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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 속의 채찍을 꺾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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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각, 또각.


신성어 유출 방지 감시관 클라라의 가죽 구두 굽 소리가 서가 모퉁이를 돌기 직전, 아벨은 왼손 검지손가락에 끼워진 흑요석 반지를 낀 손가락을 꽉 움켜쥐었다.


체내의 마나가 5% 미만으로 떨어져 바닥을 긁고 있는 극도의 방전 상태. 머리가 깨질 듯한 현기증과 황실 금서의 보호 주술이 가한 정신적 반동으로 인해 눈앞의 글자들이 괴상하게 뒤틀려 보이는 난독증이 아벨의 온 신경을 마비시키려 하고 있었다. 귓가에는 웅웅거리는 이명이 폭풍처럼 몰아쳤다.


하지만 아벨은 이빨을 악물고 붉은 생혈이 흐르는 검지손가락 끝을 금서의 가죽 표지 위에 짓눌렀다. 흑요석 반지가 차가운 미세 진동을 일으키며 피의 응고를 지연시키는 사이, 아벨은 허공에 한국어의 기하학적 대칭 구조를 투영해 나갔다.


초성 ‘ㅅ’, 중성 ‘ㅗ’, 종성 ‘ㅁ’.

그리고 ‘막을 막(幕)’ 자의 의미적 구조를 사각형 블록 안에 압축한 기하학적 각인.


[소음 차단 룬]과 [인지 오류 룬]의 이중 중합 결계가 찰나의 순간 완성되며 대기 중의 마나 주파수를 강제로 변조했다. 클라라의 손에 들린 금서 탐지 보주가 뿜어내던 불길한 붉은 광휘가 아벨의 책상 바로 앞에서 거짓말처럼 차가운 푸른빛으로 정화되며 스르르 가라앉았다.


서가 모퉁이를 돌아서 아벨을 내려다본 클라라의 눈에는, 제국의 역사를 부정하는 금서가 아닌 조잡한 삼류 연애소설을 읽고 있는 한심한 노예의 모습만이 비쳤다.


“……흥, 백작이 아끼는 기괴한 벙어리 검투사라더니. 도서실 제한 구역까지 들어와 고작 이런 쓰레기 책이나 뒤적거리고 있었군.”


클라라는 역겹다는 듯 콧방귀를 뀌며 발길을 돌렸다. 구두 굽 소리가 서서히 멀어지는 것을 들으며, 아벨은 참았던 숨을 길게 내쉬었다. 서가 구석에서 빗자루를 쓸던 늙은 사서 올가가 무언의 눈짓으로 도서실 뒷문을 가리켰다. 아벨은 올가에게 깊은 감사의 눈빛을 보낸 뒤, 품속에 해독한 문법 공식을 품은 채 그림자처럼 도서실을 빠져나왔다.


***


그날 밤, 아레나 칼리두스 최하층에 위치한 지하 9호실.


사방의 석회 벽면에는 아벨이 그동안 피로 연습하고 지웠던 기하학적 룬 문자의 희미한 흔적들이 검붉은 이끼처럼 엉겨 붙어 있었다. 아벨은 차가운 돌바닥에 주저앉아 조혈의 영초 ‘루마 헤르바’의 잔향을 삼키며 마나 회로를 안정시키려 애쓰고 있었다.


낮 동안의 금서 해독과 기만 결계 시전의 여파로 인해 그의 몸은 뼈마디가 시려오는 저체온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흑요석 반지의 표면에는 과부하로 인한 미세한 실금이 한 줄기 더 깊게 패여 있었다.


스스스.


감옥 창살 너머 어둠 속에서 소리 없는 그림자가 스며들었다. 결사대의 정예 암살자이자 그림자의 수호자인 록산느였다. 그녀는 검은 가죽 옷을 입고 붉은 입술을 굳게 다문 채, 아벨의 앞에 소리 없이 무릎을 꿇었다. 그녀의 두 눈동자에는 평소의 냉혹함 대신 팽팽한 긴장감이 서려 있었다.


