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열 전야의 무음 작전
푸른빛으로 식어버린 목걸이 쇠붙이를 내려다보며, 아벨은 마침내 제국의 목줄을 끊어낼 거대한 역전의 서막을 감지했다.
하지만 승리의 여운은 길지 않았다. 어두컴컴한 노예 막사의 나무 틈새로 릴리가 쥐새끼처럼 소리 없이 기어 들어온 것은, 아벨이 자폭 목걸이 해제 장치의 프로토타입을 주머니에 막 쑤셔 넣었을 때였다. 릴리의 숨결은 가빴고, 주근깨 가득한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릴리는 아벨의 손바닥을 낚아채듯 쥐고는 손가락 끝으로 미친 듯이 글자를 적어 내렸다.
[간수실 비상 상황. 시몬의 실어증을 간수들이 발견함. 프란츠 간수장이 격노하여 아레나 내부의 마나 파동을 조사하라고 명령함. 몇 시간 뒤 동틀 무렵, 정예 기사단을 대동하고 노예 막사 전체의 자폭 목걸이 작동 상태를 일제 검열하겠다고 선포함.]
아벨의 눈동자가 차갑게 굳어졌다.
시몬의 혀를 묶어버린 침묵의 룬이 예상보다 일찍 간수들의 이목을 끈 것이다. 제국의 지배층은 멍청하지 않았다. 노예 한 명이 갑자기 말을 잃고 하수도에 쓰러져 있는 것을 발견한 순간, 그들은 아레나 내부에 비인가 마법이 가동되었음을 직감했을 터였다.
프란츠 간수장은 군대식 규율로 무장한 철혈의 폭군이었다. 그가 직접 기사단을 대동하고 일제 검열을 개시한다는 것은, 노예들의 목걸이에 새겨진 마나 루프를 하나하나 스캔하겠다는 뜻이었다.
만약 단 하나의 목걸이라도 해제되어 있거나 마나의 흐름이 끊겨 있는 것이 적발된다면, 프란츠의 황금 반지는 즉시 아레나 전체의 자폭 명령을 발동할 것이다. 수백 명의 노예 결사대가 반란의 칼날을 뽑기도 전에 목이 날아가 피의 제물이 될 위기였다.
“쉭…… 쉭……”
아벨의 성대에서 거친 바람 소리가 흘러나왔다. 만성 빈혈로 전신이 얼어붙는 듯한 한기가 몰려왔지만, 그의 머릿속은 오히려 얼음처럼 투명해졌다.
‘정면 돌파는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해제한 목걸이를 다시 채워둘 수도 없어. 검열을 속여야 한다.’
제국의 마력 스캐너는 목걸이 내부의 마나 루프가 완벽한 ‘닫힌 회로’를 유지하고 있는지를 측정한다. 만약 목걸이가 풀려 있다면 스캐너는 즉시 ‘단절’ 신호를 감지하고 경보를 울릴 것이다.
그렇다면 해결책은 하나뿐이었다. 목걸이는 해제하되, 스캐너의 탐지 주파수가 닿는 순간 정상적으로 잠겨 있는 것처럼 속이는 ‘의미론적 우회 결계’를 덧씌우는 것.
아벨은 구석에서 묵묵히 대기하고 있던 거구의 방어 전사, 토마스를 향해 눈짓을 보냈다. 토마스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막사 입구의 무거운 철문 뒤로 가 몸을 숨겼다. 그의 단단한 신체는 만에 하나 간수들이 들이닥칠 경우 아벨의 시간을 벌어줄 유일한 인간 방패였다.
아벨은 구석에 모여 있는 수십 명의 결사대원들을 향해 손짓했다. 어둠 속에서 노예들의 눈동자가 공포와 기대로 흔들렸다.
아벨은 품속에서 타릭이 깎아준 구리 열쇠 모양의 해제 장치를 꺼냈다. 이미 낮 동안의 테스트로 인해 구리 촉 끝의 미세한 마나 회로가 약간 마모되어 미세한 실금이 가 있었다. 남은 내구도는 기껏해야 수십 번. 아벨은 이 장치 하나로 오늘 밤 막사 내부의 모든 핵심 간부들의 목걸이를 풀어내야 했다.
아벨은 첫 번째 노예의 목덜미로 다가갔다. 그는 자신의 손가락 끝을 깨물었다. 생혈이 차가운 검지손가락을 타고 흘러내렸다. 아벨은 그 피를 구리 해제 장치의 미세한 홈에 흘려 넣으며, 마음속으로 수식을 전개했다.
‘[Command: Overload]를 부정한다. 형태소 분해 가동.’
철컥.
미세한 마찰음과 함께 붉게 빛나던 자폭 룬이 푸른빛으로 정화되며 목걸이의 잠금이 풀렸다. 하지만 아벨은 목걸이를 노예의 목에서 완전히 분리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풀려버린 목걸이 내부의 마석 노드 표면에 자신의 피로 새로운 기하학적 문자를 새기기 시작했다.
그가 새기는 것은 현대 한국어의 인지 언어학적 왜곡 구조를 대입한 ‘인지 오류(Cognitive Error) 룬’이었다.
‘미(迷)’와 ‘궁(宮)’의 기하학적 결합.
초성 ‘ㅁ’, 중성 ‘ㅣ’, 종성 ‘ㅇ’을 하나의 사각형 블록 내에 정교하게 배열하고, 그 주변을 고대 룬의 미세한 곡선으로 감싸 안았다. 이 룬의 기능은 단순했다. 외부에서 마력 스캐너의 탐색 주파수가 목걸이를 두드릴 때, 그 주파수를 미로 속에 가두어 버리는 것.
