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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로세움의 선전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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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 반지가 내뿜는 붉은 마나의 파동이 아벨의 목덜미를 휘감았다.


지하 막사의 축축한 공기가 찰나의 순간 얼어붙은 듯 정적에 휩싸였다. 웅웅거리는 불길한 마도 스캐너의 공명음이 아벨의 귓전을 날카롭게 때렸다. 전신의 마나가 98% 이상 고갈되어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힘든 상태에서, 아벨은 토마스의 단단한 어깨에 체중을 완전히 실은 채 버티고 있었다. 머릿속에서는 시신경 과부하로 인한 이명이 이빨을 가는 듯한 소리로 울려 퍼졌고, 입안에서는 각혈의 잔향인 비릿한 피맛이 맴돌았다.


프란츠 간수장의 매서운 눈빛이 아벨의 창백한 얼굴을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그의 손가락에 끼워진 황금 반지는 아벨의 목에 채워진 자폭 목걸이의 마석 노드를 집요하게 두들기며 회로의 무결성을 검사하고 있었다.


‘닫힌 회로인가, 열린 회로인가.’


제국의 마도 스캐너가 던지는 질문은 지극히 단순하고 기계적이었다. 목걸이가 해제되어 회로가 단절되었다면 즉시 적색 경보가 울리며 프란츠의 황금 반지가 폭주 주술을 가동할 터였다.


하지만 스캔 파동이 목걸이 내부의 마석에 닿는 순간, 아벨이 밤새도록 새겨둔 기만 결계가 소리 없이 작동했다.


‘미(迷)’와 ‘궁(宮)’의 기하학적 결합.


한글의 초성 ‘ㅁ’, 중성 ‘ㅣ’, 종성 ‘ㅇ’이 네모난 블록 안에서 자석처럼 맞물리며 형성한 ‘인지 오류(Cognitive Error) 룬’이 탐지 주파수를 붙잡았다. 스캐너가 보낸 마력 신호는 아벨이 설계한 언어학적 미로 속에 갇혀 출구를 찾지 못하고 맴돌았다. 그리고 미로의 끝에서 복제된 가짜 피드백이 프란츠의 황금 반지로 리턴되었다.


[정상 작동 중. 회로 연결 완벽.]


지배층이 오만하게 설계한 이분법적 스캔 문법을 완벽하게 우회한 지적 해킹이었다.


띠리링.


황금 반지에서 청아한 녹색 불빛이 피어올랐다. 프란츠 간수장의 눈가에 서려 있던 의심의 빛이 미세하게 누그러졌다. 그는 아벨의 목덜미를 움켜쥐었던 거친 손을 툭 떼어내며 혀를 찼다.


“쳇, 쥐새끼 같은 놈들이 쓸데없이 긴장하게 만드는군. 시몬 놈이 갑자기 벙어리가 된 건 그저 하수도의 유독 가스에 중독되어 마나 신경이 타버린 것뿐인가.”


프란츠는 의무실 방향을 흘겨보며 침을 뱉었다. 그의 뒤를 지키던 백작 가문의 정예 마법 기사 가르시아 역시 은빛 갑옷을 철컥거리며 검 손잡이에서 손을 뗐다.


“간수장,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 없소. 백작님께서 오늘 아침 결투의 흥행을 위해 특별한 배치를 준비하셨으니 서둘러 노예들을 정렬하시오.”


“알고 있소, 가르시아 경. 붉은 기사단이 직접 참관하는 자리이니 완벽히 준비하지.”


프란츠는 무자비한 군대식 훈령을 뱉으며 막사 문을 향해 돌아섰다.


“모든 간수들은 들어라! 검열은 끝났다. 오늘 아침, 바실리우스 백작님과 율리우스 가문의 명예를 위해 중앙 콜로세움에서 특별 결투가 개최된다. 대상 노예들은 즉시 무장을 갖추고 대기하라!”


철문이 거칠게 닫히는 소리와 함께 간수들의 군화 소리가 멀어졌다. 그제야 지하 막사 내부의 수십 명의 노예 결사대원들이 참았던 숨을 동시에 내쉬었다. 몇몇은 다리가 풀려 바닥에 주저앉았고, 토마스는 떨리는 손으로 아벨을 꽉 붙잡았다.


아벨은 성대 깊은 곳에서 쉭쉭거리는 거친 바람 소리만을 내며 안도의 눈빛을 보냈다. 하지만 그의 이성은 벌써 다음 위기를 계산하고 있었다.


‘특별 결투…… 바실리우스 백작과 율리우스 가문이라.’


불길한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막사의 철문이 다시 열리며 하급 간수 헤르만이 불안한 표정으로 아벨과 가르크를 가리켰다.


“너희 둘이다. 율리우스 도련님께서 직접 너희를 지목하셨다. 지난번 연습장에서의 화염 폭주 사건으로 가문의 명예에 흠집이 났다며, 수만 명의 귀족 관람객들이 지켜보는 중앙 콜로세움에서 직접 피의 심판을 내리겠다고 하시는구나.”


