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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러진 자존심과 첫 번째 석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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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초.”


진우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것은 낮고 메마른 음성이었다. 귓가와 눈꼬리를 타고 흘러내린 붉은 선혈이 턱 끝에 맺혀 뚝뚝 떨어졌다. 지독한 고통이 뇌를 헤집어 놓았고, 시야는 마치 붉은 안개가 낀 것처럼 흐릿했다. 하지만 그의 손끝은 미세하게 떨릴지언정 음차를 쥔 힘만큼은 결코 흩어지지 않았다.


“진우 씨! 피가…… 귀에서 피가 흐르고 있네! 어서 이 기도를 받아……”


엘리시아가 사색이 된 얼굴로 성검 아우렐리아를 바닥에 짚은 채 그를 부축하려 했다. 그녀의 정결한 황금빛 마나가 진우의 몸을 감싸려 했으나, 진우는 가볍게 고개를 가로저으며 그녀의 손길을 밀어냈다.


“안 됩니다, 엘리시아 씨. 지금 마법이나 성력을 방출하면…… 어렵게 조율한 주파수가 다시 깨집니다. 이 무음 장막은 오직 제 음차의 진동으로만 지탱되고 있어요.”


갈라진 목소리였지만, 그 속에 담긴 명령은 기이할 정도로 단호했다. 엘리시아는 입술을 깨물며 신성 마력을 강제로 거두어들였다. 자신의 무력과 성벽이 아무런 쓸모가 없는 이 미궁 속에서, 오직 이 약골 고고학자의 지식만이 자신들을 살리고 있다는 사실이 그녀의 심장을 강하게 옥죄었다. 그것은 뼈아픈 자책감이자, 동시에 그를 향한 맹목적인 보호 본능으로 화하여 타올랐다.


“채원 씨, 소희 씨. 전열을 갖추고 절 따라오십시오. 30초 안에 이 회랑을 가로질러 중앙 제단으로 가야 합니다.”


“알았어, 약골. 네 등 뒤는 내가 확실히 지킬 테니까 걷기나 해.”


강소희가 거대 도끼 바르그를 고쳐 잡으며 진우의 왼편을 막아섰다. 오라 폭주로 인한 가벼운 근육 경련이 일어났음에도, 그녀의 야성적인 눈동자는 오직 진우를 노릴지 모르는 어둠의 사각지대만을 매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힘으로 해결하려다 죽을 뻔한 자신을 구해준 이 나약한 사내에게, 그녀는 이미 본능적으로 굴복해 있었다.


윤채원 역시 지팡이 아스트라를 품에 안은 채 진우의 오른편에 바짝 밀착했다. 그녀의 자색 눈동자는 진우의 손끝에서 미세하게 진동하는 음차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지상의 마법 공식으로는 결코 해독할 수 없었던 고대 아키텍트의 음향 함정…… 그걸 고작 주파수 역진동 공식 하나로 상쇄해 버리다니. 오진우, 당신은 도대체 어떤 지식을 품고 있는 건가요?’


윤채원의 가슴속에서 지적 굴복감과 함께 기묘한 집착의 싹이 급격하게 뻗어 나갔다. 이 사내의 지식은 마탑의 자산이 아니라, 오직 자신만의 것이어야 했다.


스르륵.


어둠 속에서 서하린의 형상이 조용히 솟아올라 진우의 그림자 속에 녹아들었다. 그녀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진우의 옷자락에서 풍겨오는 아키텍트의 피 향기에 본능적인 안도감을 느끼며 그의 완벽한 그림자가 되기를 자처하고 있었다.


진우는 비틀거리는 걸음을 옮겼다. 5미터 반경의 소리 상쇄 필드가 그들을 감싼 채 움직였다. 장막 내부는 기묘할 정도로 정적만이 감돌았지만, 그 장막 바로 바깥은 여전히 처참한 생지옥이었다.


“크아아아악! 살려줘! 제발!”


“망령들이…… 망령들이 내 눈을 파먹고 있다!”


