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의 요정과 아키텍트의 피
지하 2층 ‘침몰한 정원’의 초입은 기괴한 생명력으로 꿈틀거리고 있었다.
사방의 바닥이 거대하게 뒤틀리며 솟구쳐 오른 가시 넝쿨들은 아가리를 벌린 괴수처럼 오진우와 네 대장들의 전후좌우를 완벽하게 포위했다. 푸른 안개 사이로 요동치는 가시 넝쿨들의 표면에는 피처럼 붉은 가시들이 촘촘하게 돋아나 있었다.
스스스스슥—!
가시나무들이 공기를 찢는 불길한 소리를 내며 일제히 일행을 향해 쏘아져 들어왔다.
“사령관님, 제 뒤로!”
성광 기사단의 엘리시아가 백은색 방패를 전방으로 내밀며 황금빛 성광 결계를 전개했다. 콰콰콰쾅! 날카로운 가시들이 결계에 부딪히며 불꽃을 튀겼다. 결계가 충격을 흡수할 때마다 엘리시아의 정결한 이마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동시에, 대장들의 손가락에 끼워진 ‘서약의 반지’가 검붉은 빛으로 거세게 맥동하기 시작했다. 진우의 심장 맥로에 가해지는 타는 듯한 통증이 반지를 통해 그녀들에게 고스란히 전송된 탓이었다.
“으윽……!”
엘리시아가 신음하며 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사령관의 고통을 영혼으로 나누어 받으면서, 그녀의 눈동자에는 진우를 지키지 못했다는 자책감과 맹목적인 기사적 충성심이 광기 어린 불꽃으로 타올랐다.
“비켜봐, 기사단장! 이딴 잡초 덩어리들은 내가 다 으깨버릴 테니까!”
강소희가 거대 도끼 바르그를 휘두르며 적색 오라를 폭발시켰다. 붉은 참격이 전방의 가시 넝쿨들을 무자비하게 잘라냈다. 그러나 잘려 나간 단면에서 푸른 수액이 뿜어지더니, 넝쿨들은 2배의 속도로 증식하며 소희의 가죽 보호구를 긁고 지나갔다.
‘안 돼. 물리적인 타격은 저들을 더 광폭하게 만들 뿐이다.’
진우는 성대 파열로 인해 목소리를 낼 수 없었기에, 소희의 옷자락을 세차게 잡아당기며 고개를 저었다. 그의 왼쪽 눈에 장착된 ‘앤티크 모노클’이 빠르게 회전하며 넝쿨들의 마나 흐름을 투영했다.
공기 중에는 이미 기분 나쁠 정도로 달콤한 ‘환각 포자’의 향기가 안개와 뒤섞여 떠돌고 있었다. 조금만 더 지체했다간 포자의 독성에 노출되어 대장들의 이성이 마비될 판이었다.
진우는 단호한 손짓으로 대장들에게 후퇴를 지시했다. 그는 아침반이 가리키는 가시나무 둥지의 가장 깊은 공동, 넝쿨들의 공격성이 미치지 않는 사각지대로 일행을 빠르게 인도했다.
좁은 바위 틈새를 지나 공동 깊숙한 곳으로 들어서자, 사방이 거대한 가시나무 뿌리로 뒤덮인 몽환적인 동굴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 동굴의 중심, 오염된 에테르 맥로가 흐르는 웅덩이 위에 한 존재가 쇠사슬처럼 얽힌 넝쿨에 갇힌 채 발버둥 치고 있었다.
분홍빛 꽃잎 머리칼을 흐트러뜨리며 초록색 나뭇잎 옷을 입은 손바닥만 한 요정.
유적 1층의 습한 구역에서 타락한 마기에 오염되어 자멸해가던 고대 식물 정령, ‘아라우네’였다.
“……마수인가요? 아니, 정령의 형태를 하고 있군요.”
적색 마탑의 윤채원이 자색 안경을 치켜쓰며 지팡이 아스트라를 겨누었다. 아라우네는 침입자들을 발견하자마자 황금빛 안광을 붉게 물들이며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다.