가르크가 사자 갈기 같은 황금빛 머리칼을 거칠게 흩날리며 배틀액스를 움켜쥐었다. 그의 야수적인 눈동자에 분노가 이글거렸다.


[그 오만한 귀족 놈이 결국 우리를 공개 도살장에 세우려는군. 아벨, 몸 상태는 어떠냐?]


Gark는 소리 없이 무거운 수화로 물었다. 아벨은 힘겹게 고개를 저었다. 체내 마나는 바닥을 드러냈고 전신은 빈혈로 인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이 상태로 경기장에 나간다면 율리우스의 5서클 마법의 불꽃에 단 1초도 버티지 못하고 재가 될 터였다.


그때, 릴리가 어둠 속에서 소리 없이 다가와 아벨의 손에 작은 가죽 주머니를 쥐여주었다. 약초사 안나가 간수들의 눈을 피해 급히 조제해 보낸 조혈의 영초, ‘루마 헤르바’의 농축 진액이었다.


아벨은 망설임 없이 가죽 주머니의 마개를 열고 검붉은 진액을 입안에 털어 넣었다.


타는 듯이 쓰고 비린 액체가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는 순간, 그의 얼어붙었던 골수에서 뜨거운 혈류가 폭발적으로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심장의 부정맥이 가라앉고, 차갑게 식었던 손끝에 미세하게 마나의 온기가 돌기 시작했다. 전신의 세포가 깨어나며 마나 회로가 급속도로 재정렬되는 감각. 비록 완벽한 회복은 아니었으나, 단 한 번의 기적을 설계하기에는 충분한 마력이 혈관을 타고 흐르기 시작했다.


아벨은 가르크를 바라보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소매 안의 ‘정제된 철필’을 손가락 사이에 끼웠다.


***


웅장하고 거대한 석조 아치 터널을 통과하자, 고막을 찢을 듯한 수만 명의 함성과 열기가 아벨 일행을 덮쳐왔다.


그곳은 아레나 칼리두스의 심장부, ‘중앙 콜로세움(Central Colosseum)’이었다. 하늘을 찌를 듯 솟아오른 관람석에는 화려한 비단 옷을 입고 보석을 주렁주렁 매단 제국의 귀족들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그들의 눈빛에는 노예들의 피와 비명을 유희로 소비하려는 잔혹한 탐욕이 가득했다.


공중 누각에 위치한 바실리우스 백작의 귀빈석에서는 백작이 모노클을 만지며 만족스러운 미소로 도박 배당률 장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뜨겁게 달아오른 하얀 모래밭 중앙으로 걸어 나가는 아벨과 가르크의 발자국이 깊게 패였다. 바람이 불 때마다 매캐한 탄내와 모래먼지가 코를 찔렀다.


“오너라, 더러운 가축 놈들아.”


경기장 반대편, 허공에 푸른 마력의 힘으로 가볍게 부유한 채 내려다보는 사내가 있었다. 금실로 장식된 화려한 청색 마법 로브를 휘날리는 귀족 천재, 율리우스였다. 그의 손에 들린 가문의 성물 ‘적염의 루비 지팡이’가 태양빛 아래서 서슬 퍼런 핏빛 광휘를 뿜어내고 있었다.


율리우스의 얼굴은 오만함과 독기로 가득 차 있었다. 지난번 연습장에서 아벨의 미세한 방해로 인해 자신의 마법이 완벽히 발현되지 못했다는 의심이 그를 광기로 몰아가고 있었다.


“오늘 이 자리에서, 제국의 신성한 언어가 하등한 노예들의 육체를 어떻게 불태우는지 온 세상에 증명하겠다. 감히 가문의 명예를 더럽힌 대가는 너희의 영혼까지 재로 만드는 것이다!”


귀족 관중들이 일제히 환호성을 지르며 노예들의 죽음을 재촉했다.


율리우스가 지팡이를 치켜들자, 그의 입술이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제국의 고대 마법 언어, ‘에테르 아르스’의 장엄한 영창이 경기장 전체에 울려 퍼졌다.


“퓌로스(Pyros)…… 에테르의 심연에서 솟구치는 분노의 불꽃이여, 계약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나의 적을 섬멸하라……”


5서클 광역 화염 마법의 영창이었다. 대기 중의 마나가 급격히 요동치며 율리우스의 지팡이 끝으로 빨려 들어갔다. 하늘이 핏빛 아지랑이로 물들기 시작했고, 모래밭의 온도가 순식간에 살이 타들어 갈 듯이 상승했다.


아벨은 오른쪽 눈에 장착한 ‘모노클 오브 트루스’를 통해 율리우스의 주문 구조를 실시간으로 스캔했다.


[언어학적 직관]이 뇌세포 속에서 폭발적으로 가동되었다.


