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락의 신전과 죽음의 군대
석실 바닥에서 검붉은 마기 줄기가 폭사하듯 뿜어져 나왔다. 대지를 뒤흔드는 둔중한 진동과 함께, 지하 2층 ‘침몰한 정원’의 공기가 급격히 일렁였다.
“사령관님!”
구출된 마법 조수 린이 비명을 지르며 진우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진우는 성대 파열로 인해 목소리를 낼 수 없었기에, 대답 대신 그녀의 어깨를 지그시 누르며 안심시켰다. 그의 왼쪽 눈에 걸쳐진 앤티크 모노클의 이중 렌즈가 보랏빛 오염 마기의 기류를 감지하며 찌릿하게 떨려왔다.
[위험: 유적 자폭 시퀀스 활성화율 12%]
[경고: 공기 중 마기 농도 급증. 장기 노출 시 마나 맥로 오염 위험]
진우는 왼손으로 에테르 아침반을 고쳐 쥐었다. 아침반에서 뿜어져 나온 푸른색 3D 홀로그램 지도가 허공에 명멸하며, 오염 가스가 뿜어져 나오는 환기구들을 붉은색 영역으로 표시했다. 동시에, 가스의 발원지 너머로 도망친 제국 스파이 에밀리의 흐릿한 마력 궤적이 실선으로 투영되었다.
진우는 엘리시아를 바라보며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바닥의 흙 위에 손가락으로 거칠게 글씨를 써 내려갔.
[에밀리를 쫓는다. 가스의 발원지로 향하면 자폭 장치의 제어 콘솔이 있을 것이다. 이곳에 머물면 가스에 질식하거나 낙석에 깔려 죽는다.]
“사령관의 뜻이 그렇다면 따르겠네.”
엘리시아 폰 로엔그린은 부서진 갑옷 사이로 성검 아우렐리아를 굳건히 쥐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황금빛 오라가 다소 약해져 있었지만, 진우를 향한 눈빛만큼은 신앙보다 더 깊은 헌신으로 빛나고 있었다.
“쳇, 목소리도 안 나오는 약골 주제에 지시 하나는 확실하네. 야, 용병 놈들! 사령관님을 엄호해라! 털끝 하나라도 다치면 내 손에 죽을 줄 알아!”
강소희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부하들을 통제했다. 그녀 역시 진우가 무력 없이 자신들의 목숨을 구한 모습을 목격한 후, 툴툴거리면서도 진우의 신변 안전을 최우선으로 삼고 있었다.
윤채원은 지팡이 아스트라를 품에 안은 채 진우의 오른편에 바짝 밀착했다. 그녀의 자색 눈동자에는 진우를 향한 지적 숭배와 함께, 그를 자신만의 학술적 동반자로 독점하고 싶어 하는 광기 어린 집착이 스멀스멀 피어오르고 있었다.
“오진우 씨, 에밀리의 궤적이 가리키는 방향의 마나 농도가 비정상적이에요. 이 앞은…… 단순한 미궁이 아니에요.”
서하린은 소리 없이 진우의 그림자 속으로 녹아들었다. 구출된 성기사 부관 레온과 베테랑 용병 박도진 역시 진우의 뒤편을 든든하게 호위했다.
일행은 아침반이 제시하는 안전 경로를 따라 어두운 정원의 협로를 빠르게 돌파했다. 축축한 넝쿨과 무너진 석조물들이 발목을 잡았지만, 진우의 정교한 손짓 지휘 아래 단 한 명의 낙오자도 없이 전진할 수 있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에밀리의 마력 궤적이 멈춘 곳에 도달한 순간, 일행은 거대한 지하 공동 한가운데 우뚝 솟은 웅장하고도 기괴한 석조 신전을 마주했다.
신전의 입구에는 핏빛처럼 붉은 고대 문양들이 기분 나쁘게 깜빡이고 있었다. 사방에서 음산한 바람이 불어오며 시체 썩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
[구역 진입: 타락의 신전]
[위험도: 즉사 구역 (Red Zone)]
[경고: 신전 내부의 타락한 결계가 외부 마나를 강제로 억제합니다. 오라 및 마법 효율 50% 저하]
“으윽……!”
신전의 경계를 넘어서는 순간, 강소희가 신음하며 무릎을 굽혔다. 그녀의 전신을 감싸던 적색 오라가 촛불처럼 위태롭게 흔들렸다. 엘리시아의 황금빛 성광 방벽 역시 절반 크기로 줄어들며 핏빛 마기에 갉아먹히기 시작했다.
“마나가…… 억제당하고 있어요. 서클의 연산 속도가 평소의 절반도 나오지 않아요!”
윤채원이 미간을 찌푸리며 지팡이를 강하게 쥐었다. 마스터급 강자들조차 이 정도인데, 일반 용병들과 기사들은 가슴을 쥐어짜며 바닥에 엎드려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진우 역시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답답함을 느꼈다. 하지만 그의 목에 걸린 성광의 펜던트가 은은한 온기를 방출하며 그의 정신 장벽을 간신히 지탱해 주었다. 진우는 모노클을 회전시키며 신전 중앙 제단을 주시했다.