키이이이이익—!
정령의 비명과 함께 그녀의 분홍빛 꽃잎 머리칼이 휘날렸고, 사방의 벽면에서 붉은색 마기가 서린 치명적인 가시들이 폭풍처럼 쏟아지기 시작했다.
“잠들어라, 어리석은 영혼이여.”
윤채원이 고속으로 마법 수식을 전개하며 7서클급 수면 마법을 시전했다. 보랏빛 마력 장막이 아라우네를 감쌌다. 그러나 정령은 신전의 오염된 마기를 과도하게 흡수한 상태였다. 윤채원의 마법은 정령의 체내에서 요동치는 역마나에 가로막혀 허망하게 흩어졌다.
“마법이 저항당했어요……! 유적의 오염도가 제 연산 범위를 넘어서고 있어요!”
윤채원의 눈동자가 지적 자존심의 상처와 당황으로 흔들렸다.
그 사이, 아라우네가 내뿜는 가시 폭풍이 진우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비전투원인 진우의 약한 몸으로는 단 한 발의 가시만 스쳐도 즉사할 수 있는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쉬이익—!
그 순간, 은빛 단발머리를 휘날리며 서하린이 그림자 속에서 소리 없이 솟구쳐 올랐다. 그녀의 검은 단검 ‘그림자 송곳니’가 허공에 정교한 은빛 궤적을 그리며 날아오는 가시들을 전부 쳐내고 진우의 앞을 철통같이 가로막았다.
챙! 챙! 채쟁!
“사령관님, 제 그림자 뒤에 숨으십시오. 한 발짝도 움직이게 두지 않겠습니다.”
서하린의 차가운 목소리에는 살벌한 투기가 서려 있었다. 그녀의 붉은 눈동자는 정령을 당장이라도 갈가리 찢어발길 듯이 빛나고 있었다.
“비켜, 하린! 내가 저 고철 같은 잡초년의 머리를 부셔놓겠어!”
강소희가 거대 도끼를 치켜들며 대지 분쇄격의 오라를 모았다. 폭력적인 적색 기류가 공동을 흔들었다.
‘멈춰!’
진우는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며 강소희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의 단호한 눈빛이 소희의 붉은 눈동자와 정면으로 마주쳤다. 소희는 진우의 무모한 행동에 경악하며 도끼를 멈추었다.
“사령관! 미쳤어? 저년은 지금 제정신이 아니라고!”
진우는 대답 대신 왼쪽 눈의 ‘앤티크 모노클’의 이중 테두리를 미세하게 회전시켰. 렌즈가 맞물려 돌아가며 아라우네의 가슴속 깊은 곳에 자리 잡은 에테르 코어의 구조가 3D 설계도처럼 선명하게 투영되었다.
모노클 너머로 비친 정령의 코어는 잘게 균열이 가 있었고, 그 틈새로 제국 대공 프레데릭이 유출시킨 오염된 마기가 침투해 그녀를 폭주시키고 있었다. 진우는 바락의 자폭 열쇠에서 읽어냈던 제국 대공가의 음모 물증을 떠올렸다. 제국의 탐욕스러운 마나 약탈이 이 순수한 정령을 괴물로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정령이 원하는 것은 파괴가 아니었다. 썩어가는 마기를 정화해 줄 아키텍트의 순수한 에너지였다.
진우는 자신의 손등에 새겨진 ‘아키텍트의 표식’을 내려다보았다. 푸른빛의 기하학 문양이 그의 의지에 반응하듯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아라우네를 향해 걸어갔.
“사령관님! 위험합니다!”
엘리시아가 비명을 지르며 그의 옷자락을 잡으려 했으나, 진우는 단호한 손짓으로 그녀들을 제지했다. 그의 얼굴에는 흔들림 없는 차가운 이성과 확신이 서려 있었다.
아라우네는 다가오는 진우를 향해 붉은 가시를 치켜세우며 경계했다.
