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가오는 이단 심문의 그림자
크로이츠의 시체가 무거운 고철 더미에 묶여 지하 하수도의 검은 탁류 속으로 완전히 가라앉은 지 불과 몇 시간 후, 아레나 칼리두스의 지하 감옥에는 싸늘한 아침 안개와 함께 무거운 정적이 찾아왔다.
지하 9호실의 젖은 벽에 등을 기댄 아벨은 격렬한 기침과 함께 입안을 가득 채운 비린 핏덩이를 바닥에 뱉어냈다. 전신의 마나 회로는 완전히 타버린 잿더미처럼 차갑게 식어 있었고, 단 1%의 마력조차 연산할 수 없을 정도로 극심한 마비통이 척추를 타고 흘러내렸다. 전날 밤, 크로이츠의 치명적인 채찍을 피하기 위해 전개했던 궁극의 보명기, ‘역설적 회피(Paradoxical Evasion)’의 반동이었다. 뇌세포가 타들어 가는 듯한 고열과 귀를 찢는 이명 속에서, 아벨은 왼손 검지손가락을 내려다보았다. ‘응고 방지 흑요석 반지’의 검은 표면에는 전날 밤의 과부하로 인해 실금 같은 균열이 한 줄기 더 깊고 길게 패여 있었다. 당분간 무리하게 피의 룬을 시전했다간 반지 자체가 완파되거나, 그의 심장 마나 회로가 영구적으로 붕괴할 터였다.
“쉭…… 쉭……”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성대를 쥐어짜며 아벨이 거친 바람 소리를 내자, 어두운 감방 구석의 그림자 속에서 두 명의 수하가 소리 없이 다가왔다. 스크롤 제작 보조를 맡은 여성 노예 니나와 기록관 마크였다. 그들의 손에는 아레나 주방에서 카밀라가 몰래 빼돌려 무두질한 조악한 짐승 가죽지 더미와 검은 마력 잉크 항아리가 들려 있었다.
마크는 아벨의 상태를 살피며 황급히 손가락으로 무언의 수화를 새겼다.
[주군, 제라드 의사에게서 받은 마력 조율 침으로 임시 치료를 받았으나 몸을 더 움직이셔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시간이 없습니다. 간수실 쪽 첩보에 따르면, 크로이츠와 그의 부하들이 아침 점호에 미복귀한 것을 두고 프란츠 간수장이 극비리에 대대적인 수색령을 내렸습니다. 게다가…… 제국 마법의회 변방 지부에서 최악의 사냥꾼을 급파했다고 합니다.]
아벨의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올가와 바르도의 기록을 통해 익히 들었던 존재. 제국 마법의회의 신성어 독점 체제를 위협하는 모든 ‘이단 번역가’들을 사냥해 혀를 자르고 처형하는 냉혹한 수사관, 이단 심문관 대리 레오폴드가 마침내 아레나에 당도했다는 뜻이었다. 레오폴드가 이끄는 수사관들은 마나의 미세한 왜곡을 역탐지하는 특수 마도 도구를 지니고 있었다. 크로이츠가 처단당할 때 흘러나온 미세한 마나 잔향과 침묵의 룬 흔적이 발각되는 순간, 아레나 내부의 노예 결사대는 물론이고 외부의 이단 번역 동맹까지 모조리 사형대에 오르게 될 터였다.
아벨은 가쁜 숨을 가다듬으며 마크에게 수화로 단호하게 지시했다.
[도망칠 곳은 없다. 결계가 닫혀 있는 한 우리는 갇힌 쥐다. 레오폴드가 수색망을 좁혀오기 전에, 일반 노예들도 즉시 화염 마법을 가동할 수 있는 무기를 쥐여주어야 한다. 니나, 마크. 요한의 활판 인쇄 기술을 대입해 보급형 스크롤 제작을 개시해라. 내 피를 희석한 잉크를 가죽지에 모사해야 한다.]
니나는 긴장으로 침을 꿀꺽 삼키며 아벨의 피가 담긴 정제용 항아리를 열었다. 아벨이 미리 자신의 생혈을 특수 조혈 약초 즙과 정제 소금 촉매에 희석해 둔 특제 마력 잉크였다. 니나는 섬세한 손가락끝으로 목판 활자 도장을 잉크에 적신 뒤, 얇은 짐승 가죽지 표면에 대고 일정한 압력으로 꾹 눌렀다.
스스스.
가죽지 위에 찍혀 나온 글자는 제국의 길고 장황한 에테르 아르스 주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현대 한국어의 기하학적 형태론을 대입한 단 한 음절의 문자 블록.
초성 ‘ㅂ’, 중성 ‘ㅏ’, 종성 ‘ㄹ’.
