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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려진 고고학자, 심연의 입구에 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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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까짓 평민 학도 녀석이 감히 내 학설을 도용하려 들어?”


황립 고고학 아카데미 본관의 중앙 홀. 차가운 대리석 바닥에 내팽개쳐진 오진우의 귓가로 가시 돋친 폭언이 내리꽂혔다. 단상 위에서 그를 내려다보는 남자는 아카데미의 최고 권위자이자, 진우의 지도 교수였던 하인리히였다. 정갈하게 빗어 넘긴 백발에 제국 학술원의 금빛 훈장을 가슴에 단 노신사. 하지만 그 위엄 서린 겉모습 뒤에 감춰진 것은 추악한 탐욕뿐이었다.


진우가 밤낮을 지새우며, 목숨을 걸고 해독해 낸 ‘신의 심연 1층 해독 논문’은 이미 하인리히의 이름으로 황실에 보고된 상태였다. 진우가 이에 항의하자 돌아온 것은 비참한 누명과 가차 없는 축출이었다.


“경비병들은 뭐 하는가! 저 파렴치한 표절범 녀석을 당장 아카데미에서 끌어내라! 다시는 이 신성한 학문의 전당에 발을 들이지 못하도록!”


하인리히의 명령에 철갑을 두른 아카데미 경비병들이 거칠게 진우의 양팔을 붙잡았다. 진우가 필사적으로 움켜쥐고 있던 가죽 가방의 끈이 툭 끊어지며, 바닥에 뒹굴었다. 가방 안에서 쏟아져 나온 고대 비문 사본들과 연구 노트들이 경비병들의 군화에 무참히 짓밟혔다. 진우의 눈에 핏발이 섰다.


“하인리히 교수……! 당신이 그러고도 학자입니까? 그 논문은 내 아버지가 남긴 기록과 내가 평생을 바쳐 해독한……!”


“닥쳐라! 어디서 감히 황실 학술원의 이름을 더럽히려 드느냐!”


하인리히의 비열한 미소와 함께, 경비병들은 진우를 거칠게 대리석 계단 아래로 굴려 버렸다. 쏟아지는 장대비 속에서 진우는 진흙탕에 처박혔다. 아카데미의 웅장한 철문이 쾅 소리를 내며 닫혔고, 그의 모든 학술적 명예와 신분은 그 순간 완전히 박탈당했다. 지상 사회에서 그는 이제 ‘이론만 그럴듯한 평민 사기꾼’에 불과했다.


비에 젖은 흑발 사이로 차가운 빗물이 흘러내렸다. 진우는 진흙투성이가 된 손으로 가슴팍을 움켜쥐었다. 셔츠 안쪽, 그의 살결에 닿아 있는 은빛 체인 끝에는 기하학적인 금속 테두리가 둘러진 낡은 외안경이 매달려 있었다. 어머니 세라가 남겨준 유품, ‘앤티크 모노클’이었다.


그때, 아카데미 철문 너머로 거친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하인리히가 보낸 사설 경비대원들이었다. 그들은 단순히 진우를 쫓아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입을 막기 위해 영구히 제거하려 하고 있었다. 무력이라곤 전혀 없는 F급 비전투원인 진우에게는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여기서 개죽음을 당할 수는 없어.’


진우는 떨리는 손으로 앤티크 모노클을 왼쪽 눈에 착용했다. 미세한 마나를 주입하자, 모노클의 금속 테두리가 부드럽게 회전하며 푸른빛을 발했다. 웅장한 학회장 주변의 공간이 왜곡되더니, 진우의 시야에 기이한 에테르의 흐름이 보이기 시작했다.


[1단계: 방관자 (Bystander) - 고유 시야 활성화]


모노클을 통해 바라본 세상은 전혀 달랐다. 추격해 오는 경비병들의 발걸음 궤적이 붉은색 선으로 그려졌고, 아카데미 본관 외곽의 고대 석조 기둥 사이에 흐르는 미세한 기믹의 사각지대가 푸른색 영역으로 투영되었다. 진우의 천재적인 기하학 연산 능력이 실시간으로 작동했다.


‘오른쪽 3시 방향, 세 번째 석주 뒤. 저곳의 마나 흐름이 꺾이는 순간 경비병들의 시야가 0.8초 동안 차단된다.’


진우는 숨을 죽이고 타이밍을 계산했다. 경비병들이 칼을 뽑아 들고 모퉁이를 돌기 직전, 그는 몸을 날려 푸른색 사각지대 속으로 미끄러지듯 숨어들었다. 웅성거리는 경비병들의 목소리가 바로 등 뒤를 스쳐 지나갔다.


“어디로 갔지? 분명 이쪽으로 도망쳤을 텐데!”