진우는 조용히 자신의 오른손 검지 손가락 끝을 물어뜯었다. 툭, 하고 붉은 선혈 한 방울이 배어 나왔다. 그것은 평범한 인간의 피가 아니었다. 수천 년 전 유적을 설계하고 지배했던 초고대 문명의 황실 직계 후예—아키텍트의 피였다.
진우는 손가락 끝을 가볍게 튕겨, 자신의 피 한 방울을 허공으로 튕겼다.
스으으으으…….
붉은 피가 허공에 포사되는 순간, 공동 내부에 감돌던 오염된 마기와 달콤한 환각 포자의 향기가 일시에 얼어붙었다. 진우의 피에서 뿜어져 나오는 극도로 순수하고 맑은 에테르 마나의 향기가 정원 전체의 맥박을 공명시켰다.
피의 마나 향기를 맡은 아라우네의 붉은 안광이 일시에 정지했다. 정령은 폭주를 멈추고, 멍하니 진우의 손끝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본능이, 수천 년 동안 갈망해 왔던 진짜 주인의 향기를 알아챈 것이었다.
정령은 흐느끼는 듯한 작은 소리를 내며, 조심스럽게 날개를 펄럭여 진우의 손끝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그의 상처 입은 손가락 끝에 입술을 대고, 흘러내리는 아키텍트의 피를 아주 소중하게 받아 마셨다.
지이이이이잉—!
정령이 피를 마시는 순간, 그녀의 몸을 감싸고 있던 검붉은 마기와 오염된 수액들이 은빛 장막에 씻겨 내려가듯 정화되기 시작했다. 칙칙하던 분홍빛 꽃잎 머리칼은 눈부신 백은색으로 탈바꿈했고, 그녀의 전신에서 맑고 청량한 초록색 바람이 뿜어져 나왔다.
[고대 식물 정령 ‘아라우네’ 정화 완료]
[영혼 계약 성립: 사역마 귀속 완료]
정화된 아라우네는 기쁜 듯이 진우의 손가락 주변을 빙글빙글 맴돌더니, 이내 그의 뺨에 얼굴을 비비며 애교를 부렸다. 그리고 아주 자연스럽게 진우의 헝클어진 흑발 사이로 파고들어 아늑하게 둥지를 틀었다.
진우는 피로감과 빈혈로 인해 몸을 비틀거렸다. 아키텍트의 피를 소모한 대가로 가벼운 오한이 그의 나약한 신체를 덮쳤다.
“사령관님……!”
엘리시아가 다급하게 달려와 쓰러지려는 진우의 허리를 단단히 안아 지탱했다. 그녀의 벽안에는 진우의 신비로운 혈통적 권능에 대한 경탄이 서려 있었지만, 동시에 진우의 머리카락 속에 자리 잡은 아라우네를 바라보는 눈빛에는 묘한 차가움이 깃들었다.
“정령이…… 사령관님의 머리맡을 독점하고 있군요.”
“야, 저 쪼그만 풀떼기 년이 감히 사령관님 머리칼을 침대로 쓰고 있잖아!”
강소희가 도끼를 바닥에 거칠게 내려놓으며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그녀의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가 질투심에 반응해 붉은색 마나 스파크를 미세하게 튕겨냈다.
윤채원 역시 지팡이를 쥔 손에 힘을 주며, 안경 너머로 아라우네를 뚫어지게 노려보았다.
“사령관님의 피를 마시고 영혼을 결속하다니…… 마탑의 수석 학자조차 허락받지 못한 영역을 저런 하급 정령이 가로채다니 불공평해요.”
서하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녀의 단검 끝이 아라우네의 날개를 향해 미세하게 겨누어지며 살벌한 그림자 기류를 뿜어내고 있었다.
대장들의 폭발적인 질투 어린 시선이 진우의 머리칼 속 아라우네에게 집중되는 순간, 아라우네는 진우의 귀밑머리를 다급하게 잡아당기며 그의 귓가에 몸을 밀착했다.
정령의 작은 몸을 통해, 지하 2층 정원 전역에 치명적인 ‘망각의 늪’ 포자가 대규모로 폭발하기 시작했다는 불길한 진동이 진우의 뇌리로 직접 전해져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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