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문의 천재, 스스로 파멸하다
백색의 광휘가 경기장 전체를 집어삼켰다.
중앙 콜로세움의 모래밭 한가운데에서 일어난 충돌은 단순한 마력과 마력의 부딪침이 아니었다. 그것은 수천 년간 제국을 지배해 온 장황한 선형적 마법 언어 ‘에테르 아르스’와, 현대 한국어의 공간 분할 구조를 이식한 기하학적 ‘한글 구조식 룬’이 벌이는 격렬한 체계의 전쟁이었다.
“콰아아아아아아!”
율리우스가 시전한 5서클 광역 화염 마법 ‘퓌로스 오블리비오’의 붉은 화염 폭풍이 아벨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하지만 그 불길은 아벨이 바닥에 새겨둔 백금빛 한글 장벽에 부딪히는 순간,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하고 좌우로 찢겨 나갔다.
아벨은 모래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입안 가득 고여 드는 피비린내를 삼켰다. 전신의 마나가 10% 미만으로 떨어지며 심장을 쥐어짜는 듯한 빈혈이 몰려왔다. 우안에 장착한 ‘모노클 오브 트루스’ 너머로 보이는 세상은 붉은색과 백색의 마나 선들이 어지럽게 뒤엉켜 요동치고 있었다. 시신경이 타들어 가는 듯한 극통에 오른쪽 눈가에서 다시 한번 붉은 피눈물이 흘러내렸다.
하지만 아벨의 뇌세포는 멈추지 않았다. [언어학적 직관]은 찰나의 순간에도 율리우스의 주문을 형태소 단위로 분해하고 있었다.
‘율리우스의 주문은 과부하 상태다. 가문의 권위를 과시하기 위해 억지로 쑤셔 넣은 불필요한 장식적 접두사와 어근의 중복이 마나의 흐름을 왜곡하고 있어. 종결 노드가 흔들린다.’
아벨은 왼손 검지손가락에 끼워진 ‘응고 방지 흑요석 반지’를 움켜쥐었다. 반지가 가쁜 진동을 일으키며 그의 생혈이 공기 중에서 굳는 것을 막아주었다. 아벨은 부러진 철필 끝을 자신의 손가락 상처에 다시 한번 깊게 찔러 넣었다. 철필 촉이 마나 과부하로 미세하게 삐걱거렸지만, 그는 개의치 않고 허공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가 새기려는 것은 단 두 글자, ‘반(反)’과 ‘사(射)’의 음절 블록이었다.
한글은 초성, 중성, 종성이 하나의 네모난 공간 안에 기하학적으로 대칭을 이루며 결합한다. 선형적으로 주문을 길게 나열하여 발음해야만 작동하는 제국의 언어와 달리, 한글 구조식 룬은 단 한 음절의 공간 안에 [속성], [형태], [작용]을 동시에 압축한다.
아벨이 허공에 그은 피의 궤적이 찬란한 백금빛 사각형 블록으로 응축되며 율리우스의 화염 주문의 종결 어미를 해킹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바로 바르도의 오답 노트에서 도출해 낸 ‘역설적 마나 상쇄 규칙’의 실전 적용이었다.
“……하앗?! 마나가…… 왜 통제되지 않는 거지?!”
허공에 부유하고 있던 율리우스의 눈동자가 경악으로 물들었다.
자신이 쥔 적염의 루비 지팡이 끝에서 뿜어져 나가야 할 화염 에너지가, 아벨이 전개한 백금빛 장벽에 가로막힌 채 기이한 불협화음을 내며 찌그러지고 있었다. 아벨이 주입한 ‘반사’의 주파수가 율리우스의 주문 속에 내포된 문법적 모순—온도 제어 어근과 수식어 사이의 흔들리는 노드—을 파고들어 인과율을 강제로 역전시킨 것이다.
“퓌로스…… 인디케…… 아페리!”
율리우스는 어떻게든 주문의 제어권을 되찾기 위해 영창 속도를 무리하게 끌어올렸다. 성대를 쥐어짜며 에테르 아르스의 발음을 고속으로 뱉어냈으나, 그것은 파멸을 촉진하는 자멸수였다. 발음이 미세하게 꼬이는 순간, 아벨이 설계한 역설적 장막이 율리우스의 지팡이와 마나 회로를 완전히 동조시켜 버렸다.
