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은의 메스, 첫 번째 절개
철제 군화 소리가 안치소 바깥 복도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이단심문관 케네스의 직속 성기사단이 제3시체안치소 외곽을 겹겹이 포위한 채, 소각 유예 시한인 24시간을 알리는 모래시계를 지켜보고 있었다. 좁고 음산한 안치소 내부에는 끓인 식초와 소금물의 시큼한 소독약 냄새가 자욱했다.
로건은 차가운 돌침대 위에 누워 있는 알리스터 대공의 시신을 내려다보았다. 사후 온도를 역산해 알아낸 진짜 사망 시각은 오늘 새벽 4시에서 5시 사이. 교단이 발표한 자정과는 무려 4시간의 공백이 있었다. 그 공백이야말로 정교한 독살의 증거이자, 로건이 누명을 벗을 유일한 열쇠였다.
하지만 정밀 부검을 시작하기도 전에 거대한 장벽에 부딪혔다.
‘도구가 없다.’
로건은 안치소 선반에 놓인 녹슨 철제 칼날들을 만져보았다. 날이 무디고 더러운 것은 둘째 치고, 제국의 일반 철은 주술적 마력에 극도로 민감하게 반응하는 성질이 있었다. 마력이 깃든 독소로 사망한 사체에 마력 전도율이 높은 철제 메스를 대는 순간, 미세한 주술 흔적들이 왜곡되거나 아예 증발해 버릴 터였다.
세포 단위의 마력 흔적을 상처 없이 분리해 내기 위해서는 마력 전도율이 제로에 가까운 특수 금속, 즉 ‘백은(白銀)’으로 만든 초정밀 메스가 필수적이었다.
“의원님, 무슨 고민이라도 있으십니까?”
문가에서 망을 보던 경비병 토마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통풍 치료를 받고 로건의 의학 실력을 맹신하게 된 그는 이제 완전히 로건의 은밀한 조력자가 되어 있었다.
“마력 왜곡 없이 사체를 가를 수 있는 도구가 필요하네. 혹시 이 감옥 내부에 정교한 금속 가공이 가능한 장인이 있나?”
토마스가 턱수염을 쓸어내리며 목소리를 낮췄다. “지하 2층 노역 공방에 황실 공방의 수석 장인이었던 ‘한센’이라는 영감이 갇혀 있습니다. 하지만 그 영감은 성격이 괴팍하기 이를 데 없고, 최근에는 심한 관절통 때문에 망치질도 제대로 못 해 하루 종일 신경질만 부리고 있다고 합니다.”
“한센이라고 했나? 지금 당장 그를 만나야겠네.”
로건은 토마스의 안내를 받아 경비병들의 순찰 교대 시간을 틈타 지하 2층의 어두운 철기 공방으로 은밀히 이동했다.
공방 내부는 화로의 열기와 시커먼 그을음으로 가득했다. 절뚝거리는 다리로 거대한 모루 앞에 서서 붉게 달아오른 철판을 노려보고 있는 노인이 보였다. 그가 바로 천재 대장장이 한센이었다. 한센은 비정상적으로 발달한 어깨 근육을 지녔지만, 오른쪽 무릎과 손목 관절이 심하게 부어올라 있었다.
“빌어먹을! 이 지독한 뼈마디 통증 때문에 제대로 서 있을 수가 없군!”
한센이 욕설을 내뱉으며 쇠망치를 바닥으로 내던지려 했다. 고질적인 관절통이 발작을 일으킨 것이 분명했다. 그가 고통으로 중심을 잃고 쓰러지려는 찰나, 로건이 신속하게 다가가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손대지 마라! 네놈 같은 천민 시체 수거인이 어디를 감히……!”
한센이 신경질적으로 소리쳤지만, 로건의 손가락은 이미 그의 오른쪽 무릎 뒤편의 오금과 손목의 신경 총을 정확하게 압박하고 있었다.
‘인체 구조학적 급소 타격.’
김민혁 시절 수없이 연구했던 인체 신경망의 생리학적 약점을 역이용한 기술이었다. 마법을 쓰지 않고 오직 손가락 끝의 미세한 힘만으로 통증 신호를 뇌로 전달하는 척수 신경망의 통로를 일시적으로 차단하는 정교한 신경 압박술이었다.
“흡……!”
한센의 거친 외침이 멈췄다. 뼈를 깎는 듯했던 관절의 타오르는 통증이, 로건의 손길이 닿자마자 거짓말처럼 가라앉기 시작했다. 붉게 충혈되었던 노인의 눈동자에 경악과 의혹이 서렸다.
“너, 너 무슨 짓을 한 거냐? 마법을 쓴 건가?”