그리고 초성 ‘ㅎ’, 중성 ‘ㅘ’.
단 두 글자, ‘발화(發火)’의 음절 블록이었다.
제국의 마법사들이 3서클 화염 장벽을 만들기 위해 수십 줄의 신성어를 오만하게 늘어놓으며 영창하는 동안, 이 보급형 스크롤은 마법 지식이 전혀 없는 일반 노예라도 양손으로 찢어 던지기만 하면 대기 중의 화염 원소를 즉각적으로 동기화해 화염 폭풍을 발현시킬 수 있는 혁명적인 무기였다. 한글의 초성, 중성, 종성이 지닌 공간적 대칭성이 마나의 주파수를 O(1)의 연산 속도로 즉시 정렬시키기 때문이었다.
마크는 아벨이 벽면에 그어둔 마법 수식 도안을 보며, 잉크가 번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가죽지를 말렸다. 건조대 위로 수십 장의 검붉은 스크롤이 차례로 정렬되었다. 하지만 아벨의 피가 지닌 고유한 마나 향기가 밀폐된 지하 감방 내부의 공기를 서서히 메우기 시작했다. 흑요석 반지가 미세하게 진동하며 피의 증발을 막으려 애썼으나, 대량의 스크롤이 생산되면서 발생하는 마나의 잔향은 쉽게 숨길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철컥, 철컥, 철컥.
그때, 지하 감옥 복도 저편에서 강철 군화가 돌바닥을 사납게 짓밟는 위압적인 발소리가 울려 퍼졌다. 횃불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지며, 음산한 기운이 복도 전체를 얼려버릴 듯 스며들었다.
제국 마법의회 변방 지부의 사냥꾼, 레오폴드가 마침내 지하 감옥 구역에 진입한 것이었다.
얼굴을 검은 후드로 가린 채, 붉은 십자가가 선명하게 새겨진 사제 로브를 입은 사내가 9호실 복도 한가운데에 멈춰 섰다. 레오폴드였다. 그의 차가운 강철 안경 너머로 번뜩이는 눈빛은 한 치의 자비도 찾아볼 수 없는 광신적인 이단 심문관의 그것이었다. 그의 오른손에는 이단의 마법 흐름을 탐지해 붉게 빛나는 ‘이단 추적의 나침반’이 들려 있었다.
나침반 내부의 흑요석 바늘이 불규칙하게 떨리며 복도 바닥과 벽면에 남겨진 미세한 마나 흔적을 역탐지하고 있었다. 크로이츠가 사망하기 직전, 아벨의 침묵 룬과 역설적 회피가 전개되면서 뒤틀렸던 공간의 주파수 흔적이었다.
“……이상하군.”
레오폴드가 차가운 음성을 낮게 뱉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성대에 깃든 마나의 권위가 실려 있어, 주변의 공기가 미세하게 진동했다.
“이 구역의 마나 밀도가 비정상적으로 왜곡되어 있다. 에테르 아르스의 규칙적인 순환이 아니야. 인위적으로 형태소를 쪼개어 공간을 구속한 흔적…… 실로 사악하고 교묘한 이단 번역의 흔적이로군.”
그가 나침반을 허공에 치켜들자, 나침반의 흑요석 침이 서서히 회전하더니 아벨과 수하들이 숨어 있는 지하 9호실의 두꺼운 철문을 정확히 가리켰다. 나침반 표면의 붉은 보석들이 불길한 경보 빛을 미세하게 내뿜기 시작했다.
철문 너머 지하 공방 내부의 공기가 일순간 얼어붙었다. 니나의 손에 들린 목판 활자가 달달 떨렸고, 마크는 공포로 하얗게 질린 채 아벨의 ‘바르도의 오답 노트’와 기밀 암호 기록들을 황급히 가죽 주머니 속에 깊숙이 밀어 넣었다.
레오폴드의 발소리가 9호실 문앞을 향해 한 걸음씩 다가왔다.
서벅. 서벅.
아벨은 전신의 마나가 완전히 방전된 상태였다. 정면으로 마주치는 순간, 레오폴드의 4서클 신성어 낙뢰 마법 한 발에 지하 공방 전체가 잿더미로 변할 터였다. 아벨은 이를 악물고 차가운 지성을 쥐어짜냈다.
‘적의 나침반은 마나의 고유 주파수를 추적한다. 우리가 제작 중인 스크롤의 피의 잔향과 결계 흔적을 감지한 거다. 여기서 단순히 마나를 차단하려 장막을 치는 것은 오히려 ‘마나의 공백’이라는 거대한 흔적을 남겨 적의 의심을 확신으로 바꿀 뿐이다. 차단하는 것이 아니라, 번역해야 한다.’