“콰과과광!”
“아아아아악!”
지팡이 끝에 응축되어 있던 엄청난 규모의 5서클 화염 마나가 갈 곳을 잃고 역설적으로 율리우스의 마나 회로로 역류했다. 그의 손끝에서부터 시작된 푸른 화염이 팔을 타고 올라가 전신을 집어삼켰다. 가문의 성물인 루비 지팡이가 과부하를 견디지 못하고 산산조각 나며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자신이 일으킨 불꽃에 스스로 갇힌 제국의 천재 마법사는 처절한 비명과 함께 대폭발을 일으켰다. 콜로세움 한가운데에 거대한 화염 버섯구름이 솟아올랐고, 율리우스의 육체는 단 한 줌의 재도 남기지 못한 채 공중에서 완벽히 폭사했다.
화염의 잔상이 바람에 흩어지자, 수만 명의 관중이 들어찬 콜로세움 전체에 유례없는 정적이 내려앉았다.
아무도 말을 잇지 못했다. 제국 마법의회가 공인한 10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천재 마법사가, 혀가 잘려 영창조차 할 수 없는 최하급 노예의 기이한 침묵 마법에 걸려 스스로 폭사했다는 사실을 누구도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 이단이다!”
정적을 깨뜨린 것은 경기장 연단 아래에 서 있던 프란츠 간수장의 분노에 찬 포효였다.
철제 갑옷을 입은 거구의 간수장은 온몸을 부르르 떨며 황금 반지가 박힌 손으로 아벨을 가리켰다. 그의 눈가에 새겨진 굵은 칼자국이 핏발과 함께 붉게 달아올랐다.
“혀 잘린 가축 놈이 사악한 이단 주술로 명문가의 자제를 살해했다! 경비대, 즉시 저 벙어리 놈과 공범인 야수 놈을 현장에서 즉각 처형하라!”
간수장의 서슬 퍼런 명령과 함께, 콜로세움 사방의 철문이 열리며 검과 창으로 무장한 아레나 경비병들이 노도처럼 모래밭으로 진입했다. 수십 명의 경비병들이 아벨과 가르크를 향해 포위망을 좁혀왔다.
“오오오오오!”
가르크가 사자 갈기 같은 황금빛 머리칼을 휘날리며 아벨의 전방을 막아섰다. 그는 아벨이 새겨준 ‘예리의 룬’이 웅웅거리는 거대한 배틀액스를 고쳐 잡으며, 경비병들을 향해 야수적인 포효를 내지르고 대치했다.
아벨은 전신의 마나가 완전히 고갈되어 손끝 하나 까닥할 힘도 없었다. 입가에 흐르는 피를 닦아낼 여력조차 없이, 그는 가르크의 넓은 등 뒤에서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가르크가 아무리 최강의 전사라 해도, 마법 결계가 작동하는 아레나 내부에서 무장한 군대와 정면 승부를 벌이는 것은 자살 행위였다. 아벨은 떨리는 손을 들어 가르크의 가죽 옷자락을 살짝 잡아당겼다. 무리하게 싸우지 말고 기회를 보라는 무언의 신호였다.
그 순간, 하늘 위 귀빈석에서 묵직한 목소리가 확성 마법을 타고 콜로세움 전체를 울렸다.
“멈춰라, 프란츠!”
바실리우스 백작이었다.
화려한 비단 옷을 입고 보석 반지를 주렁주렁 낀 백작이 난간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의 간사하면서도 날카로운 눈빛은 쓰러질 듯 서 있는 아벨의 전신을 샅샅이 훑고 있었다. 백작의 머릿속은 이미 주판알을 튕기느라 바쁘게 가동되고 있었다.
‘율리우스 가문의 천재를 단 침묵의 룬 몇 개로 자폭시켰다라…….’