제국 학술 조사단의 기사들과 마법사들은 바닥을 뒹굴며 자신들의 칼로 서로를 찌르고 있었다. 귀와 눈에서 피를 토하며 미쳐 날뛰는 그들의 모습은 참혹하기 짝이 없었다. 진우의 경고를 비웃으며 오만하게 마법을 난사했던 대가였다.


그 지옥 같은 풍경의 한가운데, 흙더미와 시체 사이에 깔린 채 피를 흘리며 허우적거리는 사내가 보였다.


황립 고고학 아카데미의 권위자이자, 진우의 논문을 가로채고 그를 사기꾼으로 몰아 매장했던 장본인. 하인리히 교수였다.


“오…… 오진우……?”


하인리히는 주름진 얼굴에 피와 흙먼지를 뒤집어쓴 채, 진우 일행이 펼친 푸른색 장막을 발견하고 눈을 부릅떴다. 그 장막 내부가 기적적인 무음 지대임을 깨달은 그의 눈에 비열한 탐욕과 절박함이 동시에 스쳤다.


“진우야! 나다, 네 스승인 하인리히다! 나를…… 나를 이 장막 안으로 들여보내다오! 어서!”


그는 비굴하게 기어 나와 진우의 바지깃을 잡으려 손을 뻗었다. 그의 가슴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던 제국 학술원의 금빛 훈장들이 진흙 속에서 볼품없이 굴러다녔다.


진우는 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 차갑게 식어버린 눈빛으로 하인리히를 내려다보았다. 앤티크 모노클 너머로 보이는 하인리히의 주황색 감정 마나 선은 극도의 공포와 비열한 이기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오진우! 내 말을 들어라! 네가 나를 구하고 그 첫 번째 석판 조각을 내게 넘긴다면…… 아카데미의 모든 명예를 돌려주마! 표절 혐의도 벗겨주고, 정교수 자리도 보장해주지! 제국 황실의 이름으로 약속하마!”


하인리히는 진우가 여전히 학계의 명예에 목말라 있을 것이라 믿고 있었다. 그의 얄팍한 머리로는 그것이 유일한 회유책이라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진우의 입가에는 차가운 실소만이 맴돌았다.


“명예라…….”


진우는 갈라지고 쉰 목소리로 조용히 읊조렸다.


“하인리히 교수님. 제 논문을 훔쳐 만든 그 엉터리 해독서로 미궁의 벽을 부수고 들어왔을 때, 당신은 이미 학자로서의 생명이 끝난 겁니다. 유적의 규칙을 무시한 무지가 어떤 파멸을 부르는지, 당신의 그 위대한 학식으로 직접 겪어보시지요.”


“이, 이놈이…… 감히 스승의 은혜도 모르는 배은망덕한 놈이!”


하인리히가 이빨을 갈며 저주를 퍼부으려 했으나, 진우는 냉정하게 시선을 돌려 그를 지나쳤다. 지상의 권력과 학벌이라는 허상이 이 깊은 심연 속에서 얼마나 무력하고 하찮은 것인지, 진우는 온몸으로 증명하고 있었다. 대장들은 그런 진우의 단호한 뒷모습을 보며, 그의 철저한 이성과 지혜에 다시 한번 깊은 전율을 느꼈다.


“아아아악! 손가락이! 내 손가락이!”


그때, 회랑 중앙 제단 바로 앞에서 끔찍한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하인리히의 애제자이자 아카데미의 수석 졸업생이었던 카일이었다. 그는 이미 저주 음파에 한쪽 귀의 고막이 터진 채, 제단 위에 놓인 붉은빛의 ‘태양의 석판 조각’을 향해 기어가고 있었다. 어떻게든 성물을 손에 넣으면 이 위기를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 믿은 모양이었다.


카일이 피 묻은 손을 뻗어 석판 조각을 움켜쥐려는 순간.


콰아아아앙—!


제단 주변을 감싸고 있던 붉은색 레이저 방어 장벽이 작동하며, 초고전압의 에테르 스파크가 폭발했다. 카일의 손가락 끝이 순식간에 타들어 가며 검은 재로 변했고, 그는 강한 충격과 함께 뒤로 사정없이 튕겨 나가 벽면에 부딪혔다.


“크으으윽…… 살려줘…… 오진우 조수…… 제발 나를 구해줘……!”


