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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상과의 은밀한 계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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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 9호실의 철문 고리가 거칠게 흔들리는 순간, 아벨의 심장은 얼어붙을 듯이 조여왔다.


철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레오폴드의 무거운 가죽 장화 소리는 죽음을 선고하는 사신의 발소리와 같았다. 이단 추적 나침반의 붉은 광휘가 철창 틈새로 피처럼 붉은 빛을 뿜어내며 공방 내부를 어지럽게 비추었다. 니나의 손가락 끝이 사시나무 떨리듯 흔들렸고, 마크는 식은땀을 흘리며 아벨의 ‘바르도의 오답 노트’를 가죽 주머니 깊숙이 쑤셔 넣었다.


아벨은 전신의 마나가 완전히 방전된 상태였다. 역설적 회피의 반동으로 시야는 흐릿했고, 귀에서는 고주파 이명이 끊임없이 웅웅거렸다. 하지만 그의 뇌세포는 폭주하는 엔진처럼 차갑고 정교하게 회전하고 있었다.


‘나침반은 형태소의 잔향을 쫓는다. 그렇다면 그 인지 경로 자체를 뒤틀어 파괴해야 한다.’


아벨은 왼손 검지손가락을 깨물었다. 이미 상처투성이가 된 손끝에서 검붉은 생혈이 배어 나왔다. 그는 흑요석 반지의 미세한 떨림에 혈류를 동조시키며, 철문 안쪽 경계면에 손가락을 대고 마지막 마력을 쥐어짜 문자를 새겼다.


초성 ‘ㅁ’, 중성 ‘ㅣ’, 종성 ‘ㄱ’.

그리고 ‘어지러울 미(迷)’와 ‘미궁’의 의미적 기하학적 블록.


[인지 오류(Cognitive Error)의 룬]이 철문 프레임을 따라 은밀하게 스며들었다.


철컥!


문이 열리며 레오폴드가 모습을 드러냈다. 후드 아래 가려진 그의 차가운 강철 안경 너머로 살기 어린 눈빛이 아벨을 향해 꽂혔다. 그의 오른손에 들린 나침반은 미친 듯이 바늘을 회전시키며 경보음을 울려대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4서클의 뇌전 마법이 지옥의 낙뢰처럼 쏟아질 것 같은 일촉질발의 대치였다.


하지만 아벨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품속에서 바실리우스 백작이 하사한 ‘유희 증서’를 꺼내 천천히 들어 올렸다. 은빛 가죽 증서에 새겨진 백작 가문의 붉은 인장이 횃불빛을 받아 선명하게 빛났다.


“……이것은?”


레오폴드의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그와 동시에, 아벨이 입구에 새겨둔 인지 오류의 룬이 레오폴드의 뇌 신경망에 침투했다. 나침반이 수신하는 고농축 피의 마나 주파수가, 아벨의 기만 결계에 의해 ‘백작의 유희 증서에 각인된 가문 비전의 보호 마력 잔향’으로 교묘하게 변환되어 해석되기 시작했다. 제국의 마법사들은 도구가 가리키는 데이터를 절대적인 진실로 믿기에, 레오폴드 역시 나침반의 붉은 경보가 아벨의 이단 마법이 아닌 백작 가문의 마력 인장 때문에 발생하는 오류라고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


“쳇, 바실리우스 백작의 장난감인가.”


레오폴드가 차갑게 읊조렸다. 그의 나침반 바늘이 서서히 힘을 잃고 아래로 가라앉았다. 이단 심문관 대리라는 지위가 제아무리 높다 한들, 아레나의 소유주이자 제국 상급 정치가인 백작의 정식 증서를 소지한 노예를 확실한 물증 없이 즉각 처형할 수는 없었다.


“비열한 벙어리 노예 놈이 과분한 비호를 받고 있군. 하지만 명심해라. 내 나침반이 가리키는 왜곡의 흔적은 결코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 조만간 네놈의 그 더러운 목덜미에 이단의 낙인을 찍어주마.”


레오폴드는 사납게 혀를 차며 철문을 거칠게 닫고 발소리를 멀리했다.


철문이 닫히자마자 아벨은 9호실 벽면에 기대어 스르륵 주저앉았다. 입가로 흘러내리는 검은 피를 마른 소매로 닦아내며, 그는 거친 바람 소리를 내뱉었다. 간신히 위기는 모면했으나, 수색망이 좁혀오는 속도는 상상을 초월했다. 이제 아레나를 무너뜨리고 탈출하기 위한 물리적 퇴로와 자금을 확보하는 것이 단 1초도 지체할 수 없는 최우선 과제였다.


아벨은 가쁜 호흡을 가다듬으며 마크에게 수화로 지시했다.


[빅토르가 와 있다. 대장간 배후의 비밀 밀실로 안내해라. 그가 가진 상인으로서의 탐욕을 사로잡을 무기를 보여줄 때다.]


