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오르는 아레나와 첫 번째 역공
뜨겁게 달아오른 모래밭 위로 붉은 생혈이 사방으로 흩뿌려졌다.
지옥의 업화를 연상시키는 5서클 광역 화염 마법, ‘퓌로스 오블리비오(Pyros Oblivio)’가 아레나 칼리두스의 하늘을 통째로 뒤덮었다. 머리 위에서 거대한 태양의 파편이 쏟아져 내리는 듯한 압도적인 열기. 모래알들이 유리처럼 녹아내릴 듯 비명을 질렀고, 수만 명의 귀족 관중들이 내지르는 광기 어린 함성은 고막을 찢어발길 기세로 고동쳤다.
“타 죽어라, 가축 놈들아! 네놈들의 비명으로 가문의 영광을 증명하리라!”
허공에 부유한 채 적염의 루비 지팡이를 겨눈 율리우스의 얼굴은 오만함과 살의로 일그러져 있었다. 그가 내뿜는 마력의 압력은 일반적인 노예라면 숨도 쉬지 못하고 주저앉을 수준이었다.
하지만 아벨은 무릎을 꿇은 채, 모래바닥에 검붉은 피로 자모음을 새겨 나갔다.
오른쪽 눈에 장착한 ‘모노클 오브 트루스’가 그의 시신경을 사정없이 짓눌렀다. 율리우스의 지팡이 끝에서 뿜어져 나오는 마나의 흐름이 수만 갈래의 붉은 실줄기가 되어 아벨의 시야에 도식화되었다. 뇌세포가 타들어 가는 듯한 고열과 이명이 머릿속을 헤집었지만, 아벨의 이성은 얼음장처럼 차갑게 가라앉았다.
[언어학적 직관]이 가동되는 순간, 율리우스가 외친 장엄한 영창의 모순들이 텍스트 형태로 분해되어 쏟아졌다.
‘역시…… 쓸데없는 장식적 접두사가 마나의 흐름을 방해하고 있어.’
율리우스의 5서클 주문은 겉보기에는 화려했으나, 내부 문법 구조는 누더기나 다름없었다. 가문의 위세를 과시하기 위해 덧붙인 ‘위대한 피의 군주’니 ‘고결한 가문의 지배’니 하는 형태소들이 마나의 균일한 압축을 가로막고 있었다. 그 장황한 나열식 문법 때문에, 불꽃의 온도를 제어하는 핵심 어근과 종결 어미 사이의 인과율이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제어의 공백이 생긴다. 그 틈을 파고든다.’
아벨은 왼손 검지손가락의 ‘응고 방지 흑요석 반지’를 움켜쥐었다. 반지의 차가운 진동이 모래밭의 고열 속에서도 피가 증발하거나 굳는 것을 막아주었다. 아벨은 부러진 철필 끝에 머금은 생혈을 쥐어짜며, 모래바닥 위에 기하학적인 블록을 그렸다.
초성 ‘ㅂ’, 중성 ‘ㅏ’, 종성 ‘ㄴ’.
그리고 초성 ‘ㅅ’, 중성 ‘ㅏ’.
현대 한국어의 음절 결합 구조는 초성, 중성, 종성이 하나의 사각형 공간 안에 응축된다. 선형적으로 단어를 길게 나열해야만 마법을 시전할 수 있는 제국의 ‘에테르 아르스’와 달리, 한글 구조식 룬은 공간을 기하학적으로 미분하여 의미를 압축한다. 단 두 글자, ‘반사’라는 기하학적 블록만으로도 제국의 장황한 방어 주문 수십 줄을 대체하는 절대적인 효율성이 발현되는 것이다.
백금빛 마나의 스파크가 아벨이 그린 피의 문자 위로 격렬하게 튀기 시작했다. 피의 역류 방어 장벽의 인과율이 경기장 바닥에 고착되는 순간이었다.
[가르크, 지금이다!]
아벨은 목소리를 내지 못했으나, 그의 강렬한 눈빛과 무언의 수화가 가르크의 뇌리에 직접 꽂혔다.
“오오오오오!”
가르크가 사자 갈기 같은 황금빛 머리칼을 흩날리며 대검을 꼬아 쥐고 정면으로 대지를 박찼다. 그의 전신 피부 위로 아벨이 새겨준 ‘강화의 룬’이 혈관처럼 붉게 발광했다. 그와 동시에, 가르크의 손에 들린 대검의 날이 웅웅거리며 미세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아벨이 피로 새겨둔 ‘예리(銳利)의 룬’이 가동된 것이다.
기사단의 마법 갑옷마저 종이처럼 찢어발길 수 있는 초고주파 마력 날이 대기를 찢으며 소름 끼치는 공명음을 흘렸다.
“무모한 짐승 놈이 죽음을 자초하는구나!”
율리우스는 자신을 향해 돌진하는 가르크를 비웃으며 지팡이를 휘둘렀다. 그의 주변을 감싸고 있던 강력한 바람 장벽 결계가 가르크를 튕겨내기 위해 붉은 마나의 파동을 방출했다.
하지만 가르크는 멈추지 않았다.
그가 대검을 양손으로 꽉 쥐고 율리우스의 바람 결계를 향해 대각선으로 검을 내리쳤다. 예리의 룬이 품은 초고주파 마력 진동이 율리우스의 바람 결계 표면에 닿는 순간, 찌르르하는 날카로운 마찰음과 함께 결계의 마나 결합 구조가 강제로 찢겨 나가기 시작했다.
서슬 퍼런 검붉은 진동이 율리우스의 장벽 전면에 균열을 내며 파고들었다.
“……하앗?!”
율리우스의 눈동자가 경악으로 크게 흔들렸다. 일낱 노예의 검날이 제국 명문 가문의 마법 장벽을 물리적으로 해체하고 있었다. 당황한 율리우스는 영창 속도를 무리하게 끌어올리며 지팡이 끝의 화염 마나를 억지로 쥐어짜냈다. 그러나 무리한 영창 속도의 가속은 그의 주문 주파수를 더욱 불안정하게 흔드는 치명적인 결과를 낳았다.
그 순간, 아벨의 손가락 끝에서 뿜어져 나온 피의 선들이 허공에 완벽한 사각형의 백금빛 결계를 형성했다.
지옥의 업화와 같은 화염 폭풍이 아벨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리는 찰나.
가르크의 대검이 율리우스의 마력 장벽에 닿아 서슬 퍼런 검붉은 진동을 일으켰고, 동시에 아벨이 허공에 그린 피의 반사 장벽이 쏟아지는 화염 줄기와 정면으로 충돌하며 눈을 멀게 할 만큼 광포한 백색의 스파크를 아레나 전체에 폭발적으로 내뿜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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