록산느는 아벨의 손바닥 위에 손가락 끝으로 신속하게 무언의 수화를 새겨 나갔다.


[크로이츠가 움직입니다. 율리우스의 자폭과 아레나 대화재로 가문에서의 입지가 완전히 끝장나자, 미쳐버린 모양입니다. 백작과 간수장 몰래 정예 간수들을 사적으로 규합했습니다. 오늘 밤, 이 지하 9호실을 기습해 당신의 목을 베고 이단 주술의 증거를 조작해 가문에 바치려 합니다.]


아벨의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크로이츠. 아벨의 부족을 멸망시키고, 노예로 끌고 와 그의 혀를 직접 잘라버린 악랄한 채찍 간수. 말을 잃고 침묵 속에서 피눈물을 흘려야 했던 노예 시절의 처절한 트라우마가 아벨의 가슴 깊은 곳에서 거친 살기로 화해 끓어올랐다. 지배층의 오만한 폭력 아래 침묵해야 했던 시대는 끝났다. 이제는 그 채찍을 부러뜨릴 시간이었다.


아벨은 성대 깊은 곳에서 쉭쉭거리는 거친 바람 소리를 내며 록산느에게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녀가 망령의 계곡에서 수거해 온 상급 어둠 마수의 정강이뼈 단검—[침묵의 뼈 단검]을 받아 들었다.


아벨은 망설임 없이 자신의 검지손가락 끝을 찔렀다. 붉은 생혈이 흑요석 반지의 진동을 타고 뼈 단검의 하얀 날 표면 위로 흘러내렸다. 아벨은 철필 대신 손가락 끝으로 단검 날에 정교하게 한글 자모음을 새겼다.


초성 ‘ㅅ’, 중성 ‘ㅣ’, 종성 ‘ㅁ’.

그리고 ‘잠잠할 침(沈)’과 ‘침묵’의 의미적 형태소를 조합한 기하학적 블록.


검붉은 피의 선들이 단검의 뼈 조직 내부로 스며들며 은은한 백금빛의 룬 각인으로 고착되었다. 단검을 쥔 록산느의 손끝에서부터 주변 반경 2미터 이내의 공기 진동이 일순간 정지하는 기묘한 정적이 감돌았다. 물리적 타격음과 비명 소리 자체를 차단하는 암살 무기가 완성된 것이다.


아벨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지하 9호실 입구의 낡은 목재 문틀과 통로 바닥에 자신의 남은 피를 뿌려 거대한 [소음 차단 룬]을 넓게 살포했다. 잔여 마나가 극한으로 소모되면서 아벨의 호흡이 가빠지고 가슴이 조여왔지만, 그는 차가운 이성으로 결계의 주파수를 아레나의 대기 진동과 완벽히 동조시켰다. 이 영역 내부에서 벌어지는 그 어떤 혈투의 소리도 외부 경비병들의 귀에 닿지 않을 터였다.


“얀은 복도 대기 구역에서 대기하라. 소음 유발 우려가 있으니 정면 돌파 대신 록산느의 무음 은신 암살을 주력으로 가동한다.”


아벨은 수화로 얀의 끓어오르는 혈기를 진정시킨 뒤, 록산느에게 눈짓을 보냈다. 록산느는 무언의 경의를 표하며 단검을 역수로 쥐고 감옥 복도의 짙은 어둠 속으로 완전히 녹아들었다.


기다림은 길지 않았다.


통로 저편에서 어두운 횃불 그림자가 흔들리며 무거운 군화 소리가 다가왔다. 아레나 칼리두스 운영단의 정예 사설 간수들이 칼을 뽑아 든 채 복도를 좁혀오고 있었다. 그들의 선두에는 피 묻은 가죽 채찍을 허리에 찬 크로이츠가 살기 어린 눈빛을 번뜩이고 있었다.


