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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잃은 자의 피의 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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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릿한 쇠 냄새가 목구멍을 타고 역류했다.


머리가 깨질 듯한 두통 속에서 최강민, 아니 이 몸의 원래 이름인 ‘아벨’은 눈을 떴다. 뺨에 와닿는 감촉은 축축하고 이끼 낀 거친 석판이었다. 사방은 칠흑 같은 어둠이었고, 오직 벽 틈새로 스며드는 희미한 푸른빛만이 이곳이 지하 감옥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읍, 으읍……!”


비명을 지르려 했지만, 입안에서 터져 나온 것은 쿨럭거리는 핏덩이와 기괴한 바람 빠지는 소리뿐이었다. 입안이 텅 비어 있었다. 신경이 도려 나간 자리에 지독한 작열통이 밀려왔다. 강민은 본능적으로 손가락을 입안으로 밀어 넣었다.


혀가 없었다.


뿌리째 잘려 나간 설근(舌根)의 단면이 덜덜 떨리며 선혈을 뿜어내고 있었다. 끔찍한 감각과 함께 낯선 기억들이 뇌리를 스쳤다.


바벨 제국의 최남단, 척박한 황무지에 세워진 검투장 ‘아레나 칼리두스’. 그리고 그곳에서 말을 하지 못하도록 혀가 잘린 채 소모품으로 살아가는 최하급 노예 아벨. 그것이 이 육체의 정체였다.


‘내가…… 빙의했다고?’


지구에서의 기억이 떠올랐다. 평생을 언어학 연구에 바치며 구조주의와 통사론 논문을 쓰다 책상 위에서 과사(過死)했던 천재 언어학자 최강민. 그의 영혼이 지금, 말을 빼앗긴 채 죽음만을 기다리는 노예의 육체와 융합한 것이다.


신체적 등급은 ‘실어자(Aphonian)’. 제국의 마법 체계에서 혀를 잃었다는 것은 영창을 할 수 없음을 뜻했고, 그것은 곧 마법을 쓸 권리조차 박탈당한 가축과 다름없는 신세라는 사형 선고였다.


철컥, 철컥.


무거운 쇠사슬 소리와 함께 복도 저편에서 거친 발소리가 들려왔다. 이 감옥의 지배자이자 악랄한 채찍 간수, 크로이츠의 발소리였다.


“이 더러운 가축 놈들! 당장 일어나라! 오늘 경기장에 바칠 제물들의 상태가 왜 이 모양이냐!”


가죽 채찍이 허공을 가르는 날카로운 파열음과 함께, 옆 감방에서 고통에 찬 비명이 터져 나왔다. 크로이츠는 허리에 피 묻은 채찍을 차고, 얼굴에 뱀 같은 흉터를 일그러뜨리며 철창 사이로 마력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가 시전하는 것은 제국의 고대 마법 언어, ‘에테르 아르스(Ether Ars)’였다.


“인디케(Indice)…… 비아(Via)…… 아페리(Aperi)!”


크로이츠가 오만하게 주문을 영창하자, 그의 손끝에서 붉은 마나의 실줄기들이 뻗어 나와 감옥의 쇠창살을 강제로 조율하기 시작했다. 그 순간, 강민의 뇌리에서 기이한 감각이 깨어났다.


[언어학적 직관]이 가동된 것이다.


어떤 상태창도, 편리한 시스템 가이드도 없었다. 하지만 강민의 뇌세포는 크로이츠의 입에서 흘러나온 신성어 주문을 실시간 텍스트 구조식으로 환원해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푸른빛으로 회전하며, 허공에 전개된 붉은 마나의 흐름이 기하학적인 문법 트리 구조식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뭐지, 이 비효율적인 구조는?’


강민은 경악했다. 제국의 마법사들이 신성시하는 에테르 아르스는 그야말로 오류투성이의 누더기 코드였다.


단순히 문을 열고 제어하는 마법일 뿐인데도, 주문 내부에는 ‘위대한 신들에게 바치는 경배’를 뜻하는 불필요한 장식적 접두사와 중복된 형태소들이 가득했다. 전체 주문의 70%가 무의미한 수식어구였고, 그 때문에 마나의 낭비와 영창 시간의 지연이 극심했다. 게다가 문법적 규칙이 너무 경직되어 있어, 시전자의 발음이 단 1%만 어긋나도 회로가 폭주해 자폭할 위험을 내포하고 있었다.


‘이 세계의 귀족들은 이런 왜곡된 문법을 신성어라 부르며 마법을 독점하고 있었던 건가?’


지적 오만함에 찌든 지배 계급의 위선이 한눈에 보였다. 하지만 동시에 절망이 밀려왔다. 아무리 그 모순을 간파한들, 아벨의 몸은 혀가 잘려 단 한 음절의 신성어도 발성할 수 없다. 소리를 내지 못하면 마나를 공명시킬 수 없고, 마법은 발현되지 않는다.


그때, 옆 감방의 문이 열리며 늙은 노예 하나가 끌려 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자폭 마법 실험의 제물로 바쳐질 이들이었다. 다음은 아벨 자신의 차례가 될 터였다. 가만히 앉아서 죽음을 기다릴 수는 없었다.


‘생각해라, 최강민. 언어학자로서의 지식을 동원해라. 꼭 소리를 내야만 마법이 발현되는가?’


