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스파인더의 눈이 뜨이다
쿠구구구구—!
광장 바닥을 가득 채운 붉은 지하수가 격렬하게 요동쳤다. 그것은 단순한 지진이 아니었다. 수천 년 동안 잠들어 있던 거대한 고대 기계 장치들이 서로의 이빨을 맞물리며 회전하는, 소름 끼치는 금속음이 사방에서 메아리쳤다.
진우의 손등에 새겨진 푸른빛의 ‘아키텍트의 표식’이 맥박치듯 뜨겁게 타올랐다. 그와 동시에 왼쪽 눈에 착용한 ‘앤티크 모노클’이 미친 듯이 회전하며 경고 수식을 공중에 투영하기 시작했다.
[위험: 고대 방어 시스템 ‘피의 침묵’ 가동 완료]
[경고: 침입자 격멸 시퀀스 가동. 구역 등급이 ‘경경 구역(Yellow Zone)’으로 전환됩니다.]
“이, 이게 무슨 소리지? 바닥이…… 바닥이 무너진다!”
철혈 용병단의 대장 강소희가 바르그 도끼를 바닥에 짚으며 붉은 눈동자를 굴렸다. 그녀의 강력한 적색 오라조차 유적 전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위압적인 마나 기류 앞에서는 촛불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엘리시아 폰 로엔그린 역시 성검 아우렐리아를 치켜든 채 신성 결계를 유지하려 애썼지만, 갑작스러운 중력의 변화에 판금 갑옷을 입은 몸이 무겁게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단순한 함정이 아니야. 유적 자체가 우리를 거부하고 있어!”
윤채원이 보랏빛 마법진을 더욱 넓게 전개하려 지팡이 ‘아스트라’를 허공에 휘둘렀다.
“차원 장벽(Dimension Barrier)—! 일단 이 구역의 공간을 일시 정지시켜서— 크윽?!”
그러나 캐스팅이 완성되기도 전에, 윤채원의 입에서 거친 신음이 터져 나왔다. 지팡이 끝에서 회전하던 보랏빛 마법 수식들이 유리창이 깨지듯 사방으로 산산조각 나며 흩어졌다. 유적 내부의 독특한 역마나 기류가 그녀의 마나 서클을 강제로 뒤틀어버린 것이었다. 마력 역류의 충격으로 윤채원의 하얀 이마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차원 수식이…… 작동하지 않아! 마나가 거꾸로 흐르고 있어요!”
서하린 역시 어둠 속에서 기척을 유지하지 못하고 모습을 드러냈다. 그림자 동화가 강제로 해제된 그녀의 안색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대륙 최강이라 오만하던 네 명의 마스터급 대장들이 단지 유적의 시스템이 깨어난 것만으로도 무력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광장의 사방 벽면이 거대한 서랍처럼 뒤로 밀려나며 열렸다.
스스스스스—!
벽면 뒤편에 숨겨져 있던 수천 개의 백은색 총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끝에는 정교하게 제련된 은빛 화살촉들이 푸른 에테르 에너지를 머금은 채 일제히 빛나고 있었다.
슈아아아아악—!
소리가 들린 것은 찰나였다. 사방에서 수천 발의 고대 화살들이 폭풍처럼 쏟아지기 시작했다. 화살에 실린 에테르 에너지는 공기를 찢는 날카로운 파열음을 내며 광장 중앙을 향해 빗발쳤다.
“내 뒤로 모여라!”
엘리시아가 소리치며 성검을 높이 들었다. 황금빛 성광 오라가 그녀의 백은색 방패와 맞물려 거대한 구형 방벽을 형성했다.
콰콰콰콰쾅—!
수백 발의 화살이 성광 방벽에 부딪히며 폭발적인 에너지를 뿜어냈다. 단순한 물리적 화살이 아니었다. 고대 에테르가 충전된 화살들은 폭발할 때마다 엘리시아의 성광 에너지를 강제로 갉아먹었다. 엘리시아의 정결한 미간이 고통으로 찌푸려졌다. 그녀의 무릎이 조금씩 바닥을 향해 꺾이기 시작했다.
“방벽이…… 관통당하려 하고 있어! 화살의 에테르 농도가 너무 높아!”
“비켜봐, 기사단년! 내가 다 부숴버릴 테니까!”
강소희가 앞으로 나서며 거대 도끼 바르그를 휘둘렀다. 적색 오라가 거대한 장막을 형성하며 날아오는 화살들을 쳐내려 했다. 하지만 화살의 수량은 끝이 없었다. 사방이 가로막힌 좁은 미궁 속에서, 무차별적으로 쏟아지는 화살 비를 무력만으로 버텨내는 것은 한계가 명확했다. 용병단원들과 수습 기사들이 비명을 지르며 하나둘씩 쓰러지기 시작했다.
