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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요석과 붉은 약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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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무기고 방향에서 타오르는 붉은 마나의 불꽃이 지하 감옥의 어두운 석조 벽을 붉게 물들였다. 가르크의 분노 섞인 포효가 지하 통로를 타고 웅웅 울릴 때마다, 아벨은 품속의 가죽 수첩—바르도가 목숨과 바꾸어 넘겨준 오답 노트—을 더욱 세게 움켜쥐었다.


‘가야 한다. 하지만…….’


아벨은 한 걸음을 내딛으려 했으나, 다리가 납덩이처럼 무거웠다. 시야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전신의 혈관이 얼음물을 부은 듯 차갑게 식어 내리고 있었다. 어젯밤 간수 크로이츠의 수색을 피하기 위해 지하 9호실의 석회벽에 ‘묵(默)’ 자와 ‘미(迷)’ 자의 이중 룬을 새기며 너무 많은 피를 흘린 탓이었다.


지독한 빈혈이 뇌를 옥죄었다. 심장이 비정상적으로 빠르게 뛰며 부족한 혈액을 짜내려 발버둥 쳤지만, 손끝은 이미 감각을 잃고 하얗게 질려 있었다. 바르도의 시신을 뒤로하고 몇 걸음 걷지도 못해, 아벨은 결국 차가운 돌벽을 짚고 무너지듯 쓰러졌다.


“오빠! 오빠, 정신 차려!”


지옥 같은 정적을 깨고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창백한 뺨에 짙은 흑발을 대충 땋아 내린 소녀, 여동생 리사였다. 리사는 노역으로 인해 거칠어진 손으로 아벨의 어깨를 붙잡고 흔들었다. 오빠의 몸에서 풍기는 지독한 피비린내를 맡은 리사의 눈에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리사는 황급히 주머니에서 말린 향초 뭉치를 꺼내 불을 붙였다. 매캐하면서도 달콤한 향초 연기가 감옥 통로의 피비린내를 덮기 시작했다. 간수들이 피비린내를 맡고 역탐지 보주를 들고 찾아오는 것을 막기 위한, 리사만의 은밀한 조력 방식이었다.


“또 피를 흘린 거지? 벽에 그 이상한 글자를 그리느라 그런 거지? 제발, 오빠…… 이러다 오빠가 먼저 죽어.”


아벨은 대답하고 싶었으나, 잘려 나간 설근의 흉터에서는 오직 쉭쉭거리는 바람 소리와 컥컥하는 마찰음만이 흘러나올 뿐이었다. 목소리를 잃은 자의 비참함이 가슴을 찔렀다.


그때, 좁은 통로 모퉁이에서 가벼운 발소리와 함께 약초 바구니를 멘 소녀가 나타났다. 아레나 인근 숲에서 약초를 채집하는 노예 약초사, 안나였다.


“비켜봐, 리사. 아벨의 상태가 너무 심각해. 마나 회로가 혈류를 강제로 쥐어짜서 빈혈을 넘어 영혼의 맥이 가라앉고 있어.”


안나는 바구니에서 줄기가 붉고 잎사귀가 톱니 모양인 특이한 풀을 꺼냈다. 아레나 외곽의 축축한 숲 깊은 곳에서만 자라는 희귀한 조혈의 영초, ‘루마 헤르바’였다. 안나는 품속에서 낡은 은빛 절구를 꺼내 루마 헤르바의 줄기를 거칠게 빻았다.


초록빛 즙과 붉은 진액이 섞인 걸쭉한 액체가 완성되자, 안나는 그것을 아벨의 입술 사이로 조심스럽게 흘려 넣었다.


“삼켜, 아벨. 뱉으면 안 돼.”


혀가 잘린 목구멍 안쪽으로 타는 듯이 쓰고 비린 영초의 즙이 밀려들었다. 아벨은 이빨을 악물고 그것을 삼켰다.


즙이 위장에 닿는 순간, 기적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얼어붙었던 골수에서 뜨거운 혈액이 폭발적으로 생성되는 듯한 열기가 전신으로 뻗어 나갔다. 심장의 불규칙한 고동이 잦아들고, 하얗게 질렸던 뺨에 미세하게 붉은 혈색이 돌기 시작했다.


‘살았다…….’


아벨은 떨리는 손을 들어 자신의 가슴을 짚었다. 영초 ‘루마 헤르바’의 조혈 효과는 상상을 초월했다. 하지만 아벨은 냉철한 언어학자의 이성으로 이 현상을 분석했다.