백작은 철저한 기회주의자이자 물질만능주의자였다. 율리우스 가문의 명예 실추나 마법의회의 규율 따위는 그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가 본 것은 오직 하나, 아벨이라는 존재가 지닌 천문학적인 가치였다. 혀가 잘린 노예가 목소리 없이 제국의 대마법을 파쇄하는 이 기괴한 능력을 잘만 포장한다면, 사교계의 권력 구도를 뒤흔들고 자신에게 막대한 재화를 안겨줄 최고의 ‘사유재산’이 될 터였다.
백작은 확성 마법의 출력을 높이며 단호하게 선언했다.
“저 노예는 아레나 칼리두스의 정당한 검투사이며, 내 영지 법률에 의거한 사유재산이다. 결투 중 일어난 마법의 오작동과 사고는 아레나의 규칙에 따라 처리되어야 한다. 내 허가 없이 저들을 처형하는 것은 영주의 재산권을 침해하는 행위다!”
“백작님! 하지만 저놈은 명백히 사악한 주술을 부렸습니다!”
프란츠 간수장이 고개를 들어 귀빈석을 향해 소리쳤다. 그의 황금 반지가 분노로 붉게 일렁였다.
“이것은 단순한 사고가 아닙니다! 제국의 신성한 에테르 아르스를 왜곡하고 이단적인 문자를 사용해 마법을 해체했습니다! 이 사실이 마법의회에 알려진다면 영지 전체가 무사하지 못할 것입니다!”
“시끄럽다, 프란츠!”
백작이 차갑게 말을 잘라냈다.
“마법의회와의 조율은 영주인 내가 할 일이다. 그리고 저 노예의 연승으로 인해 오늘 우리 상단이 거둬들인 도박 판돈과 황실 세수 기여도가 얼마인지 잊었느냐? 저들의 사형 집행을 보류하고 즉시 지하 감옥으로 이송하라. 원인 규명은 내가 직접 임명한 학자들을 통해 진행할 것이다.”
영주의 절대적인 권위와 경제적 논리 앞에 프란츠 간수장은 이빨을 갈았다. 그의 손에 쥔 철퇴가 미세하게 떨렸으나, 결국 백작의 호위 기사 가르시아가 검을 거두는 모습을 보고는 경비병들에게 손짓했다.
“……무기를 거둬라. 저놈들을 지하 감옥 깊은 곳에 격리해라.”
경비병들이 칼날을 거두며 한 걸음 물러섰다. 가르크는 배틀액스를 내리며 아벨을 조심스럽게 부축했다. 아벨은 멀어지는 의식 속에서도 귀빈석의 백작을 올려다보았다. 백작의 눈빛은 따뜻한 구원자의 그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가장 진귀한 보물을 발견한 탐욕스러운 수집가의 눈빛이었다.
‘바실리우스 백작…… 나를 살려둔 것을 후회하게 만들어 주마.’
아벨은 속으로 차갑게 중얼거리며 눈을 감았다.
경비병들에게 이끌려 아벨과 가르크가 콜로세움 통로 너머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순간, 프란츠 간수장은 제단 구석으로 걸어갔다. 그의 눈동자는 분노를 넘어 차가운 확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아벨이 모래바닥에 새겨두었던 피의 문자 흔적을 유심히 내려다보았다. 백금빛은 사라졌지만, 모래알 사이에 고착된 기하학적 형태의 핏자국은 제국의 그 어떤 마법 진과도 닮지 않은 이질적인 문법을 대변하고 있었다.
‘이것은 단순한 마력 폭주가 아니다. 제국의 질서를 뿌리째 뒤흔들 고도의 이단 마법이다. 백작 놈은 탐욕에 눈이 멀어 괴물을 살려두는구나.’
프란츠 간수장은 품속에서 마력이 깃든 은빛 양필지와 깃펜을 꺼내 들었다. 그는 아벨의 기이한 피의 문자 형태를 정밀하게 모사해 적어 내려갔다.
이것은 아레나 내부의 규율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제국 마법의회의 이단 심문관들이 직접 전면에 나서야 할 사안이었다. 간수장은 서신을 작성한 뒤, 황금 반지를 활성화해 이단 심문관에게 긴급 서신을 전송할 준비를 시작했다.
그의 손끝에서 푸른 마나의 불꽃이 피어오르며, 아벨 일행을 향한 거대한 제국의 사냥망이 가동될 준비를 마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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