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단 수사관 엘레나의 등장
지하 5층 제1독방의 두꺼운 철문 너머로 들려오던 발타자르의 기침 소리가 잦아들 무렵, 정적을 깨뜨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철컥, 철컥.
육중한 성기사의 갑옷이 서로 부딪히며 내는 서늘한 마찰음이었다. 발소리는 천천히, 그러나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로건이 갇힌 독방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간수들의 경박한 발걸음과는 격이 다른, 단련된 무인의 묵직한 보폭이었다.
로건은 신속하게 움직였다. 바르도의 가르침을 통해 손끝의 미세 촉각만으로 풀어헤친 간수용 마력 억제 족쇄를 다시 손목에 걸쳤다. 자물쇠의 기계식 핀을 완전히 잠그지 않은 채, 겉보기에는 여전히 단단히 구속되어 있는 것처럼 위장했다. 그리고 벽에 기대어 몸을 웅크린 채, 영양실조로 쇠약해진 사형수의 연기를 시작했다.
쿠우우웅.
독방의 무쇠 문이 열리며, 어둠으로 가득했던 공간에 눈이 시릴 정도의 백은빛 마력 등불의 광원이 쏟아져 들어왔다. 갑작스러운 빛에 로건은 눈을 가늘게 뜨며 침입자를 응시했다.
그곳에 서 있는 것은 은빛 판금 갑옷을 걸친 훤칠한 키의 여기사였다. 단정하게 뒤로 묶은 금발 아래로, 서리처럼 차가운 청안이 독방 바닥에 쓰러져 있는 로건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녀의 허리춤에는 거짓을 꿰뚫어 본다는 이단심문소의 명검, ‘에스텔’이 묵직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이단심문소 남부 지부의 수석 수사관, 엘레나(Elena)였다.
그녀는 문가에 대기하던 경비병들을 향해 차갑게 명령했다.
“모두 물러가라. 수석 심문관 케네스 님의 대리인 자격으로 이 죄수를 독점 심문하겠다. 내가 부르기 전까지는 누구도 이 층에 발을 들이지 마라.”
“하지만 수사관님, 이 자는 위험한 사령술 의혹이……”
“내 명령이 가볍게 들리나?”
엘레나의 서늘한 목소리에 경비병들은 침을 삼키며 서둘러 철문을 닫고 물러갔다. 육중한 문이 다시 닫히자, 독방 안에는 백은빛 등불과 두 사람의 숨소리만이 남았다.
엘레나는 천천히 로건에게 다가왔다. 그녀의 군화가 돌바닥을 밟을 때마다 둔탁한 금속음이 울렸다. 그녀는 허리춤의 검 자루에 손을 얹은 채, 차가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로건. 전직 아스클레온 가문의 후예이자, 시체를 만지는 저주받은 수거인.”
로건은 대답하지 않고 창백한 안색으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등 가죽의 채찍 상처가 쓰라렸지만, 그의 머릿속은 전생의 수석 법의관 김민혁의 냉철한 이성으로 빠르게 회전하고 있었다.
“네놈이 알리스터 대공의 시신에 사령술 저주를 걸어 훼손하려 했다는 케네스 님의 보고서를 읽었다.” 엘레나의 청안이 날카롭게 빛났다. “하지만 나는 의문이 있더군. 아스클레온 가문이 아무리 몰락했다 한들, 대대로 제국 최고의 의학을 연구하던 가문이다. 그런 가문의 마지막 핏줄이 왜 대공의 시신을 인도받자마자 그토록 허술하게 사령술을 집도하려다 현장에서 검거되었는지 말이다.”
로건은 족쇄에 묶인 척 손목을 살짝 흔들며 나직하게 웃었다. 갈라진 목소리가 독방의 벽을 타고 스산하게 울렸다.
“수사관님. 만약 제가 정말로 사령술로 대공의 시신을 모독하려 했다면, 왜 굳이 대공의 가슴을 가르고 위장(胃臟)을 적출하려 했겠습니까? 사령술의 기본은 온전한 육체에 마력을 불어넣는 것인데 말입니다.”
엘레나의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그녀는 검 자루를 쥔 손에 힘을 주며 다가왔다.
“말을 돌리지 마라, 죄수여. 네놈이 대공의 육체에서 무엇을 찾으려 했는지 밝혀라. 그렇지 않으면 사형 집행일 전이라도 이 자리에서 내 검이 네 목을 벨 것이다.”
차가운 검날의 기운이 목덜미에 닿는 듯한 긴장감 속에서도, 로건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기사도와 원리원칙을 목숨보다 소중히 여기는 엘레나의 성정을 이미 간파하고 있었다. 그녀는 맹목적인 광신도가 아니다. 진정한 정의를 갈망하는 수사관이다.
“저는 진실을 찾으려 했습니다.” 로건이 엘레나의 청안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교단과 신전 치유사단이 발표한 대공의 사망 보고서가 완벽한 거짓이기 때문입니다.”
“무슨 신성모독적인 소리냐!”
“대공은 자정에 신의 부름을 받아 평화롭게 승천한 것이 아닙니다.” 로건의 목소리에 차가운 법의학적 권위가 실리기 시작했다. “그분은 타살당했습니다. 그것도 아주 정교하게 기획된 주술 독살로 말입니다.”