아벨은 자신의 오른손 검지손가락 끝의 굳은살을 다시 한번 세차게 깨물었다. 쉭 소리와 함께 핏방울이 배어나왔다. 그는 흑요석 반지의 미세한 진동을 이용해 손가락 끝을 허공에 대고 신속하게 문자를 그리기 시작했다.
초성 ‘ㅁ’, 중성 ‘ㅣ’, 종성 ‘ㄱ’.
그리고 ‘어지러울 미(迷)’와 ‘미궁’의 의미적 형태소를 조합한 기하학적 블록.
[인지 오류(Cognitive Error)의 룬]이었다.
아벨은 이 미세한 룬의 마나 파동을 허공에 얇게 살포했다. 이 룬은 나침반의 탐지 파동을 차단하지 않았다. 대신, 나침반이 수신하는 마차와 스크롤의 피비린내 나는 마나 주파수를 바로 옆방인 타릭의 고철 쓰레기장에서 흘러나오는 ‘일반 고철의 무질서한 마나 잔향’이라는 가짜 데이터로 변환하여 굴절시켰다. 의미의 왜곡을 통한 완벽한 인지 기만이었다.
파지직!
철문 바로 앞까지 다가왔던 레오폴드가 우뚝 멈춰 섰다.
그의 오른손에 들린 이단 추적 나침반의 침이 갑자기 미친 듯이 회전하더니, 9호실 철문이 아닌 그 옆에 위치한 고철 폐기장 창고 벽면을 향해 홱 돌아섰다. 나침반 표면의 붉은 보석들이 뿜어내던 불길한 경보 빛이 일순간 노란색의 일반 잔향 신호로 흐려졌다.
“……방향이 바뀌었나? 이단의 마나 흔적이 옆방의 고철 무더기 속으로 흘러 들어갔군.”
레오폴드는 안경을 치켜올리며 철문에서 시선을 거두었다. 그의 차가운 이성은 나침반의 기계적인 데이터를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진실로 받아들였다. 제국의 마법사들은 신성어의 규격화된 수식만을 믿기에, 그 수식 자체를 해킹하는 아벨의 인지 왜곡 마법을 상상조차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경비병들, 옆방의 고철 창고를 철저히 수색해라. 이단자들이 숨겨둔 마도 도구의 잔해가 그곳에 있을 것이다.”
“예, 심문관 대리님!”
무거운 군화 소리가 철문 앞을 벗어나 옆방으로 멀어졌다. 철문 너머에서 니나와 마크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아벨 역시 극심한 뇌 과열로 인한 고주파 이명과 귀에서 흘러내리는 미세한 피를 닦아내며 안도의 호흡을 내쉬었다. 적의 도구적 맹점을 이용해 일시적인 수색 방향 비틀기에는 성공한 것이다.
하지만 위기는 끝나지 않았다. 수색망은 더욱 촘촘해질 것이고, 프란츠 간수장은 곧 아레나 전체 노예들의 마나 전도율을 전수 조사하겠다고 나설 터였다. 탈출의 시간은 이제 모래시계의 마지막 모래알처럼 빠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주군…… 마지막 스크롤의 건조가 끝났습니다.”
니나가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이며, 아벨의 생혈 희석 잉크가 완벽하게 마른 마지막 ‘마력 유통 스크롤 (보급형)’을 조심스럽게 건조대에서 내려놓았다. 붉은 가죽지 표면에 새겨진 백금빛 한글 구조식 활자가 완벽한 대칭을 이루며 조용히 숨을 쉬듯 일렁였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마지막 스크롤의 마나 회로가 완벽하게 닫히며 자가 안정화 단계에 접어들자, 잉크 속에 내포되어 있던 아벨의 고순도 피의 마나가 찰나의 순간 외부로 강한 공명 파동을 뿜어냈다.
스스스…… 파지직!
옆방으로 향하던 레오폴드의 발소리가 우뚝 멈췄다.
감옥 외곽 복도의 차가운 정적 속에서, 레오폴드의 손에 들린 이단 추적 나침반이 이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광포한 진동을 일으켰다. 나침반 표면의 붉은 보석들이 눈이 멀 것 같은 핏빛 경보 광휘를 폭발적으로 뿜어내며, 정확히 아벨이 숨은 지하 9호실의 철문을 가리켰다.
레오폴드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아벨의 철문을 응시했다. 그의 강철 안경 표면 위로 나침반의 붉은 경보 빛이 피처럼 붉게 반사되었다.
“……찾았군.”
차가운 사냥꾼의 발소리가 다시 한번 아벨의 철문을 향해 느릿하게 방향을 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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