***


아레나 지하 대장간 깊숙한 곳, 타릭이 고철 쓰레기들을 쌓아 가려둔 어둡고 은밀한 밀실.


그곳에는 아레나 칼리두스에 마석을 납품하는 제국 전역의 거상이자, 암시장 ‘회색 쥐’ 상단을 배후에서 지배하는 빅토르가 기다리고 있었다. 화려한 담비 털코트를 걸치고 손가락마다 보석 반지를 주렁주렁 낀 중년의 신사는, 퀴퀴한 고철 먼지가 가득한 밀실의 공기가 불쾌한 듯 연신 실크 손수건으로 코를 감싸고 있었다.


“바실리우스 백작이 아끼는 기괴한 벙어리 노예가 나를 보자고 한 이유가 무엇인가?”


빅토르가 금테 모노클을 만지며 오만한 태도로 아벨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눈빛에는 노예 계급을 향한 철저한 경멸과 함께, 장사꾼 특유의 날카로운 계산기가 빠르게 돌아가고 있었다.


“내 시간은 아주 비싸다네. 광산 수탈 연합과의 거래를 뒤로하고 이 더러운 쥐구멍까지 들어온 보람이 있어야 할 텐데.”


아벨은 대답 대신, 타릭이 제련대 위에 올려둔 차가운 흑요석 석판 앞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그의 걸음걸이는 빈혈로 인해 위태로웠지만, 눈빛만큼은 제국의 대마법사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을 만큼 단호하고 이지적이었다.


쉭, 쉭.


아벨은 말을 잃은 설근에서 나오는 거친 숨소리를 내며, 철필 촉 대신 자신의 상처 입은 검지손가락 끝을 석판 표면에 대었다. 그리고 검붉은 생혈로 기하학적인 문자 블록을 새겨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가 새기는 것은 제국의 장황하고 거추장스러운 에테르 아르스가 아니었다.


초성 ‘ㅈ’, 중성 ‘ㅡ’, 종성 ‘ㅇ’.

‘증(增)’과 ‘증폭’의 의미를 담은 단 한 음절의 한글 구조식 룬.


한글의 초성, 중성, 종성이 지닌 공간적 대칭성은 대기 중의 마나 원소를 O(1)의 연산 속도로 즉각적으로 한 점에 응축시키는 기적적인 효율성을 자랑했다. 제국의 마법사들이 마나 유통 효율을 높이기 위해 수십 줄의 신성어 주문을 읊조리며 마나의 50%를 허공으로 흘려버리는 동안, 아벨이 새긴 한글 음절 블록은 단 한 획의 낭비도 없이 마나의 흐름을 완벽하게 통제했다.


스스스…… 파지직!


흑요석 석판 위에서 백금빛의 맑고 정교한 스파크가 일렁이기 시작했다.


아벨은 제단 구석에 방치되어 있던, 제국 마탑에서 폐기물로 분류한 조악한 저급 마석 결정 찌꺼기 한 조각을 집어 들어 한글 룬 블록의 정중앙에 올려놓았다.


빅토르는 그 모습을 보며 콧방귀를 꼈다.


“조악한 마석 쓰레기에 이상한 낙서를 새긴다고 해서 금이 되기라도 한단 말인가? 그런 장난질은 사교계의 마술사들이나 하는 유희……”


아벨은 말없이 빅토르를 응시한 뒤, 손짓으로 그에게 마석에 마나를 주입해 보라고 신호했다.


빅토르는 비웃음을 머금은 채, 장난에 장단을 맞춰주겠다는 듯 보석 반지를 낀 손가락을 마석 찌꺼기에 대고 미세한 마나를 흘려보냈다.


그 순간, 밀실 내부의 공기가 폭발하듯 요동쳤다.


웅웅웅웅!


조악하기 짝이 없던 갈색 마석 찌꺼기 내부에서, 제국의 최상급 마석에서나 볼 수 있는 순수하고 맑은 백색의 에테르 에너지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마석의 분자 구조가 한글 구조식 룬의 완벽한 정렬 공식에 동조되면서, 내부에 잠들어 있던 미세 마나가 단 한 방울의 손실도 없이 200% 이상 폭발적으로 증폭되어 발현된 것이다.


“……하, 하앗?!”


빅토르의 금테 모노클이 바닥으로 툭 떨어지며 쨍그랑 소리를 냈다.


그의 벌어진 입술 사이로 경악 어린 신음이 새어 나왔다. 빅토르는 허리를 급히 숙여 석판 위에서 눈부신 백색 광휘를 토해내고 있는 마석 찌꺼기를 거친 손으로 움켜쥐었다. 손끝을 타고 흐르는 에테르의 밀도는 의심할 여지 없는 ‘순수 정제 마나’의 주파수였다.


“이, 이것은…… 말도 안 돼! 제국의 마탑 학자들이 수십 년간 매달려도 마석의 유통 효율은 5%를 올리기 힘들었거늘! 단 한 음절의 기하학적 문양만으로 마석의 가치를 두 배 이상 폭증시켰단 말인가?!”


