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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찍 아래의 침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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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염의 장막이 걷히고 자욱한 그을음 속에서, 가죽 장화의 무거운 군화 소리가 아벨 일행을 향해 서서히 다가왔다.


매캐한 연기가 코를 찔렀다. 율리우스가 지른 불길은 아벨이 완성한 한글 구조식 ‘안(安)’과 ‘정(淨)’의 장막에 가로막혀 꺼졌으나, 제3연습장 주변은 여전히 검은 그을음과 무너진 석조 잔해로 가득했다. 아벨은 오른손으로 피눈물이 흐르는 오른쪽 눈을 감싸 쥐었다. ‘모노클 오브 트루스’를 통해 5서클급 광역 화염 주문을 초고속으로 연산한 대가는 끔찍했다. 시신경이 타들어 가는 듯한 극심한 두통과 함께, 체내 마나의 80%가 일시에 고갈되어 손끝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쉭…… 쉭……”


잘린 성대 사이로 새어 나오는 것은 쉭쉭거리는 거친 바람 소리뿐이었다. 아벨은 바닥에 주저앉아 호흡을 가다듬으려 애썼다. 그의 곁에서는 여동생 리사가 향초를 꽉 쥔 채 사르르 떨고 있었고, 쇠사슬에 묶인 야수 전사 가르크가 경악과 경외가 뒤섞인 눈으로 아벨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노예가 목소리도 없이 피로 글을 써서 귀족의 마법을 정화했다는 사실은, 이 아레나 칼리두스에서는 존재해서는 안 될 신성모독이자 기적이었다.


“여기 있었군. 더러운 가축 놈들.”


그을음 속에서 나타난 형체는 악랄한 채찍 간수, 크로이츠였다. 그의 얼굴에 새겨진 뱀 같은 흉터가 기괴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크로이츠는 허리에 찬 마력 채찍을 만지작거리며, 사방이 전소된 연습장에서 털끝 하나 다치지 않고 살아남은 아벨 일행을 노려보았다. 그의 손에 들린 탐지 보주가 미세하게 붉은빛을 발하고 있었다.


“율리우스 님의 대화재 속에서 상처 하나 없이 살아남았다라…….”


크로이츠의 눈동자에 집요한 의심이 서렸다. 그는 아벨이 바닥에 급히 흙을 덮어 가린 피의 룬 흔적을 흘끗 보았다. 완벽히 지워지지 않은 미세한 마나의 잔향이 대기 중에 흐르고 있었다. 크로이츠는 이것이 단순한 결계 폭주의 생존자가 아니라, 아레나의 규율을 뒤흔드는 ‘금지된 힘’의 흔적임을 직감했다. 백작이나 간수장이 이 사실을 알기 전에, 자신이 먼저 이 노예의 배후를 캐내어 공을 독차지해야 했다.


“경비병들! 이 벙어리 놈을 지하 고문실로 끌고 가라. 가르크와 계집년은 막사에 격리해라.”


가르크가 쇠사슬을 쇠되게 울리며 크로이츠를 향해 이빨을 드러냈으나, 아벨은 쉭쉭거리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저었다. 지금 정면으로 충돌하면 마나가 고갈된 자신들은 몰살당할 뿐이었다. 아벨은 차가운 이성으로 분노를 누르며 순순히 경비병들의 손에 이끌려 차가운 지하 감옥으로 향했다.


***


지하 고문실은 축축하고 곰팡이 냄새가 가득한 밀실이었다. 사방의 벽면에는 말라붙은 노예들의 피가 검붉은 이끼처럼 붙어 있었다. 아벨은 양팔이 쇠사슬에 묶인 채 허공에 매달렸다. 차가운 쇠사슬이 살을 파고들었지만, 그의 뇌리는 오히려 차갑게 가라앉았다.


찰싹——!


“윽……!”


매서운 파열음과 함께 마력이 실린 가죽 채찍이 아벨의 가슴을 찢어발겼다. 가죽 옷이 찢어지며 붉은 선혈이 튀었다. 크로이츠는 채찍 끝에 ‘노예 낙인 제어술’의 마나를 실어 타격할 때마다 아벨의 마나 회로를 강제로 뒤흔들었다.


“말해라, 벙어리 놈아. 글을 쓸 줄 알 테니 손가락만 까닥하면 되겠지.”


크로이츠가 비열한 미소를 지으며 아벨의 턱을 거칠게 치켜올렸다.


“그 화염 속에서 어떻게 살아남았지? 네놈이 바닥에 새기던 그 기괴한 문양은 대체 무엇이냐? 누구에게 전수받은 이단 주술이지? 배후가 누구냐!”