‘이대로는 전멸이다.’
돌바닥에 쓰러져 있던 진우는 관자놀이를 움켜쥐었다. 비전투원인 자신은 오라의 파편 한 조각만 스쳐도 즉사할 터였다. 살아야 했다. 자신을 배신하고 유적의 미끼로 던진 하인리히 교수에게 복수하기 위해서라도, 그리고 이 유적 어딘가에 살아계실 아버지를 찾기 위해서라도 여기서 죽을 수는 없었다.
진우는 손끝에 남아있는 미세한 마나를 모아 눈 주위를 가볍게 지압했다.
‘아버님의 일지에 적혀 있던 아키텍트의 개안술…… 내 혈통의 피가 깨어났다면 작동해야 해!’
쿠구궁—!
그의 영혼 깊은 곳에서 뜨거운 에너지가 솟구쳤다. 손등의 푸른 문양이 빛을 발함과 동시에, 그의 왼쪽 눈을 덮고 있던 앤티크 모노클의 렌즈가 이중으로 겹치며 정교한 눈금선들을 그려내기 시작했다.
[고유 능력 ‘패스파인더의 눈 (Pathfinder's Sight)’ 활성화]
[2단계: 분석가 (Analyst) 경지 동조화 완료]
순간, 진우의 시야가 완전히 뒤바뀌었다.
사방의 어둠은 사라지고, 미궁의 모든 공간이 정교한 3D 기하학 도면처럼 반투명하게 투영되었다. 빗발치며 날아오는 수천 발의 화살 뒤로, 그것들이 날아오는 정확한 궤적과 도달 범위를 나타내는 붉은색 선들이 거미줄처럼 얽혀 나타났다. 벽면의 발사 장치 위에는 초 단위의 디지털 카운트다운 숫자들이 깜빡이고 있었다.
‘보인다……!’
진우는 전율했다. 단순한 시각적 정보가 아니었다. 유적이 함정을 작동시키는 물리적 규칙과 맹점이 그의 뇌 속으로 실시간 연산되어 들어왔다. 화살들이 쏟아지는 이 지옥 같은 광경 속에서도, 단 한 뺌의 붉은 선도 닿지 않는 완벽한 안전지대가 존재하고 있었다.
“모두 내 지시에 따라 움직여요! 살고 싶다면 제 말을 믿으란 말입니다!”
진우의 목소리가 광풍 속에서 울려 퍼졌다. 대장들은 당황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이 절체절명의 순간에 무력도 없는 약골 학도의 지시를 따라야 한단 말인가?
“엘리시아 씨! 방패의 각도를 수직이 아니라 위로 15도 기울여요! 화살을 정면으로 막지 말고 흘려보내란 말입니다! 방벽의 마력 소모를 절반으로 줄일 수 있어요!”
엘리시아는 진우의 단호한 눈빛과 마주했다. 그의 왼쪽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신비로운 푸른 안광은 거부할 수 없는 지배력을 담고 있었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성검을 쥔 손목을 비틀어 방패의 각도를 15도 위로 비꼈다.
스스스승—!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폭발하며 방벽을 갉아먹던 화살들이 비스듬히 경사진 결계를 타고 천장으로 미끄러지듯 튕겨 나갔다. 성광의 소모가 급격히 줄어들며 엘리시아의 호흡이 안정되었다.
“정말…… 마력 소모가 줄었어? 어떻게 이런 일을…….”
“감탄할 시간 없어요! 소희 씨! 3시 방향으로 도약해요! 거기 거대한 돌기둥 보이죠? 그 기둥의 하단부 배선이 이미 끊어져 있어요! 바르그로 기둥의 밑동을 쳐서 무너뜨려요!”
강소희는 군말 없이 신형을 날렸다. 그녀는 야성적인 감각으로 진우가 지목한 3시 방향의 석주로 뛰어올라 거대 도끼를 내리쳤다.
콰아아앙—!
이미 기하학적으로 하중이 쏠려 있던 석주는 단 일격에 균열을 일으키며 앞으로 무너져 내렸다. 거대한 돌기둥이 대각선으로 쓰러지며, 벽면의 화살 발사구 절반 이상을 완벽하게 가로막는 임시 방어벽이 구축되었다. 화살의 비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하린 씨! 지금입니다! 그림자 속에 숨어 있는 린과 기사단의 부상자들을 무너진 석주 뒤편의 3시 방향 사각지대로 대피시켜요! 거기는 벽면 발사 장치의 각도가 닿지 않는 유일한 사각지대입니다!”
서하린의 신형이 바람처럼 흩어졌다. 그녀는 진우가 짚어준 좌표를 따라 어둠 속에서 부상자들을 낚아채 무너진 석주 뒤편의 안전 영역으로 신속하게 이동시켰다. 단 한 발의 화살도 그 구역을 침범하지 못했다.
