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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축한 정원의 첫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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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축한 바람이 뺨을 스쳤다. 1층의 메마르고 먼지 쌓인 고딕풍 미궁과는 완전히 다른, 물기를 가득 머금은 이질적인 공기였다.


사방을 가득 채운 것은 몽환적인 푸른빛을 발하는 발광 이끼와, 천장에서 끊임없이 뚝뚝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뿐이었다. 무너져 내린 은빛 대리석 계단의 잔해들이 발밑에 어지럽게 널려 있었고, 그 너머로는 기괴할 정도로 거대하게 자라난 고대 식물들의 거친 숨결이 안개 속에서 일렁이고 있었다.


이곳이 바로 신의 심연 지하 2층, ‘침몰한 정원’의 초입이었다.


“사령관님…… 괜찮으십니까? 제발 몸을 일으키지 마십시오.”


엘리시아의 떨리는 목소리가 정적을 깨뜨렸다. 그녀는 자신의 단단한 백은색 갑옷 가슴 장갑을 해체한 채, 맨몸의 부드러운 품으로 진우의 머리를 꼭 안고 있었다. 그녀의 눈가에는 아직 채 마르지 않은 눈물 자국이 선명했다.


진우는 상체를 일으키려 했으나, 가슴을 찌르는 듯한 극심한 심장 맥로의 통증에 미간을 찌푸렸다. 목구멍 안쪽에서 비린 혈향이 울컥 치밀어 올랐다. 말을 하려고 입술을 뗐지만, 입 안 가득 고인 핏방울만이 흘러내릴 뿐 기괴한 바람 빠지는 소리 외에는 아무런 목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성대 파열로 인한 완벽한 함구증.


1층 최심부에서 유적의 자폭 시퀀스를 강제로 오버라이드하기 위해 아키텍트의 음성 명령을 쥐어짜낸 대가였다. 목소리는 완전히 잠겼고, 비전투원인 그의 몸은 한계에 달해 있었다.


“야, 위선자 기사단장. 사령관님 숨 막히시잖아. 당장 그 꼴사나운 가슴팍에서 떼어놓지 못해?”


강소희가 거대 도끼 바르그를 바닥에 쿵 내려놓으며 날카롭게 으르렁거렸다. 그녀의 포니테일 붉은 머리칼이 거친 오라의 기류에 흔들렸다. 소희는 진우의 오른손을 조심스럽게 움켜쥐었다. 그녀의 손가락에 끼워진 ‘서약의 반지’가 진우의 심장 통증을 실시간으로 나누어 받으며 핏빛으로 붉게 공명하고 있었다.


소희의 야성적인 눈매가 미세하게 떨렸다.


“사령관…… 아프면 아프다고 손이라도 꽉 쥐어. 왜 혼자서 다 짊어지려는 건데? 멍청하게 진짜…….”


그녀의 츤데레적인 말투 뒤에는 진우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극심한 죄책감과 상실 공포가 짙게 깔려 있었다.


진우는 소희의 손을 살짝 맞잡아 쥐며 걱정하지 말라는 듯 눈짓을 보냈다. 그리고 왼쪽 눈에 착용하고 있는 ‘앤티크 모노클’의 금속 테두리를 미세하게 돌렸다. 렌즈 주변에 흐릿한 마나 스파크가 튀었지만, 이내 정원의 에테르 흐름이 시각화되어 투영되기 시작했다.


[주인공 탐사 등급: 2단계 분석가 (Analyst) 활성화]

[고유 능력: 패스파인더의 눈 (Pathfinder's Sight) 가동]


진우의 시야가 푸른빛과 붉은빛의 기하학적 도면으로 뒤덮였다. 정원 초입의 몽환적인 안개 속, 겉보기에는 고요해 보이는 수풀 곳곳에 숨겨진 즉사급 가시 함정의 발판들이 붉은색 영역으로 선명하게 떠올랐다.