빅토르의 전신이 광적인 흥분과 학문적 경악으로 사정없이 떨렸다. 장사꾼으로서의 본능이 그의 머릿속을 벼락처럼 강타했다. 제국의 고가 표준 주문 유통 독점과 비효율적인 마석 시장의 판도를 단숨에 뒤집어엎고, 대륙 전체의 부를 거머쥘 수 있는 신의 공식이 눈앞에 있었다.


그는 하대하던 태도를 완전히 버리고, 허리를 잔뜩 굽힌 채 아벨의 발밑까지 다가와 그의 검붉은 손가락을 다급하게 움켜쥐려 했다.


“말해라! 아니, 적어라! 이 공식의 정체가 무엇이냐? 누구에게 전수받은 비전이지? 내게 이 공식을 판다면, 제국 전역의 영지를 통째로 사서 네놈에게 자유민의 신분과 귀족의 작위를 주마!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말해라!”


아벨은 차가운 눈빛으로 빅토르의 탐욕에 찌든 얼굴을 응시했다. 그는 빅토르의 다급한 손길을 가볍게 뿌리치고, 옆에 서 있던 마크에게 수화로 단호하게 명령했다. 마크가 떨리는 목소리로 아벨의 뜻을 대변했다.


“주군께서 말씀하십니다. ‘제국의 작위 따위는 필요 없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단 하나, 탈출의 날에 우리 결사대원 수백 명을 아레나 외곽 국경 장벽 너머로 안전하게 우회시킬 대형 마차 5대와, 즉각 가동할 수 있는 거액의 자금이다.’”


빅토르는 침을 꿀꺽 삼키며 아벨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혀가 잘린 채 피비린내를 풍기는 노예의 눈빛은, 제국의 황제보다도 더 확고하고 거대한 지적 권위를 품고 있었다. 이 벙어리 노예는 단순한 폭도가 아니었다. 제국의 질서 자체를 뒤흔들 혁명의 설계자였다.


“……좋다.”


빅토르가 굵은 땀방울을 흘리며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상인의 직감은 이 거래가 가문의 운명을 바꿀 유일한 기회임을 확신하고 있었다.


“탈출 당일, 내 상단의 황실 공인 통행증이 부착된 대형 밀수 마차 5대를 북문 경비 초소 배후에 대기시키겠네. 그리고……”


빅토르는 품속에서 붉은 가죽으로 제본된 계약서를 꺼내 자신의 피로 서명한 뒤, 제단 밑에 숨겨두었던 묵직한 검은 철제 상자를 끌어올려 열어젖혔다.


철컥.


상자의 뚜껑이 열리자, 그 안에서 차갑고 영롱한 은빛 광휘가 쏟아져 나왔다. 상단 가문의 인장이 선명하게 새겨진 수천 개의 제국 은화 ‘데나르’가 가득 들어찬 상자였다. 용병들을 매수하고 탈출 후 바라나시의 안전 가옥을 확보하기에 충분하고도 남을 거액의 재화였다.


“비밀 계약의 대가로 선금으로 건네는 제국 은화 ‘데나르’일세. 약속을 지켰으니, 이제 그 공식의 기본 형태소 제어식을 내게 넘겨주게.”


아벨은 만족스러운 무언의 미소를 지으며, 흑요석 석판 위에 한글 구조식의 변수 제어 공식을 철필로 정밀하게 새겨 빅토르에게 건넸다.


빅토르가 떨리는 손으로 석판을 품속에 깊숙이 밀어 넣고, 은화 상자의 무거운 자물쇠를 탁 닫는 바로 그 찰나였다.


위이이이이잉——!


지하 대장간의 차가운 돌벽을 타고, 아레나 외곽 감시탑에서 발동된 기습적인 마력 경보음이 소름 끼치게 울려 퍼졌다.


철제 상자의 손잡이를 잡고 있던 빅토르의 얼굴이 일순간 핏기를 잃고 하얗게 질려갔다. 아벨의 오른쪽 눈동자가 미세하게 푸른빛으로 회전하며, 대장간 외부에서 들려오는 날카로운 마찰음과 군화 소리를 형태소 단위로 스캔해 냈다.


[경보! 북문 외곽 유통로 차단! 레오폴드 심문관 대리의 직속 수색조가 진입했다! 암시장 상단의 마차들을 강제 검문한다! 수색조는 마석 상자 내부를 전부 파괴해서라도 이단의 흔적을 찾아내라!]


대장간 외곽에서 쇠창살이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레오폴드의 정예 수색조가 빅토르가 대기시켜 둔 비밀 밀수 마차들의 가죽 천막을 거칠게 찢어발기며 검문하기 시작했다는 다급한 외침이 밀실 내부까지 무겁게 울려 퍼졌다.

HẾT CHƯƠ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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