“윤채원 씨! 아직 마력 역류의 여파가 남아있죠? 무리하게 차원 마법을 쓰지 말고, 내가 앤티크 모노클로 전송하는 주파수에 맞춰 마나 감지기의 공명을 유지해요! 벽면의 제어 룬을 찾아야 합니다!”
윤채원은 자존심이 상하는 것도 잊은 채 진우의 지시에 집중했다. 진우의 눈을 통해 전달되는 기하학적 수식들이 그녀의 머릿속에 투영되자, 그녀는 지적 경외감에 휩싸였다. 지상의 어떤 고등 마법 학자도 이토록 완벽하게 유적의 마나 맥로를 분석해 내지는 못했다.
“수식이…… 맞아떨어지고 있어. 당신, 대체 정체가 뭐야?”
“닥치고 집중해요! 마지막 화살 비가 시작됩니다!”
벽면의 카운트다운이 [00:03]을 가리키고 있었다. 마지막 발사는 1층 미궁 전체의 에테르 동력을 과부하시켜 광장 전체를 날려버릴 무차별적인 살상 폭풍이 될 터였다.
진우는 관자놀이가 찢어질 듯한 극심한 두통을 느꼈다. 패스파인더의 눈을 가동하는 대가는 비전투원인 그의 육체에 너무나 가혹했다. 왼쪽 눈가에서 뜨거운 핏줄기가 흘러내려 뺨을 적셨다. 시야가 붉게 물들었지만, 그는 앤티크 모노클의 포커스를 벽면 중앙의 푸른색 문양에 고정했다.
[고대 방어 시스템 메인 제어 룬 ‘안티-에테르(Anti-Ether)’ 식별 완료]
‘저 문양의 중심점에 흐르는 미세 마나 선을 차단하면 이 시스템 전체를 일시 정지시킬 수 있어.’
진우는 이빨을 악물고 앞으로 달렸다. 화살의 궤적들이 그의 몸 주변을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갔다. 엘리시아와 강소희가 경악 어린 비명을 질렀다.
“진우 씨! 위험해요! 돌아와요!”
그러나 진우는 멈추지 않았다. 그는 붉은색 점선들이 가리키는 사각지대만을 정확히 밟으며 벽면에 도달했다. 그의 손에는 가방 속에서 꺼내 든 고대 해체용 펜치가 쥐여 있었다.
앤티크 모노클의 렌즈가 마지막으로 회전하며, 제어 룬 내부의 가장 약한 에테르 와이어를 붉은색 선으로 가리켰다.
딸깍—!
진우가 펜치 끝에 미세한 아키텍트 마나를 실어 와이어를 잘라내는 순간, 요동치던 미궁 전체의 진동이 거짓말처럼 뚝 끊겼다.
벽면의 발사 장치들이 푸른 에테르 불꽃을 뿜어내며 서서히 기계 안쪽으로 수축해 들어갔다. 광장을 가득 채웠던 수천 발의 화살 비가 멈추고, 고요한 정적이 미궁 속에 내려앉았다.
단 한 명의 부상자도, 단 한 명의 낙오자도 없이 완벽하게 함정을 통과한 기적 같은 순간이었다.
“하아…… 하아…….”
진우는 벽면에 기댄 채 바닥으로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관자놀이를 찌르는 극심한 두통과 함께 왼쪽 눈에서 흘러내린 피가 바닥의 붉은 물속으로 번져 나갔다. 그의 수수한 학자 복장은 땀과 피로 얼룩져 있었다.
네 명의 대장들은 무기를 쥔 채 얼어붙은 듯 진우를 바라보았다.
강소희의 도끼끝이 미세하게 떨렸고, 엘리시아는 성검을 쥔 채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었다. 오만하던 대마법사 윤채원의 눈동자에는 지적 굴복감과 경외감이 가득 차 있었으며, 서하린은 어둠 속에서 진우의 피 흘리는 모습을 주시하며 심장의 기묘한 고동을 느끼고 있었다.
그녀들의 무력으로는 결코 해결할 수 없던 죽음의 함정을, 단지 고고학적 지식과 지혜만으로 완벽하게 해체해 낸 나약한 청년.
그녀들의 시선 끝에 머무는 진우의 존재감은, 이제 그 어떤 마스터급 강자보다도 거대하고 압도적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러나 평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쿠구구구구—!
광장 입구 쪽에서 거대한 낙석들이 쏟아져 내리는 소리가 미궁을 흔들었다. 유적의 붕괴 여파로 인해 지상으로 통하는 유일한 회귀 통로가 거대한 암석들로 완전히 차단되는 파열음이었다.
사방은 완벽한 어둠 속에 갇혔고, 그 어둠 깊은 곳으로부터 굶주린 고대 마물들의 기이하고 소름 끼치는 울음소리가 메아리쳐 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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