카일은 타들어 가는 손을 움켜쥔 채, 진우를 향해 눈물을 흘리며 목숨을 구걸했다. 아카데미에서 진우를 평민이라 무시하며 사기꾼이라 모욕했던 오만함은 온데간데없었다. 오직 살고 싶다는 추악한 본능만이 남았을 뿐이었다.


진우는 카일의 구걸 역시 차갑게 외면했다. 그의 시선은 오직 제단 중앙에서 붉은 마나를 방출하고 있는 ‘태양의 석판 조각’에 고정되어 있었다.


‘남은 시간 10초.’


소리 상쇄 필드의 제한 시간이 임박해 오고 있었다. 진우는 왼쪽 눈의 앤티크 모노클을 미세하게 회전시키며 제단 주변의 에테르 흐름을 분석했다.


붉은색 레이저 장벽은 침입자의 물리적 접촉과 마력 반응에 즉각적으로 반응하여 관통 레이저를 발사하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카일처럼 무모하게 손을 대거나, 대장들의 오라로 장벽을 강제로 부수려 했다가는 유적 전체의 격멸 가디언들이 광폭화 상태로 깨어날 것이 분명했다.


유적의 절대 금기.


‘제단 앞에서는 절대로 무력을 행사하거나 탐욕을 품지 말 것.’


진우는 깊은 숨을 들이쉬었다. 귀와 눈가에서 흐르는 피가 차가운 바닥에 떨어졌지만, 그의 마음은 기묘할 정도로 정화되어 가고 있었다. 그는 머릿속에 각인된 고대 아키텍트 대사제단의 비전서를 떠올렸다.


탐욕이 없는 순수한 영혼의 공명.


진우는 오른손의 음차를 조용히 가방에 넣고, 빈 손끝을 허공에 세웠다. 그는 제단에 물리적으로 접촉하지 않았다. 대신, 손가락 끝에 아키텍트의 기도가 담긴 미세한 마나 파동을 실어 일정한 주파수로 내보내기 시작했다.


‘영적 비접촉 영입법(영적 비접촉 영입법).’


스으으으으—.


진우의 손끝에서 시작된 보이지 않는 미세한 마나 파동이, 제단을 감싸고 있던 붉은색 방어 레이저들과 공명하기 시작했다. 진우의 몸에 흐르는 초고대 아키텍트의 혈통이 유적의 시스템과 동조하는 순간이었다.


지켜보던 윤채원의 자색 눈동자가 경악으로 물들었다. 그녀의 마력 감지 능력이 제단 주변의 기적적인 변화를 감지한 것이다.


“마나의 주파수가…… 완벽하게 일치하고 있어요. 제단의 방어 시스템이 진우 씨의 마나를 침입자가 아닌, 정당한 관리자의 신호로 인식하고 있어요……!”


콰아아아아—.


붉은빛의 즉사 레이저 장벽들이 부드러운 푸른빛으로 치환되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리고 제단 위에 안치되어 있던 첫 번째 ‘태양의 석판 조각’이 공중에 둥실 떠오르더니, 인력에 이끌리듯 진우의 손바닥 위로 천천히 내려앉았다.


툭.


석판 조각이 진우의 손끝에 닿는 바로 그 순간.


지이이이이잉—!


유적 전체를 뒤흔드는 거대한 마나의 진동과 함께, 진우의 손등에 새겨져 있던 푸른빛의 ‘아키텍트의 표식’이 폭발적인 황금빛 광원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유적의 거대한 마나 맥로가 그를 정당한 후계자이자 지배자로 공인하는 고대의 문양이 그의 피부 깊숙이 선명하게 새겨져 가고 있었다.


“아으윽……!”


진우는 영혼이 통째로 뒤틀리는 듯한 극심한 과부하에 신음하며 무릎을 꿇었다. 그의 양 눈과 손등에서 뿜어져 나오는 신비로운 광채가 어두운 성소를 가득 채웠다.


그 황금빛 아우라 속에서, 진우의 품속에 있던 에테르 아침반이 격렬하게 회전하며 1층 미궁 깊은 곳의 또 다른 성소 방향을 가리키기 시작했다.

HẾT CHƯƠ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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