크로이츠의 다그침과 함께, 채찍이 다시 한번 아벨의 어깨를 내리쳤다. 채찍이 살을 파고들 때마다 전해지는 극심한 통증은 아벨의 머릿속 깊은 곳에 잠들어 있던 가장 어두운 기억을 깨웠다.


‘아벨의 혀 절단 사건.’


제국군이 그의 부족을 습격하고 노예로 끌고 오던 날, 어린 리사를 지키기 위해 부족의 고대 구전 가요를 흥얼거렸다는 이유만으로 크로이츠는 아벨의 성대를 짓밟고 은장도로 그의 혀를 잘라버렸다. 뜨거운 피가 목구멍으로 넘어가며 숨이 막히던 그날의 감각, 침묵을 강요당하며 바닥을 기어야 했던 짐승 같은 기억이 현재의 고통과 겹쳐지며 아벨의 영혼을 갉아먹으려 했다.


‘정신 차려라, 최강민.’


아벨은 어둠 속에서 이를 악물었다. 고통에 굴복해 자백하는 순간, 자신뿐만 아니라 리사와 가르크, 그리고 자신을 믿어준 모든 노예 동료들이 자폭 목걸이의 제물로 바쳐질 터였다. 그는 침묵해야 했다. 말을 빼앗긴 자의 침묵은 무력한 굴복이 아니라, 지배층의 왜곡된 질서에 대항하는 가장 강력한 언어적 저항이었다.


“아직도 입을 다물겠다 이거지?”


크로이츠는 초조해졌다. 채찍질을 가해도 비명 한 번 지르지 않고 쉭쉭거리는 숨소리만 내는 아벨의 눈빛이 유독 차가웠기 때문이다. 크로이츠는 허리춤에서 자폭 목걸이의 전압 제어 장치를 꺼내 들었다.


“그렇다면 이 전압을 견뎌보아라.”


지이이이잉——!


목줄에 채워진 자폭 목걸이에서 강력한 마력 전류가 방출되며 아벨의 전신 신경망을 강타했다. 마나 회로가 타들어 가는 듯한 극통이 뇌리를 찔렀다. 아벨의 신체가 허공에서 격렬하게 뒤틀렸다. 혀가 잘린 목구멍 안쪽에서 쉭쉭거리는 비명이 피거품과 함께 뿜어져 나왔다.


‘뇌세포가 타버릴 것 같다…….’


정신이 흐려지는 찰나, 아벨은 학자로서의 아집을 발휘했다. 그는 고통이라는 감각 신호 자체를 하나의 ‘입력 데이터’로 규정했다. 전생에 대학원에서 밤을 지새우며 형태소를 분석하던 그 차가운 이성을 가동했다. 고통은 뇌가 해석하는 전기적 신호일 뿐이며, 마력의 타격은 공간의 기하학적 인과율에 불과하다.


아벨은 머릿속으로 품속에 숨겨둔 ‘바르도의 오답 노트’를 복기하기 시작했다. 제국 마법사들이 시전하는 마력 채찍술의 문법적 구조를 실시간으로 분해했다.


‘크로이츠가 사용하는 채찍술은 [Flagellum(채찍)]과 [Cruor(피)]의 어근을 기반으로 한 2서클 마법이다. 타격 순간 마나를 횡적으로 압축하여 충격파를 극대화하는 통사론적 규칙을 지니고 있어. 그렇다면…… 그 물리적 충격이 내 신체 좌표에 닿는 순간, 그 인과율의 연결선을 일시적으로 ‘역설(Paradox)’화하여 우회시키면 된다.’


그것은 고대 초대 현자의 비급에서 힌트를 얻고, 아벨이 독자적으로 설계 중이던 궁극의 보명기, ‘역설적 회피’의 연산 공식이었다.


체내 마나가 20%밖에 남지 않은 최악의 상황. 아벨은 심장 부근의 마나 회로를 강제로 쥐어짜며, 머릿속으로 초성, 중성, 종성의 자모음 결합을 기하학적 수식으로 나열했다. 물리적 충격이 닿는 찰나의 좌표를 미분하여, 존재하면서도 존재하지 않는 공간적 역설의 문장을 뇌리에서 완성해 나갔다.


“이 더러운 가축 놈이 끝까지 눈을 부릅뜨는구나!”


크로이츠는 아벨의 차가운 눈빛에 모욕감을 느끼며, 채찍을 높이 치켜들었다. 이번에는 마력을 극대로 압축해 아벨의 가슴뼈를 완전히 으스러뜨릴 기세였다. 채찍 끝에 검붉은 전류의 칼날이 서슬 퍼렇게 일렁였다.


크로이츠가 아벨의 가슴을 채찍으로 내리치려는 순간, 아벨이 마음속으로 완성한 역설적 수식이 가동되며 채찍이 그의 피부를 투명하게 스쳐 지나가 벽을 강타했다.

HẾT CHƯƠ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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