간수들의 발소리가 아벨이 설치한 소음 차단 결계의 경계선을 넘는 순간.


스윽.


거짓말처럼 모든 소리가 대기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소멸했다. 군화가 돌바닥을 긁는 소리, 철제 갑옷이 부딪치는 소리, 심지어 그들의 거친 숨소리마저 완벽한 진공 상태처럼 사라졌다. 간수들은 이상함을 눈치채기도 전에 좁은 복도의 어둠 속에서 죽음의 사신을 맞이했다.


쉭!


그림자 속에서 실루엣을 드러낸 록산느가 바람보다 빠르게 선임 간수의 배후를 파고들었다. 그녀의 손에 들린 침묵의 뼈 단검이 간수의 목덜미를 정확하게 관통했다.


경추가 부러지고 살점이 찢어지는 둔탁한 타격음이 발생해야 할 찰나였으나, 단검의 침묵 효과와 공간 결계가 겹쳐진 반경 내에서는 오직 정적만이 지배했다. 뿜어져 나오는 붉은 피가 복도 벽면을 적셨지만, 그 어떤 비명도, 신음도 터져 나오지 못했다. 간수는 자신의 목을 움켜쥔 채 눈동자를 뒤집으며 소리 없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


옆에 있던 간수가 동료의 쓰러짐을 보고 경악하며 허리춤의 검을 뽑아 휘둘렀다. 검날이 공기를 가르는 날카로운 파열음이 일어야 했으나, 무음 결계는 대기의 진동 자체를 문법적으로 구속해 상쇄하고 있었다. 완벽한 무성영화 속의 한 장면처럼, 록산느는 가볍게 검격을 흘려보내며 침묵의 단검으로 기사의 심장을 꿰뚫었다.


금속과 금속이 부딪치는 불꽃은 튀었지만 소리는 없었다. 적들이 시전하려던 하급 신성어 방어 주문은 무음 영역 내부에서 발성 주파수를 잃고 의미론적 모순을 일으키며 허무하게 바스러졌다. 아벨은 벽에 기대어 흐릿해지는 시야 속에서도 [언어학적 직관]을 가동해 적들의 마나 흐름을 실시간으로 분해하며 록산느의 암살 궤적을 보조했다.


간수들이 단 한 마디의 경보도 울리지 못한 채, 어둠 속으로 차례차례 쓰러져 갔다.


비명조차 허락되지 않는 침묵의 도살장 속에서, 붉은 피가 바닥의 오물과 섞여 검은 강을 이루었다. 록산느의 단검 끝에서 흐르는 피가 차가운 정적을 더욱 짙게 물들였다.


그리고 마침내, 복도 끝에는 크로이츠 한 사람만이 남았다.


뒤를 따르던 정예 부하들이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진 것을 눈치챈 크로이츠가 급히 횃불을 높이 치켜들었다. 횃불의 붉은 불꽃이 흔들리며 비춘 것은, 피비린내만이 자욱한 정적의 지옥이었다. 자신의 부하들이 목이 꺾이고 심장이 뚫린 채 바닥에 뒹굴고 있는 처참한 광경.


크로이츠의 얼굴이 경악과 원초적인 공포로 일그러졌다. 그는 본능적으로 이 기괴한 정적이 아벨의 이단 마법임을 직감했다.


크로이츠는 살기 서린 눈을 부릅뜨며 허리춤에서 전기가 흐르는 마력 채찍을 거칠게 뽑아 들었다. 채찍 끝에서 푸른 뇌전 스파크가 사납게 날뛰었지만, 그 폭음마저 아벨의 결계에 가로막혀 기괴한 묵음의 스파크로 일렁일 뿐이었다. 크로이츠는 피비린내를 깊게 들이마시며, 복도 끝 지하 9호실 문앞에 서 있는 아벨을 향해 살기 어린 가죽 채찍을 곧장 치켜들었다.

HẾT CHƯƠ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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