“마법이 아닙니다. 억눌려 있던 신경의 흐름을 해부학적 급소 압박으로 일시적으로 차단해 통증을 완화한 것뿐입니다.” 로건이 냉철하고 건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오랫동안 차갑고 습한 공방에서 연납 분진을 마시며 일하셨기에 체내에 독소가 쌓여 관절의 윤활막이 파괴된 것입니다. 제가 가르쳐 드리는 약재 처방과 물리치료를 병행하면, 다시 망치를 잡으실 수 있습니다.”
한센은 자신의 부어오른 손목을 움직여 보았다. 통증이 사라진 자리에 부드러운 감각이 돌아와 있었다. 제국의 치유사들이 신성 마법이랍시고 비싼 성수를 들이부어도 낫지 않던 고질병이, 이 창백한 청년의 손짓 몇 번에 진정된 것이다. 노인의 오만한 고집이 경외감으로 무너져 내렸다.
“원하는 게 무엇이냐, 시체 수거인.”
로건은 품속에서 아스클레온 가문의 유산이자 자신의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던 정밀 메스 설계도를 꺼내 모루 위에 펼쳤다. 일반적인 단도와 달리, 칼날의 두께가 마이크로미터 단위로 얇고 손잡이와의 무게 균형이 극도로 정밀하게 설계된 현대식 해부용 메스의 도면이었다.
한센의 눈빛이 장인 특유의 광기로 번뜩였다. “이런 기괴하고도 아름다운 날붙이 도면은 평생 처음 보는군. 이건 오직 베어내고 가르기 위해 태어난 극상의 도구다. 하지만 이 정도로 얇은 날은 일반 철로 만들면 마력 반응을 버티지 못하고 부러질 텐데?”
“그래서 ‘백은 괴’가 필요합니다. 마력 전도율이 제로에 수렴하는 순수한 은 광석이 있어야만 이 도면을 완성할 수 있습니다.”
한센은 침을 꿀꺽 삼키더니, 공방 구석의 비밀 바닥돌을 들어 올려 깊숙이 숨겨두었던 묵직한 백은 괴를 꺼냈다. 과거 황실 공방에서 탈취해 온, 제국에 몇 남지 않은 희귀한 초고순도 은 광석이었다.
“좋다. 내 손으로 이 전설적인 도구를 조제해 주지. 대신 내 다리를 완전히 고쳐놓겠다는 약속을 지켜라.”
화로의 불꽃이 다시 뜨겁게 타올랐다. 한센이 쇠망치를 쥐고 백은 괴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팅, 팅, 채앵!* 맑고 청명한 금속성이 어두운 공방 내부에 울려 퍼졌다. 붉게 달아오른 은빛 금속이 망치질 아래에서 서서히 얇고 날카로운 메스의 형태로 변형되어 갔다. 한센의 이마에서 흘러내린 땀방울이 화로의 열기에 증발하며 하얀 김을 피워 올렸다.
차가운 기름 속에 백은의 날이 담기는 순간, *쉬이익!* 하는 날카로운 마찰음과 함께 백은의 해부 메스 ‘아스클레피오스’가 마침내 그 서늘한 자태를 드러냈다.
로건은 완성된 메스를 손에 쥐었다. 마력이 전혀 전도되지 않는 차갑고 묵직한 백은의 질감이 손가락 끝을 타고 흘러들어왔다. 완벽한 도구였다.
밤이 깊어지자, 로건은 제3시체안치소 벽 뒤에 숨겨진 비밀 해부실로 복귀했다. 토토가 끓인 식초로 내부를 완벽히 살균해 두었고, 잭이 공수해 온 시신 보존용 암염 얼음이 대공의 시신 주변을 차갑게 에워싸고 있었다.
로건은 가죽 방수 앞치마를 두르고, 은빛 외안경 ‘베리타스’를 왼쪽 눈에 밀착시켰다. 손끝의 미세 촉각이 백은 메스의 자루와 완전히 동기화되었다.
돌침대 위에 누워 있는 알리스터 대공의 가슴팍은 차갑고 단단하게 굳어 있었다.
로건은 마음속으로 현대 법의관 시절의 서약을 되새겼다.
‘죽은 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내가 당신의 목소리가 되어 주지.’
로건은 백은의 메스 ‘아스클레피오스’를 굳게 쥐고 대공의 가슴 정중앙, 흉골 바로 윗부분에 칼끝을 가져다 대었다. 그리고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아래를 향해 첫 번째 정밀 절개를 집도했다.
서가각—
백은의 메스가 대공의 차가운 가죽 피부를 가르는 순간, 절개 부위의 틈새에서 생체 조직의 핏물 대신 기괴하고 짙은 보라색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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