특히 그들의 바로 전방, 안개 속에 똬리를 틀고 있는 기괴한 가시나무 넝쿨들이 예민하게 요동치는 맥박이 모노클 렌즈에 고스란히 잡혔.


‘이 앞은 가시나무 둥지다. 1층의 대붕괴 여파로 정원의 생태계 전체가 극도로 예민해져 있어.’


진우는 말을 할 수 없었기에, 소희의 옷자락을 꾹 잡아당겼다. 소희가 움찔하며 진우를 내려다보자, 진우는 검지를 입술에 가져다 대며 조용히 하라는 손짓을 보냈다. 그리고 전방의 안개 속, 붉은색 선이 가리키는 특정 기류의 좌표를 손가락으로 가리켰.


“사령관님이 조용히 하라고 하잖아, 무식한 용병단장.”


윤채원이 자색 안경을 치켜쓰며 지팡이 아스트라를 움켜쥐었다. 그녀의 자색 눈동자는 진우의 손끝 하나, 미세한 눈짓 하나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광기 어린 집착으로 빛나고 있었다.


“이 아래 흐르는 마나의 농도가 비정상적이에요. 사령관님의 목소리를 앗아간 저 빌어먹을 유적의 기믹들을 전부 제 마법으로 해체해 버리고 싶지만…… 지금은 사령관님의 지시가 절대적이니까요.”


서하린 역시 무음으로 진우의 그림자 속에서 솟구쳐 올라 검은 비수 그림자 송곳니를 고쳐 쥐었다. 하린은 진우의 발치에 조용히 엎드려, 사방의 어둠을 날카로운 붉은 눈동자로 경계했다.


진우는 대장들에게 일렬로 보행하라는 수신호를 보냈다. 하중 분산 보행법을 지키며 그의 발자국만을 따라오라는 의미였다.


서하린이 가장 먼저 소리 없이 진우의 뒤를 따랐고, 강소희와 엘리시아가 그를 양옆에서 철통같이 호위했다.


사박, 사박.


물기를 머금은 정원의 흙을 밟는 소리가 정막한 공동을 울렸다. 진우가 이끄는 안전 경로를 따라 조심스럽게 전진하던 그때였다.


바스락—!


강소희가 무의식적으로 길가에 뻗어 나온 거대 잎사귀를 밀쳐내려 도끼날을 들이댔다. 그 순간, 진우의 모노클 속 붉은 경고선들이 기하학적으로 팽창했다.


‘안 돼!’


진우가 소희의 팔을 다급하게 낚아챘지만, 한발 늦었다. 도끼날의 오라가 미세하게 가시나무를 자극하자, 정막하던 안개 속에서 수백 개의 거대한 넝쿨 가시들이 땅속에서 솟구쳐 올랐다.


스스스스스—!


“치잇! 이딴 잡초 덩어리들이 감히!”


강소희가 기합을 지르며 정면의 가시 벽을 향해 거대 도끼 바르그를 크게 휘둘렀다. 적색 오라가 폭풍처럼 회전하며 전방의 넝쿨들을 단숨에 베어냈다.


그러나 베어낸 단면에서 푸른 수분이 뿜어져 나오더니, 잘려 나간 자리에 가시나무가 2배로 급속 증식하며 소희의 팔을 날카롭게 긁고 지나갔다. 붉은 피가 그녀의 구릿빛 피부 위로 흘러내렸다.


“아윽! 베어낼수록 더 자라나잖아!”


소희가 당황해 한 걸음 물러섰다.


진우는 답답함에 가슴을 쳤다. 목소리가 나왔다면 당장 정지 명령을 내렸을 터였다. 목 안쪽에서 피가 울컥 치밀어 올라 그는 격렬하게 기침을 토해냈다. 붉은 선혈이 은빛 대리석 바닥을 적셨다.


“사령관님! 제발 무리하지 마십시오!”


엘리시아가 비명을 지르며 진우의 앞을 막아섰다. 그녀의 백은색 방패 위로 황금빛 성광의 결계가 전개되며, 사방에서 날아오는 날카로운 가시 폭풍을 온몸으로 튕겨냈다.