음성 언어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음소를 나열해야 하는 ‘선조성(Linearity)’의 한계를 지닌다. ‘I-G-N-I-S’라고 외치려면 다섯 개의 음을 차례대로 발음해야 하기에 시간이 걸린다. 하지만 공간은 다르다. 문자는 2차원의 평면 위에 정보를 동시에 압축해 밀어 넣을 수 있다.


특히, 그가 전생에 연구했던 ‘한글’의 구조라면.


한글은 알파벳처럼 옆으로 길게 나열하는 선형 문자가 아니다. 초성(자음), 중성(모음), 종성(자음)이 하나의 기하학적 사각형 블록 안에서 상하좌우로 결합하는 ‘음절식 모아쓰기’ 문자다.


이 기하학적 블록 결합 구조를 마나 회로에 대입한다면?


초성에는 [마법의 속성], 중성에는 [마법의 형태], 종성에는 [마법의 작용]을 대입하여 단 한 음절의 문자 블록으로 결합하는 것이다. 따로따로 나열하며 영창할 필요가 없다. 하나의 블록이 완성되는 순간, 시간 복잡도는 O(N)에서 O(1)로 단축된다. 즉시 시전. 영창의 완벽한 배제.


‘가능하다. 혀가 없어도, 피로 문자를 새길 수만 있다면!’


강민은 어두운 감옥 바닥을 더듬었다. 손끝에 딱딱하고 뾰족한 감촉이 닿았다. 이전에 갇혔던 노예 서기가 남겨둔 듯한, 부러진 서기용 철필 촉이었다. 낡고 녹슬었지만 문자를 새기기엔 충분했다.


그는 철필 끝으로 자신의 가슴 상처에서 흐르는 신선한 생혈을 듬뿍 묻혔다. 비릿한 피비린내가 진동했지만 개의치 않았다. 이제 목숨을 건 최초의 실험을 전개할 시간이었다.


목표는 외부의 소음과 크로이츠의 마력 간섭을 차단하는 완전한 침묵의 결계.


그는 머릿속으로 ‘한글 구조식 음절 마법’의 첫 번째 수식을 설계했다.


초성으로 미음(ㅁ)을 잡는다. 사방을 가로막는 폐쇄의 틀이자 장벽.

중성으로 우(ㅜ)를 선택한다. 위에서 아래로 내리누르는 강력한 압축과 억제.

종성으로 기억(ㄱ)을 얹는다. 흐름을 강제로 꺾어 잠그는 최종 제동.


세 개의 기하학적 선이 뭉쳐 하나의 글자를 이룬다.


‘묵(默)’.


강민은 이빨을 악물고, 지하 9호실의 축축한 석회벽 전면에 철필을 그어 내렸다. 사각, 사가각.


부러진 철필 촉이 돌벽을 긁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붉은 생혈이 기하학적인 초성, 중성, 종성의 궤적을 그리며 벽면에 스며들었다. 피가 닿는 순간, 대기 중에 흐르던 불안정한 마나 원소들이 기하학적 사각형 블록의 중심 주파수로 강제 정렬되기 시작했다.


‘결합해라. 그리고 잠가라.’


마지막 종성 ‘ㄱ’의 획을 긋는 순간, 아벨의 온몸에서 마나가 폭발하듯 빠져나갔다. 심장을 쥐어짜는 듯한 극심한 저체온증과 빈혈이 밀려왔지만, 강민은 눈을 부릅떴다.


화아아악!


벽면에 새겨진 검붉은 피의 문자가 일순간 눈부신 백금빛 광휘를 내뿜었다. 톱니바퀴가 완벽하게 맞물려 돌아가는 듯한 마력의 떨림이 지하 9호실 전체를 감쌌다.


그 순간, 기적이 일어났다.


옆 감방에서 들려오던 노예들의 처절한 비명소리, 간수들의 거친 발소리, 쇠사슬이 바닥을 긁는 쇳소리가 단 한순간에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반경 3미터 이내의 모든 음향 진동과 마나의 미세 진동이 완벽하게 소멸했다. 진공 상태와도 같은 절대적인 정적.


강민은 자신의 잘린 설근을 만지며 소리 없는 전율을 느꼈다.


‘성공했다……!’


말을 잃은 실어자라도, 올바른 문법을 피로 새기면 신들의 마법조차 뒤엎을 수 있다. 제국의 독점 체제를 무너뜨릴 혁명의 첫 번째 불꽃이 이 어두운 지하 9호실에서 피어오른 것이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였다.


지하 감옥의 특정 영역에서 갑작스럽게 소음과 마나 잔향이 완벽히 차단되자, 아레나 칼리두스 전체를 감싸고 있던 마나 제어망에 미세한 균열과 노이즈가 발생했다.


복도 저편에서 채찍을 휘두르던 크로이츠가 걸음을 멈췄다. 그의 오만한 눈동자가 지하 9호실 방향을 향해 서서히 돌아갔다.


“……뭐지? 왜 이 구역만 소리가 들리지 않지?”


저벅. 저벅.


묵직한 철제 군화 소리가 절대 정적의 결계 경계선을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크로이츠의 발소리가 지하 9호실 문앞에서 멈췄다.


철컥하는 열쇠 꾸러미 소리와 함께, 쇠창살 너머로 크로이츠의 살기 어린 눈빛이 아벨을 향해 꽂혔다.

HẾT CHƯƠ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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