‘이것은 단순한 약효가 아니다. 루마 헤르바의 성분이 체내의 흩어진 마나를 혈액 세포와 강제로 결합시키는 촉매 역할을 한 거야. 하지만 이 방식은 일시적인 방편에 불과해. 피를 매개로 마법을 쓸 때마다 수명을 갉아먹는 페널티를 해결하려면, 피가 대기 중에서 응고되는 것을 막고 마나를 영구적으로 고정해 줄 ‘물리적 매개체’가 필수적이다.’


아벨은 품속에서 바르도의 오답 노트를 슬며시 꺼내 들었다. 리사와 안나가 주변을 감시하는 사이, 그는 수첩의 빛바랜 양필지 장을 넘겼다. 수십 년간 제국 최고의 번역관으로 일했던 바르도의 필체가 어둠 속에서도 선명하게 드러났다.


[제국의 금속 제련 마법 ‘페룸 아르스(Ferrum Ars)’의 모순: 제련사들은 금속의 불순물을 제거하기 위해 ‘퓌로스(Pyros)…… 푸리피카(Purifica)…… 하에레(Haere)……’라는 장황한 3서클 주문을 시전한다. 그러나 이 주문은 대기 중의 화염 마나를 나열식으로 배치할 뿐이기에, 열에너지가 금속 내부로 균일하게 침투하지 못하고 표면만을 태운다. 불순물이 완벽히 정제되지 않는 이유는 형태소의 낭비로 인한 주파수의 분열 때문이다.]


아벨의 눈이 번뜩였다. 현대 언어학적 구조론의 관점에서 볼 때, 금속 제련은 원소의 무질서한 결합을 하나의 질서 정연한 구조로 ‘정렬’하는 과정이었다. 제국의 제련 마법이 실패하는 이유는 본질적인 명령인 ‘정렬’과 ‘결합’을 의미하는 어근 주변에 무의미한 미사여구와 귀족들의 권위를 세우는 접두사가 가득 차 마나의 간섭을 일으키기 때문이었다.


‘어근 간소화 변형법(Root Simplification).’


아벨은 머릿속으로 공식을 재설계했다. 불필요한 장식적 형태소를 칼로 베어내듯 지우고, 오직 ‘쇠 금(金)’ 자와 ‘불 화(火)’ 자의 본질적인 마나 반응 주파수만을 추출해 한글의 초성, 중성, 종성 구조식에 대입한다. 자음과 모음이 사각형의 공간적 좌표 내에서 완벽한 대칭을 이룰 때, 마나는 그 어떤 저항도 없이 금속의 분자 구조를 강제 정렬할 것이다.


아벨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영초 덕분에 체력은 회복되었으나, 아직 가르크가 있는 무기고로 가기 전에 반드시 해결해야 할 일이 있었다. 마나를 고정할 장비를 만드는 것.


“타릭에게 가야 해.”


아벨은 목구멍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손짓으로 안나와 리사에게 방향을 가리켰다. 리사는 오빠의 굳건한 눈빛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안나 역시 약초 바구니를 정리하며 비밀 통로의 위치를 일러주었다.


***


아레나 칼리두스의 가장 깊고 은밀한 구석, 고철 쓰레기장과 연결된 지하 대장간.


그곳에는 붉은 수염을 가슴까지 기른 땅땅한 체구의 드워프 대장장이 노예, 타릭이 거대한 무쇠 망치를 휘두르고 있었다. 깡! 깡! 소리가 울릴 때마다 화로에서 뿜어져 나오는 매캐한 그을음과 뜨거운 열기가 지하실을 가득 채웠다.


타릭은 지금 제국의 귀족 마법사들에게 납품할 특수 장비인 ‘흑요석 반지’를 제련하는 중이었다. 흑요석은 마력을 흡수하고 고정하는 성질이 뛰어난 천연 광물이지만, 제련하기가 극도로 까다로웠다. 조금만 온도가 맞지 않거나 마나의 주파수가 흔들리면 원석 자체가 산산조각 나버리기 때문이었다.


“우라질! 빌어먹을 제국의 개소리 주문 같으니라고!”


타릭이 망치를 내던지며 걸걸한 목소리로 욕설을 퍼부었다. 화로 내부의 온도는 충분히 올라가지 않았고, 제련 중이던 흑요석 원석 표면에는 이미 미세한 균열이 가 있었다. 불순물이 정제되지 않아 검은 원석 내부가 탁하게 흐려져 있었다.


그때, 대장간의 낡은 목조 문이 조용히 열리며 아벨이 걸어 들어왔다.