콰콰콰콰쾅—!


결계가 갉아먹힐 때마다 엘리시아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진우는 피가 묻은 입술을 닦아내며 정신을 집중했다. 앤티크 모노클의 이중 렌즈가 빠르게 회전하며 가시나무 넝쿨의 핵심 마나 맥로를 추적했다.


‘수분의 흐름이다. 저 식물들은 마나가 주입된 정수의 수압으로 움직이고 있어.’


진우는 소희의 옷자락을 강하게 잡아당겼다. 소희가 고개를 돌리자, 진우는 그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손가락으로 가시나무 넝쿨의 가장 아래쪽, 붉은 선들이 둥글게 뭉쳐 있는 옹이 마디를 단호하게 가리켰.


말은 전해지지 않았지만, 소희는 진우의 눈빛에 서린 절대적인 확신을 읽었다.


“……저기구나! 사령관, 나만 믿어!”


강소희가 대지 분쇄격의 오라를 도끼 끝에 모았다. 그녀는 진우가 가리킨 정확한 좌표를 향해 도끼를 내리찍었다.


콰아아앙—!


가장 거대한 넝쿨의 옹이 마디가 산산조각 나며 푸른 수분이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그러자 사방을 압박하던 가시나무들이 일시에 힘을 잃고 흐느적거리며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방벽을 유지하던 엘리시아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결계를 거두었다.


하지만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잘려 나간 마디 너머로 정원의 메인 에테르 배수관이 노출되어 있었고, 그곳에서 역류한 수압이 다시 한번 가시나무들을 자극하려 하고 있었다.


진우는 주저하지 않고 가죽 코트 주머니에서 은빛으로 빛나는 ‘에테르 렌치’를 꺼내 들었다. 그는 비전투원의 약한 완력으로 벽면에 녹슬어 있는 고대 배수 밸브를 향해 몸을 던졌다.


무거운 판금 갑옷 때문에 지반 흔들림을 자극할 수 있는 엘리시아를 대신해, 진우는 자신의 온몸의 체중을 실어 밸브를 반시계 방향으로 강제로 돌렸다.


끼이이이익— 쾅!


밸브가 맞물려 잠기자, 가시나무들로 흘러들어 가던 정수의 흐름이 완전히 차단되며 사방의 넝쿨들이 완벽하게 침묵했다.


“하아…… 하아…….”


진우는 렌치를 쥔 채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성대를 무리하게 쓰려 했던 반동과 급격한 체력 소모로 인해 온몸이 사시나무 떨리듯 떨렸다.


“사령관님!”


대장들이 일제히 달려와 그를 부축했다. 엘리시아는 진우의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정성스럽게 닦아냈고, 소희는 미안함에 어쩔 줄 몰라 하며 그의 가죽 코트를 털어냈다. 윤채원은 진우의 손끝에 맺힌 미세한 상처를 보며 심장이 찢어지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들의 깊어진 죄책감과 맹목적인 애정이 좁은 공동의 공기를 뜨겁게 달구고 있었다.


진우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아침반을 들어 올렸다. 초입의 위기는 넘겼고, 일시적인 안전 구역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바로 그 순간.


고요해진 정원의 어둠 깊은 곳으로부터, 기분 나쁠 정도로 달콤하고 이국적인 향기가 스멀스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스으으으으…….


공기 중에 푸른빛의 환각 포자들이 눈송이처럼 어지럽게 휘날리기 시작했고, 대장들의 정결한 눈동자가 미세하게 흐려지며 흔들렸다.


동시에, 그들이 서 있는 사방의 흙바닥이 거대하게 뒤틀리더니, 수천 개의 거대한 넝쿨 가시들이 아가리를 벌린 괴수처럼 일행의 전후좌우를 완벽하게 포위하며 솟구쳐 올랐다.

HẾT CHƯƠ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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