엘레나의 숨결이 순간 멎었다. 그녀는 대공 암살의 배후에 제라드 백작과 수석 심문관 케네스가 연루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혹을 내심 품고 있었으나, 물증이 없어 침묵하고 있던 차였다. 하지만 천민 시체 수거인의 입에서 그 단어가 나오자 충격을 감추지 못했다.
“……증거가 있나?” 엘레나가 나직하게 물었다.
“사후 경직도 측정법(Post-mortem Rigidity Measurement)을 아십니까, 수사관님?”
로건은 자신의 오른손을 들어 올려 손가락 마디를 가볍게 굽혔다.
“인간의 신체는 사후에 화학적 변화로 인해 근육이 굳어집니다. 이 경직은 턱관절과 목관절에서 시작하여 사지로 내려가지요. 대공의 시신이 이송 도중 유실되지 않고 제 안치소로 들어왔을 때, 저는 즉시 관절의 저항 강도를 측정했습니다.”
로건은 마치 해부학 강의를 하듯 담담하고 정교하게 말을 이어갔다.
“새벽녘에 시신이 도착했을 때, 대공의 하지 관절은 이미 돌처럼 단단하게 굳어 있었습니다. 타르타로스 지하 안치소의 차가운 온도와 대공의 체격을 고려해 사후 온도를 역산하면, 경직이 이 정도로 진행되기 위해서는 최소한 8시간에서 10시간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즉, 대공의 진짜 사망 시각은 교단이 발표한 자정이 아니라, 전날 저녁 8시경이라는 뜻입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신전의 고위 사제들이 사망 직후 정화 주술을 시전했다고 했다. 주술의 영향으로 근육의 상태가 변했을 수도 있어!”
엘레나가 반박했지만, 그녀의 목소리에는 이미 미세한 흔들림이 묻어 있었다.
“주술로 근육의 수축을 위장할 수는 있어도, 소화계 내부의 물리적 진행 상황까지 속일 수는 없습니다.” 로건이 차갑게 미소를 지었다. “저는 대공의 위장을 열어 위 내용물 소화도 분석법을 실행했습니다.”
“위장 분석이라고……?”
“그렇습니다. 대공의 위장 내부에는 소화가 거의 진행되지 않은 양고기와 허브 차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습니다. 위산에 의한 단백질 변성도를 측정해 본 결과, 음식물이 위장에 머문 시간은 고작 30분에 불과했습니다. 대공가 시녀들의 증언에 따르면, 대공은 매일 저녁 7시 30분에 마지막 식사를 합니다. 그렇다면 소화 진행도로 볼 때 대공의 심장이 멈춘 시각은 정확히 저녁 8시 이전입니다.”
로건은 웅크리고 있던 몸을 천천히 일으켜 세웠다. 손목에 걸쳐져 있던 족쇄가 짤랑이며 바닥으로 힘없이 떨어졌다. 엘레나는 로건이 이미 구속을 풀었음에 경악하여 검 에스텔을 반쯤 뽑아 들었으나, 로건의 이어지는 폭로에 검을 더 이상 뽑지 못하고 얼어붙었다.
“교회의 발표대로 대공이 자정에 죽었다면, 왜 그의 위장 속 음식물은 무려 4시간 동안이나 위산에 전혀 녹지 않은 채 깨끗한 상태로 보존되어 있었을까요? 대공의 장기가 교단의 거짓말에 맞춰 소화 활동을 일시 정지하기라도 했다는 말입니까?”
로건의 서늘하고 정교한 인과관계 분석 앞에 엘레나의 머릿속이 하얗게 타들어 가기 시작했다. 교단이 발표한 사망 시각과 실제 물리적 사망 시각 사이의 ‘4시간의 공백’.
그 공백의 시간 동안, 대공의 방 안에서는 케네스와 제라드 백작이 가짜 유서를 작성하고 현장을 조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추론이 아닙니다. 대공의 위장 점막 세포 속에는 은침과 반응하여 청색 인광을 뿜어내는 미세한 주술 독소, ‘청색 살의’의 침전물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습니다. 저는 그 증거물 샘플을 적출하여 케네스의 수하들이 찾지 못하는 안전한 곳에 은닉해 두었습니다.”
로건은 한 걸음 더 다가가 엘레나의 흔들리는 청안을 똑바로 응시했다.
“수사관님. 당신은 교단의 맹목적인 무오류성을 수호하는 꼭두각시가 되겠습니까, 아니면 기사의 명예를 걸고 대공을 시해한 진짜 암살자들의 목을 베겠습니까? 저를 도우십시오. 대공의 진짜 위장 조직 샘플을 정식 사법 증거물로 확보해 드리겠습니다.”
엘레나는 숨을 몰아쉬었다. 그녀가 평생을 바쳐 충성해 온 교단의 신성한 기적이, 한낱 추악한 암살 음모를 덮기 위한 사기극이었다는 사실이 로건의 차가운 법의학적 증거들 앞에 낱낱이 해체되고 있었다.
진실을 마주한 여기사의 손이 허리춤의 검 자루 위에서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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