“사라졌다! 쥐새끼 같은 놈, 샅샅이 수색해!”


그들이 허둥대는 사이, 진우는 모노클이 제시하는 안전 경로를 따라 아카데미 시티의 하수구를 통해 유유히 포위망을 빠져나갔다. 그의 손에는 아버지가 남겨준 유일한 단서이자, 유적 3층까지의 해독 힌트가 적힌 낡은 가죽 일지가 굳게 쥐여 있었다.


***


그로부터 수일 후.


대륙의 중앙 사막 한가운데, 거대한 지구동 ‘신의 심연’ 입구 주변에 형성된 무법지대 천막 도시 ‘심연의 문’.


바람이 불 때마다 누런 모래 먼지가 시야를 가렸고, 사막의 열기와 땀 냄새, 그리고 온갖 범죄자들과 도굴꾼들의 거친 고함 소리가 뒤엉켜 흐르는 혼란스러운 장소였다. 아카데미의 세련된 분위기와는 180도 다른 약육강식의 세계. 진우는 수수한 학자 복장 위에 먼지 낀 로브를 뒤집어쓴 채 낡은 선술집 겸 잡화점의 문을 열었다.


딸랑거리는 종소리와 함께 퀴퀴한 맥주 냄새가 코를 찔렀다. 선술집 구석, 온갖 고물 유물 부품들이 쌓여 있는 카운터 뒤에서 헝클어진 갈색 머리의 청년이 넉살 좋은 미소를 지으며 진우를 맞이했다. 진우의 유일한 친구이자 비밀 상인인 김태현이었다.


“오, 이게 누구야! 황립 아카데미의 천재 조수께서 이 누추한 무법지대까지 어쩐 일이냐? 몰골이 왜 그 모양이야?”


태현이 반갑게 인사를 건넸지만, 진우의 흙먼지 묻은 얼굴과 끊어진 가죽 가방을 보더니 이내 표정을 굳혔다. 진우는 묵묵히 로브를 벗고 카운터 앞 의자에 주저앉았다.


“쫓겨났어. 하인리히 그 늙은이가 내 논문을 통째로 빼앗아 황실에 바치고, 나를 표절범으로 몰았지.”


“뭐라고? 그 개자식이……!”


태현이 주먹으로 카운터를 쾅 내리쳤다. 주변의 거친 도굴꾼들이 힐끗 시선을 던졌으나, 태현이 살벌한 눈빛으로 그들을 쏘아보자 이내 고개를 돌렸다. 태현은 낮게 한숨을 쉬며 진우에게 시원한 보리수를 건넸다.


“역시 지상 놈들은 믿을 게 못 돼.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야? 제국 학회 놈들이 너를 가만히 두지 않을 텐데.”


“심연으로 들어갈 거야.”


진우의 단호한 말에 태현이 들이키던 잔을 멈추고 경악 어린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너 미쳤어? 신들의 심연 1층은 ‘눈물의 미궁’이야! 온갖 즉사급 함정과 고대 가디언들이 도사리는 죽음의 구역이라고! 대륙 최강이라는 철혈 용병단이나 성광 기사단 놈들도 시체가 되어서 실려 나오는 곳이야. 너 같은 무등급 비전투원이 들어가면 3분을 못 버티고 뼈도 못 추려!”


“나도 알아. 하지만 내 아버지가 10년 전 그곳에서 실종되셨어. 그리고 아버지가 남긴 이 일지…… 이 속의 고대 문양들을 해독할 수 있는 사람은 대륙에서 나뿐이야. 하인리히가 가로챈 논문은 껍데기에 불과해. 진짜 유적의 제어권은 내 손으로 해독해야만 얻을 수 있어.”


진우는 품속에서 아버지가 남긴 낡은 가죽 일지를 꺼내 보였다. 그리고 왼쪽 눈의 앤티크 모노클을 가볍게 톡톡 두드렸다.


“나한테는 이 눈이 있어. 함정의 궤적과 마나의 흐름을 읽는 눈. 무력이 없어도, 유적의 규칙만 해독하면 살아남을 수 있어.”


태현은 진우의 흔들림 없는 눈빛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진우의 고집을 꺾을 수 없음을 누구보다 잘 아는 그였다. 태현은 머리를 긁적이며 카운터 밑에서 낡은 가죽 상자 하나를 꺼내 올렸다.


“좋아, 네 그 괴물 같은 머리와 눈은 나도 인정하지. 하지만 맨몸으로 들어갈 수는 없잖아? 여기 탐사 장비랑 해체 도구들이야. 내 특별히 ‘외상’으로 빌려주마. 살아 돌아와서 고대 유물로 갚으라고, 친구.”