그곳에는 기괴한 해골 지팡이를 든 사내가 서 있었다. 시체 썩는 냄새가 나는 검은 로브를 걸치고, 얼굴 반쪽이 독과 암흑 마기에 문드러진 늙은 흑마법사. 제국 대공 프레데릭이 고용한 악명 높은 네크로맨서, ‘어둠의 흑마법사 벨리알’이었다.
“흐흐흐…… 쥐새끼들이 기어코 사지까지 기어들어 왔구나.”
벨리알이 기괴한 실소를 터뜨리며 해골 지팡이를 바닥에 강하게 내리쳤다.
쿠구구구구—!
신전 바닥의 무수한 석관들이 일제히 열리며, 보랏빛 마기에 오염된 수백 마리의 시체 병사들이 붉은 눈을 뜨며 기어 나왔다. 죽음의 군대가 순식간에 진우 일행의 사방을 겹겹이 포위했다.
“제국 대공의 자금력은 참으로 위대하지. 이 타락의 신전이야말로 너희들의 완벽한 무덤이 될 것이다!”
벨리알의 외침과 함께 언데드 군단이 일제히 무기를 치켜들고 돌격해 왔다.
“비켜! 이깟 뼈다귀들 정도는……!”
강소희가 자존심을 세우며 전면 돌격을 시도했다. 그녀는 도끼 바르그를 휘둘러 전방의 시체 병사 세 마리를 단숨에 베어 넘겼다. 하지만 그것은 벨리알이 파놓은 함정이었다.
펑—! 펑—!
베어 나간 시체들의 몸속에서 검붉은 마기 오염 물질이 폭발했다. 시체 폭파의 여파가 강소희의 무방비한 전면을 강타했다. 마나 억제 결계 때문에 오라 방어막을 제대로 펼치지 못한 강소희는 둔중한 파열음과 함께 뒤로 크게 밀려났다.
“소희!”
엘리시아가 급히 앞으로 나서며 성광 방벽을 펼쳤다. 하지만 신전의 오염된 암흑 마기가 성광의 에너지를 실시간으로 좀먹으며 방벽 표면에 검은색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사령관…… 방벽이 오래 버티지 못하겠네! 신전의 마기가 성력을 강제로 중화하고 있어!”
엘리시아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뒤편에서는 용병들과 기사들이 시체들의 무차별적인 칼부림과 가벼운 마기 중독으로 인해 타박상을 입으며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포위망은 점점 좁혀졌고, 아군의 방어선은 무너지기 직전이었다.
진우는 차가운 이성을 유지하며 에테르 아침반을 들어 올렸다.
[고유 능력 ‘패스파인더의 눈 (Pathfinder's Sight)’ 활성화]
진우의 시야에 신전 전체의 기하학적 구조가 붉은색과 푸른색 선으로 정교하게 투영되었다. 그는 벨리알이 서 있는 제단 바닥의 마법진을 모노클로 정밀 분석했다.
‘벨리알의 흑마법 서클…… 순수한 자신의 마력이 아니야. 유적 자체의 에테르 동력선에 무단으로 빨대를 꽂아 언데드 군단을 유지하고 있어. 그렇다면…….’
진우의 시선이 신전 천장의 어두운 돌벽 뒤편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거대한 석조 기둥들과 연결된 고대의 낙석 함정이 숨겨져 있었다. 그리고 그 함정의 에테르 작동 도선이, 기묘하게도 벨리알이 마력을 흡수하고 있는 유적의 동력선과 정확히 공명하며 붉은색 점선으로 진동하고 있었다.
‘함정 역이용 (Trap Redirection)이 가능하다.’
진우는 즉각 서하린의 어깨를 강하게 잡았다. 서하린은 그림자 속에서 붉은 눈동자만을 빛내며 진우의 눈을 응시했다. 진우는 목소리를 낼 수 없었기에, 손가락으로 벨리알을 가리킨 후 자신의 목을 가볍게 긋는 제스처를 취했다. 그리고 천장의 붉은 선을 가리켰다.
말은 없었지만, 서하린은 진우의 의도를 완벽하게 이해했다.
“……그림자 속에서 사령관님의 길을 열겠습니다.”
서하린의 형상이 연기처럼 흩어지며 벨리알의 시야 사각지대로 소리 없이 파고들었다.
벨리알은 아군의 방어선이 무너지는 모습을 보며 오만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해골 지팡이를 허공에 높이 들며 거대한 광역 시체 폭파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모두 한 줌의 재로 변해라!”
신전 바닥에 널려 있던 수십 마리의 시체들이 검붉게 부풀어 오르며 폭발적인 에너지를 머금기 시작했다. 저 마법이 완성되는 순간, 아군 전열은 형체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바로 그 순간, 진우는 가죽 가방에서 ‘고대 해체용 펜치’를 꺼내 쥐고 벽면의 무너진 석조 틈새로 몸을 던졌다. 그의 시야 속에서 천장의 낙석 함정과 벨리알의 마법진을 잇는 에테르 도선이 터질 듯이 붉게 요동치고 있었다.
진우는 펜치 날을 도선에 대고 숨을 죽였다. 손끝에서 느껴지는 미세한 기계적 맥박과 마나의 흐름에 온 신경을 집중하는 그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다. 이제 찰나의 타이밍에 도선을 절단해 함정의 발동 트리거를 벨리알의 마법진 방향으로 재배치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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