타릭은 붉은 수염을 휘날리며 찌푸린 눈으로 아벨을 노려보았다.


“어이, 혀 잘린 청소부 꼬맹이 아니냐? 여기가 어디라고 기어들어 와? 당장 나가라! 안 그래도 화로가 말썽이라 머리가 터질 것 같으니까!”


아벨은 타릭의 거친 호통에도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는 묵묵히 걸어가 화로 옆의 석판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소매 안쪽에서 부러진 철필을 꺼내 들었다.


타릭은 코웃음을 쳤다.


“철필은 왜 꺼내? 가축 놈이 글이라도 쓰시겠다고? 제국의 신성어는 자네 같은 놈들이 끄적거린다고 가동되는 게 아니야.”


아벨은 타릭의 말을 무시했다. 그는 자신의 검지손가락 끝을 철필의 날카로운 촉으로 찔렀다. 붉은 생혈이 흘러나와 철필 끝에 맺혔다.


아벨은 석판 바닥에 피로 글자를 새기기 시작했다.


그가 새긴 것은 제국의 복잡한 신성어가 아니었다. 그것은 완벽한 사각형의 공간적 대칭을 이룬 한글 조합식 문자였다.


초성에는 금속을 뜻하는 기하학적 형태소, 중성에는 화염의 열에너지를 강하게 유도하는 모음, 종성에는 불순물을 강제로 밀어내고 구조를 고착시키는 자음을 결합했다. 단 한 음절의 문자 블록 내에 [제련], [정렬], [안정]의 세 가지 인과율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들어갔다.


글자가 완성되는 순간, 아벨의 손끝에서 미세한 백금빛 마나의 불꽃이 피어올랐다. 피로 새겨진 한글 룬 문자가 석판 위에서 스스로 발광하기 시작한 것이다.


타릭은 망치를 쥐려던 손을 멈추고 굳어버렸다. 드워프 특유의 장인정신과 수백 년간 단련된 금속 직관이 속삭이고 있었다. 눈앞의 노예가 바닥에 갈겨쓴 기괴한 기하학적 문자는, 단순한 낙서가 아니었다. 그것은 금속의 본질적인 분자 구조를 완벽하게 제어하는, 극도로 압축된 ‘절대 문법’이었다.


“이…… 이게 무슨 미친 짓이냐? 단 한 글자로 원소의 정렬 공식을 완성했다고?”


타릭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아벨은 말없이 철필 끝으로 석판 바닥에 새겨진 룬 문자를 가리킨 뒤, 그것을 화로의 열기 유도 노드로 밀어 넣으라는 시늉을 했다.


타릭은 침을 꿀컥 삼켰다. 평소라면 하찮은 노예의 장난이라며 석판을 깨부수었겠지만, 눈앞에 흐르는 백금빛 마나의 완벽한 주파수는 그의 장인으로서의 호기심을 광적으로 자극했다.


“……좋다. 밑져야 본전이지.”


타릭은 떨리는 손으로 피의 룬이 새겨진 석판 조각을 집어 들어, 활활 타오르는 화로의 중심부 제어 노드에 조심스럽게 올려놓았다.


그 순간, 대장간 전체의 공기가 일순간 정지하는 듯한 기묘한 감각이 스쳐 지나갔다.


화로 내부에서 일어나는 변화는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지저분한 그을음을 내뿜으며 불규칙하게 흔들리던 오렌지빛 화염이, 석판에 새겨진 피의 룬과 접촉하자마자 단 찰나의 흔들림도 없이 완벽한 원형으로 정렬되기 시작했다.


화염의 색깔이 탁한 붉은색에서, 극도의 고온을 상징하는 눈부시고 투명한 푸른빛으로 변했다. 화로 내부의 마나 밀도가 기하학적으로 고정되자, 제련 중이던 흑요석 원석 내부의 불순물들이 마치 보이지 않는 미세한 칼날에 잘려 나가듯 순식간에 외곽으로 밀려나며 완벽히 정제되기 시작했다.


치이이이익!


검은 원석 내부가 거울처럼 맑고 투명한 암흑빛 결정으로 변해가며, 대장간 내부에는 드워프 제련 역사상 단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던 완벽한 순도의 제련 광휘가 흘러넘쳤다.


“아…… 아아……”


타릭은 들고 있던 쇠집게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푸른 화염의 광휘에 반사된 그의 두 눈동자가 경악과 학문적 충격으로 세차게 흔들리고 있었다.

HẾT CHƯƠ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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