허공에 전개된 붉은 마나의 실줄기들이 복잡한 문법 트리 구조식으로 아벨의 시야에 도식화되어 나타났다. 율리우스의 주문은 여전히 불필요한 수식어구와 가문의 영광을 찬양하는 쓸데없는 접두사로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5서클이라는 압도적인 마나의 규모 자체가 그 모든 비효율성을 강제로 덮어씌우며 거대한 파괴의 에너지를 형성하고 있었다.


그대로 직격당하면 가르크의 야수적 육체도, 아벨의 약해진 신체도 흔적 없이 증발할 터였다.


[아벨, 저 불꽃은 심상치 않다. 내가 정면에서 영창을 끊어보겠다!]


가르크가 포효하며 배틀액스를 치켜들고 돌격하려 했다. 하지만 율리우스가 지팡이를 가볍게 휘두르자, 그의 주변을 감싸고 있던 강력한 바람의 장벽 결계가 가르크의 거구를 뒤로 강하게 밀쳐냈다.


쿵!


가르크가 모래바닥을 구르며 신음했다. 물리적인 힘만으로는 귀족 마법사의 견고한 마력 장벽을 뚫을 수 없었다.


‘물리적 타격이 통하지 않는다면, 마법의 법칙 자체를 뒤틀어야 한다.’


아벨은 냉철하게 계산했다. 율리우스의 주문은 거대하지만, 마나의 과부하를 막는 종결 어미 제어 장치가 극도로 불안정했다. 복잡한 형태소들의 간섭으로 인해 마법 진 내부의 응집력이 한계에 도달해 있었다. 그 종결 노드에 단 한 번의 역설적 상쇄 주파수를 주입할 수만 있다면, 저 거대한 화염은 시전자에게 역류할 것이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적의 화염탄이 발사되는 찰나의 순간, 그 에너지를 완벽하게 받아내어 반사할 거대한 ‘언어학적 역장’이 필요했다.


아벨은 쓰러진 가르크를 향해 기어갔다. 그는 자신의 검지손가락을 깨물었다. 조혈 진액의 영향으로 뜨겁게 끓어오르는 생혈이 뚝뚝 떨어졌다. 아벨은 가르크의 배틀액스 날 표면에 피 묻은 손가락을 대고 고속으로 문자를 새겨 내려갔다.


‘예(銳)’와 ‘리(利)’의 기하학적 결합.


한글의 초성 ‘ㅇ’, 중성 ‘ㅔ’, 종성 ‘ㄹ’, ‘ㅣ’가 하나의 네모난 철제 날 위에서 톱니바퀴처럼 맞물리며 백금빛으로 각인되었다. ‘예리(銳利)의 룬’이었다. 가르크의 대검날이 서슬 퍼런 검붉은 진동을 일으키며 웅웅거리기 시작했다. 기사단의 마법 방어막마저 찢어발길 수 있는 초고주파 마력 날의 완성이었다.


[가르크, 대검의 진동을 유지하며 나의 방패가 되어라. 단 한 번의 기회뿐이다.]


아벨은 무언의 눈빛과 강렬한 수화로 명령했다. 가르크는 아벨의 눈빛에서 절대적인 확신을 읽고, 이빨을 드러내며 대검을 고쳐 쥐고 아벨의 앞을 가로막아 섰다.


공중에서 율리우스의 영창이 마침내 종착지에 다다르고 있었다. 그의 지팡이 끝에서 태양의 파편 같은 거대한 화염 폭풍이 응축되어 소용돌이쳤다. 주변의 공기가 비명을 지르며 굴절되었다.


“재가 되어 사라져라, 가축들아! 퓌로스 오블리비오(Pyros Oblivio)!”


율리우스가 광기 어린 비명을 지르며 지팡이를 아벨의 심장을 향해 겨누었다. 5서클의 파멸적인 화염 폭풍이 하얀 모래밭을 통째로 집어삼키며 노도처럼 밀려왔다. 관람석의 귀족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노예들의 비참한 종말을 기대하며 광분했다.


하지만 아벨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검지손가락을 다시 한번 깊게 깨물었다. 뿜어져 나오는 신선한 생혈을 움켜쥔 채, 아벨은 경기장 모래바닥을 향해 주저 없이 몸을 던졌다.


그는 무릎을 꿇은 채, 자신의 피로 뜨거운 모래밭 위에 거대한 기하학적 문장들을 한 획 한 획 새겨 나가기 시작했다.


그것은 제국의 나열식 신성어와는 궤를 달리하는, 우주의 보편 문법을 담은 한글 구조식의 극치.


‘반(反)’과 ‘사(射)’의 삼위일체 결합.


초성, 중성, 종성이 완벽한 대칭을 이루며 모래밭의 물리적 공간 각도를 강제로 구속하기 시작했다. 아벨의 손끝이 지나간 궤적을 따라 검붉은 피의 선들이 허공에서 톱니바퀴처럼 맞물리며, 이윽고 눈부신 백금빛의 거대한 반사 마법 진이 경기장 바닥 전체에 그 찬란한 위용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HẾT CHƯƠ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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