상자 안에는 은빛으로 빛나는 정교한 ‘고대 해체용 펜치’와 간이 식량, 그리고 어두운 미궁을 밝힐 수 있는 붉은 이끼 가루들이 들어 있었다. 진우의 가슴속에 묵직한 온기가 차올랐다. 지상 학계에서 철저히 배신당하고 버려진 그에게, 유일하게 손을 내밀어 준 진짜 친구였다.


“고맙다, 태현아. 반드시 살아 돌아와서 이 외상값의 열 배로 갚아주지.”


“싱겁기는. 몸조심이나 해라. 제국 학회의 사설 경비대 놈들이 벌써 이 무법지대 외곽까지 들이닥쳤다는 소문이 있으니까.”


진우는 태현이 챙겨준 장비들을 꼼꼼히 가방에 담고, 낡은 로브의 후드를 깊게 눌러썼다. 심연의 문 가장 깊은 곳, 대지가 거대하게 입을 벌리고 있는 어둠의 구멍을 향해 그의 발걸음이 움직였다.


***


사막의 모래바람을 뚫고 도달한 ‘신의 심연’ 입구.


수천 년의 세월을 견뎌온 거대한 석조 건축물의 잔해가 반쯤 모래에 묻힌 채 웅장한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입구를 가로막고 있는 것은 높이만 십 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강철 석문이었다. 석문 표면에는 복잡하게 얽힌 초고대 아키텍트의 기하학적 문양들이 빼곡히 새겨져 있었고, 그 틈새로 불길한 붉은색 마기가 안개처럼 흘러나오고 있었다.


진우가 석문 앞에 서서 앤티크 모노클을 가동하려던 찰나.


바스락, 하는 불길한 소리와 함께 등 뒤의 모래 언덕 너머에서 차가운 살기가 느껴졌다. 진우가 급히 고개를 돌리자, 아카데미 시절 하인리히의 사주를 받았던 사설 경비대원 서너 명이 무기를 뽑아 든 채 다가오고 있었다.


“쥐새끼 같은 놈, 여기까지 도망쳐 왔군! 하인리히 교수님의 명령이다. 네놈의 목을 가져가야 우리가 제국에서 떵떵거리고 살 수 있거든!”


경비대원의 우두머리가 비열하게 웃으며 강철 검을 치켜들었다. 진우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주위는 사막의 절벽으로 가로막힌 외길. 도망칠 곳은 오직 굳게 닫힌 거대한 석문뿐이었다.


‘시간이 없어. 저 문을 열어야 해.’


진우는 경비병들의 돌격 궤적을 모노클로 읽으며, 필사적으로 석문 표면의 문양들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의 머릿속에서 고대 문자 3형식 해석법이 폭발적으로 연산되기 시작했다.


[명사: 아키텍트의 문]

[동사: 개방한다]

[트리거: ……혈통의 공명과 에테르의 빛]


“혈통의 공명……?”


경비병들의 검날이 진우의 코앞까지 육박한 순간, 진우는 직관적으로 자신의 손가락 끝을 날카로운 석문 모퉁이에 그어버렸다. 붉은 피 한 방울이 석문의 중앙 인장에 닿았다.


그와 동시에, 진우가 착용하고 있던 앤티크 모노클이 눈부신 황금빛 에테르를 뿜어내며 석문의 문양들과 공명하기 시작했다. 손등에 기묘한 기하학적 문양인 ‘아키텍트의 표식’이 푸른빛으로 선명하게 떠올랐다.


쿠구구구구—!


수천 년 동안 그 누구의 무력으로도 열리지 않았던 거대한 강철 석문이, 진우의 피와 모노클의 빛에 반응하여 스스로 거대한 소리를 내며 열리기 시작했다. 석문 틈새로 뿜어져 나오는 압도적인 고대의 마기 바람이 경비병들을 뒤로 날려버렸다.


“이, 이게 무슨……! 문이 열린다고? 무력도 없는 평민 학도 놈이 어떻게!”


경비병들이 경악 어린 비명을 지르는 사이, 진우는 주저 없이 열린 석문 틈새, 칠흑 같은 어둠이 도사리는 ‘눈물의 미궁’ 내부로 몸을 던졌다.


스스스스—.


진우가 발을 들이자마자, 거대한 강철 석문은 추격자들을 가로막으며 다시 한번 완벽하게 닫혀 버렸다. 차가운 미궁의 어둠 속, 홀로 선 오진우의 눈앞에 붉은빛의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신의 심연 1층: 눈물의 미궁에 진입하셨습니다.]

[현재 등급: 1단계 - 방관자 (Bystander)]

[고독한 개척자의 모험이 시작됩니다.]

HẾT CHƯƠ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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