스캐너가 “이 회로는 닫혀 있는가?”라고 질문을 던지면, 인지 오류 룬은 그 질문의 통사적 경로를 뒤틀어 “그렇다, 이 회로는 완벽히 잠겨 있다”라는 가짜 데이터를 복제해 되돌려보내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지배층이 설계한 스캐너의 기계적 문법을 역으로 이용한 언어학적 사기극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아벨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다.
목걸이를 하나씩 해제하고 인지 오류 룬을 새길 때마다, 그의 체내 마나와 생혈이 빠른 속도로 고갈되어 갔다. 손가락 끝의 상처는 아물 틈이 없었고, 전신이 얼음물에 잠긴 듯한 극심한 저체온증이 그를 덮쳤다. 우안의 시야는 점점 더 흐려져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었고, 귀에서는 쇠붙이가 긁히는 듯한 날카로운 이명이 웅웅거렸다.
‘아직 서른 명이 남았다. 조금만 더…….’
아벨은 이빨을 악물며 흑요석 반지를 낀 왼손을 쥐어짜냈다. 반지의 검은 표면 위로 미세한 실금이 조금 더 깊게 패여 들어갔지만, 차가운 마력 진동은 가까스로 그의 피가 응고되는 것을 막아주고 있었다.
그때였다.
막사 중앙에서 대기하던 한 젊은 노예의 목걸이에 해제 장치를 접촉시키는 순간, 찌르르하는 기괴한 고주파음이 고요한 막사 내부에 울려 퍼졌다.
목걸이 내부의 마석 노드가 갑자기 검붉은 빛을 발하며 터질 듯이 과열되기 시작한 것이다. 가스통이 설계한 예외 처리 구문이 아벨의 연산 오차를 감지하고 폭주 주술을 강제로 기동하려 하고 있었다.
째깍, 째깍, 째깍.
마치 시한폭탄의 초침이 돌아가는 듯한 불길한 소리가 막사의 정적을 찢었다. 주변의 노예들이 공포에 질려 뒤로 물러섰다. 이대로 3초만 지나면 목걸이가 폭발해 막사 전체가 날아가고 경보가 울릴 터였다.
아벨은 도망치지 않았다. 그는 떨리는 오른손을 뻗어 과열된 목걸이를 움켜쥐었다. 그리고 자신의 손가락 끝을 더 깊게 찢어 뿜어져 나오는 생혈을 목걸이의 마석 위에 직접 쏟아부었다.
‘[Mute]. 모든 진동과 원소 운동을 구속한다!’
그는 머릿속의 모든 연산 회로를 극한으로 끌어올려 한글의 ‘묵(默)’ 자 구조식을 피의 궤적으로 마석 표면에 강제로 덧씌웠.
치이이익——!
살이 타들어 가는 듯한 극심한 마력 마찰열이 아벨의 손바닥을 덮쳤다. 하지만 그는 고통의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이빨이 깨질 정도로 악물며 마나의 흐름을 억눌렀.
마침내 붉게 폭주하려던 마석의 빛이 아벨의 피에 차단당하듯 서서히 가라앉으며, 푸른빛의 정적 속으로 내려앉았다. 목걸이는 다시 차갑게 식어 내렸다.
“하아…… 하아……”
아벨은 성대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쉭쉭거리는 숨소리를 뱉으며 바닥으로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전신의 마나가 98% 이상 고갈되어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없었다. 하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토마스의 부축을 받으며 다시 일어선 아벨은, 마지막 남은 노예들의 목걸이를 향해 철필을 움직였다.
동틀 무렵.
창백한 회색빛 새벽안개가 막사의 틈새로 스며들기 시작했을 때, 마지막 대원의 목걸이에 기만 결계를 덧씌우는 작업이 완료되었다. 아벨의 두 손은 자신의 피로 붉게 물들어 있었고, 그의 입가에는 각혈한 검은 피딱지가 붙어 있었다. 완벽한 탈진 상태였다.
바로 그 순간, 막사 외곽의 복도 끝에서 무겁고 차가운 철제 군화 소리가 바닥을 울리며 다가오기 시작했다.
쿵. 쿵. 쿵.
소리는 자비가 없었고, 일정한 군대식 규율을 담고 있었다. 간수장 프란츠와 그의 뒤를 따르는 백작 가문의 정예 마법 기사 가르시아의 발소리였다.
철컥하는 거친 열쇠 소리와 함께, 노예 막사의 거대한 철문이 좌우로 거칠게 열려젖혀졌다. 차가운 새벽바람과 함께, 눈가에 깊은 칼자국이 난 위압적인 거구의 사내, 프란츠 간수장이 막사 내부로 걸어 들어왔. 그의 오른손 손가락에는 결계 제어 장치와 동조된 황금 반지가 서슬 퍼런 마력의 안개를 내뿜고 있었다.
프란츠의 매서운 눈빛이 막사 내부를 훑었다. 노예들은 공포에 질린 채 바닥에 엎드려 있었고, 아벨 역시 토마스의 어깨에 기댄 채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프란츠는 한 걸음씩 다가와, 쓰러질 듯 서 있는 아벨의 앞에 멈춰 섰다. 비열한 미소를 지은 그의 손이 느릿하게 올라와 아벨의 목덜미를 거칠게 움켜쥐었다. 그리고 황금 반지가 박힌 그의 손가락 끝이 아벨의 자폭 목걸이 정중앙을 향해 차가운 마나 스캔 파동을 흘려보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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