ 공작을 즉각 실행한 것이었다.


“제발…… 제발 가마만은 부수지 말아 주세요. 제가 저택에서 받은 선급금 5천만 원이 있습니다! 지금 당장 송금할 테니 제발 시간을 주세요!”


지안이 절망적인 목소리로 애원했다. 평생 자존심 하나로 버텨온 장인의 딸이 사채업자 앞에서 무릎을 꿇어가며 매달렸다. 그러나 조상식은 가소롭다는 듯 껄껄 웃었다.


“5천만 원? 장난해? 연체 이자에 법정 수수료까지 복리로 붙어서 벌써 상환액은 3억 5천만 원이 넘었어. 푼돈으로 시간 끌 생각 하지 말고, 오늘 오후까지 전액 입금 안 되면 네 동생 지호 놈 신체 포기 각서부터 집행할 테니까 그리 알아.”


뚝. 무자비하게 전화가 끊겼다.


지안은 다리에 힘이 풀려 바닥으로 주저앉으려 했다. 평생을 바쳐 지켜온 아버지의 유산이자 가문의 심장인 은광요가, 그리고 투병 중인 아버지와 어린 동생이 자신 때문에 단숨에 잿더미로 변할 위기에 처한 것이었다. 눈물이 지안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하지만 그녀의 몸이 차가운 대리석 바닥에 닿기 직전, 강력하고 단단한 손길이 그녀의 허리와 어깨를 낚아채 지탱했다.


은지원 보디였다.


지원은 지안을 자신의 품으로 강하게 끌어당겨 안았다. 그의 눈동자는 더 이상 공황에 떨던 나약한 환자의 눈빛이 아니었다. 숙부를 향한 서늘한 증오와, 자신을 구원해 준 여인을 지키겠다는 맹목적인 분노가 결합된, 은성그룹의 정당한 황태자의 눈빛이었다.


“무릎 꿇지 마, 이지안.”


지원의 묵직한 목소리가 지안의 귓가를 울렸다.


“내 앞에서도, 내 숙부 앞에서도 단 한 번도 꿇지 않았던 무릎이다. 고작 그런 들개들 앞에서 네 자존심을 꺾고 쓰러지지 마라.”


지원은 품 안에서 떨고 있는 지안의 눈물을 짓무른 손가락 끝으로 조심스럽게 닦아주었다. 그리고 침실 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최 변호사, 들어와.”


지원의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은정학의 눈을 피해 저택 내부로 잠입해 대기하고 있던 법률고문 최태준 변호사가 서재 문을 열고 급히 들어섰다. 최 변호사의 손에는 이미 조상식과 골든캐피탈의 불법 금융 거래 내역이 담긴 태블릿이 들려 있었다.


“상무님, 은정학 부회장이 사채업자 조상식을 움직여 은광요의 대출 계약을 강제로 만기 전환시킨 정황을 확인했습니다. 명백한 불법 추심이자 권리 남용입니다. 당장 법원에 압류 집행 정지 가처분 신청을 낼 수 있지만, 법원의 결정이 나오기 전에 조상식 일파가 실력 행사를 통해 공방의 기물을 완벽히 파손할 위험이 있습니다.”


최 변호사의 냉철한 분석에 지안의 가슴이 다시 조여들었다. 불법임을 증명하는 시간 동안 공방은 이미 폐허가 될 터였다.


지원은 차갑게 미소를 지었다.


“그들이 법의 허점과 깡패들의 무력으로 나온다면, 우리는 더 거대한 자본과 절대적인 법적 권한으로 짓밟아주면 돼.”


지원은 최 변호사를 똑바로 응시하며 거침없는 목소리로 지시를 내렸다.


“최 변호사, 당장 내 주식 의결권 15%를 이지안에게 전격 이전하는 법적 위임장과 비밀 신탁 계약서를 작성해.”


“상무님! 그 지분은 상무님이 이사회에서 은정학 부회장과 맞설 수 있는 유일한 방패이자 무기입니다! 그걸 이지안 선생에게 넘기시면 상무님의 입지가 위태로워집니다!”


최 변호사가 경악하며 만류했다. 그러나 지원의 결단은 단호했다.


“이지안이 무너지면, 나를 치료하고 복원해 줄 사람도 세상에 없다. 그녀의 공방을 지키는 것이 곧 나를 지키는 유일한 길이다. 그리고 이지안이 은성그룹의 대주주가 되는 순간, 조상식 따위의 사채업자들이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신분이 되지.”


지원은 지안의 다친 오른손을 다시 감싸 쥐었다. 그의 왼손바닥에서 흐른 붉은 피가 지안의 상처 입은 손바닥과 섞여 들어갔다. 피와 흉터로 맺어진, 그 어떤 법적 계약보다 단단한 구원의 서약이었다.


“상무님…… 하지만 저택의 보안 요원들이 문을 막고 있습니다. 밖으로 나가시면 숙부의 감시망이 즉각 작동할 겁니다.”


지안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말하자, 지원은 서재 너머 굳게 닫힌 성북동 대저택의 육중한 철문을 바라보았다. 그곳은 수년 동안 자신을 가두었던 감옥이자, 스스로 미치광이가 되어 숨어 지내던 도피처였다.


지원은 지안의 손을 이끌고 문을 향해 한 걸음씩 힘차게 걸어 나갔다. 그의 걸음걸이에는 한 올의 망설임도 없었다.


“더 이상 이 어두운 지하실에 숨어 인형극을 벌이는 짓은 끝이다.”


지원의 눈동자가 태양빛을 받아 찬란하게 빛났다.


“내가 직접 이 저택의 철문을 열고 세상 밖으로 걸어 나가겠다. 내 약혼녀와 그녀의 영토를 지키기 위해.”

HẾT CHƯƠ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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