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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신 없는 법정은 유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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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라드 백작의 얼굴이 순식간에 흙빛으로 물드는 순간, 타르타로스 감옥 중앙 연병장을 가득 메운 수천 명의 군중 사이에서 웅성거림이 해일처럼 번져나갔다.


양피지 유서 위에서 푸르게 맥동하는 탄광 마력 분진의 기하학적 결정체. 그것은 제라드 백작의 영지에서만 배출되는 독특한 광물성 오염 물질이었다. 필체는 완벽하게 복제했을지언정, 그 글을 쓰기 위해 사용한 잉크의 원소 성분까지는 속이지 못한 위조 전문가 레오나르드의 치명적인 실책이었다.


“정숙! 정숙하라!”


재판장 줄리안이 황급히 황금 의사봉을 연이어 내리쳤다. 둔탁한 파열음이 연병장을 때렸지만, 이미 흔들리기 시작한 민심의 동요를 가라앉히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줄리안은 방청석의 제라드 백작과 짧은 눈빛을 교환했다. 그의 이마에서도 식은땀이 비 오듯 흘러내리고 있었다.


줄리안은 호흡을 가다듬고 고압적인 목소리로 로건을 내려다보았다.


“피고인 로건! 유서의 잉크 성분에 미세한 불순물이 섞여 있다고 해서 그것이 위조의 증거가 될 수는 없다! 설령 백작령의 잉크가 쓰였다 한들, 그것이 대공 님의 서명이 가짜라는 물리적 증거는 되지 못한다. 무엇보다!”


줄리안이 단상 위의 판결문을 거칠게 움켜쥐며 목소리를 높였다.


“알리스터 대공 님의 서거는 이미 남부 대성당의 수석 치유사 시몬 사제와 치유사단에 의해 ‘급성 심장마비’로 공식 진단되었다! 교단이 신성한 성력으로 내린 사망 진단은 그 자체로 절대적인 공신력을 지닌다. 감히 일개 천민 시체 수거인 주제에 사법부와 교단의 신성한 권위를 부정하고 시신을 훼손하려 들다니! 이는 명백한 신성모독이자 사령술의 증거다!”


줄리안의 억지 논리에 케네스 이단심문관이 기다렸다는 듯 거들었다. 그가 피처럼 붉은 로브를 펄럭이며 로건을 향해 손가락질했다.


“그렇다! 시신 없는 법정에서 잉크의 성분 따위로 재판을 지연시키는 것은 악마의 수작일 뿐이다! 대공 님의 시신은 이미 신전의 치유사들에 의해 정화되어 안치실에 보존되어 있다. 사령술사 놈이 시신을 가르겠다고 주장하는 것 자체가 영혼을 소멸시키려는 대역죄다! 브론, 즉시 저놈을 단상으로 끌고 가 사형을 집행하라!”


단상 옆에 거구의 몸을 웅크리고 있던 사형 집행관 브론이 묵직한 참수의 대도끼를 고쳐 잡았다. 둔탁한 쇳소리가 연병장의 긴장감을 극도로 끌어올렸다.


그 순간, 로건의 곁을 지키던 수사관 엘레나가 검 자루를 쥐고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은빛 판금 갑옷이 햇빛을 받아 서늘하게 빛났다.


“멈춰라! 사법 감찰국의 공식 참관 하에 진행되는 재판이다. 피고인의 정당한 물증 제시가 끝나지 않았음에도 강제로 집행을 시도하는 자는 기사단의 이름으로 즉각 베어 넘기겠다!”


“엘레나 수사관! 감히 이단심문소의 권위에 항명하는 것인가!”


케네스가 분노로 얼굴을 붉히며 소리쳤지만, 엘레나의 청안은 흔들림이 없었다. 참관인석에 앉아 있던 사법 감찰국의 루카스 역시 두꺼운 법률 책을 펼치며 침착하게 개입했다.


“재판장님. 대공 님의 공식 사망 진단서가 존재한다 할지라도, 유서의 위조 정황이 밝혀진 이상 사인의 재검증은 법률적으로 타당합니다. 시신이 없는 법정에서 사인을 논하는 것 자체가 사법적 기만입니다.”


로건은 오른쪽 눈에서 흐르는 피눈물을 창백한 손등으로 가볍게 훔쳐냈다. 족쇄의 마력 역류로 인한 극심한 두통이 뇌리를 찔렀지만, 그의 입꼬리는 비스듬히 올라가 있었다. 그는 피로 얼룩진 눈으로 줄리안과 케네스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시신 없는 법정은 유죄입니다, 재판장님.”


로건의 차갑고 건조한 목소리가 연병장 전체에 나직하게 울려 퍼졌다.


“대공 님의 사인이 자연사인지, 혹은 정교한 주술 독살인지 밝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단 하나뿐입니다. 지금 당장 대공 님의 유해를 이 법정 중앙으로 이송해, 군중과 사법 감찰국이 지켜보는 가운데 즉석 부검을 집도하는 것입니다.”


“미친 소리!”


케네스가 비명을 지르듯 소리쳤다.


“시신을 가르는 것은 영혼을 소멸시키는 사령술사의 금기다! 제국의 그 어떤 귀족도, 그 어떤 유족도 그런 신성모독을 허락하지 않는다! 유족의 동의 없는 해부는 그 자체로 즉각 처형에 해당하는 중죄다!”


줄리안 판사 역시 황금 의사봉을 세차게 두드렸다.


“피고인 로건! 유족의 공식적인 요청과 허가가 없는 사체 훼손은 제국법 제12조에 의거해 절대 불가능하다! 대공가의 명예를 훼손하려는 네놈의 주장은 이 자리에서 기각한다! 브론, 집행을……!”


“누가 내 남편의 유해를 훼손한다고 하는가.”


그 순간, 연병장 북쪽의 육중한 철제 정문이 굉음과 함께 열리며, 얼어붙은 듯한 차가운 목소리가 법정의 공기를 갈랐다.


모든 이들의 시선이 정문으로 향했다.


검은색 실크 상복을 입고, 얼굴을 칠흑 같은 베일로 가린 여성이 천천히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그녀의 뒤에는 알리스터 대공가의 백합 문양이 새겨진 강철 갑옷을 입은 정예 기사단, ‘알리스터 대공가 수사단’이 삼엄한 무장 상태로 대열을 갖추어 뒤따르고 있었다.


여성이 베일을 천천히 걷어 올리자, 기품 있고 단호한 눈빛을 지닌 중년의 여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알리스터 대공의 미망인, 비아트리스 대공비였다.


“대, 대공비 전하……!”


줄리안 판사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숙였다. 단상 위의 케네스 역시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가슴의 십자가를 꽉 쥐었다. 방청석의 제라드 백작은 아예 자리에서 주저앉을 듯이 비틀거렸다.


비아트리스 대공비는 기품 있는 걸음걸이로 피고인석의 로건을 지나 줄리안 판사의 단상 앞으로 다가갔다. 그녀가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대공가 기사들의 철제 갑옷이 부딪히는 묵직한 마찰음이 연병장을 압도했다.


이 모든 것은 전날 밤, 엘레나가 대공비에게 은밀히 보낸 비밀 전령과 로건의 증거 보존 기록지를 통해 철저히 기획된 움직임이었다. 남편의 갑작스러운 서거에 의문을 품고 있던 대공비는, 교단이 남편의 사인을 조작하려 한다는 명백한 물증을 확인하고 직접 법정으로 친림한 것이었다.


“줄리안 판사, 그리고 케네스 심문관.”


비아트리스 대공비의 서늘한 목소리가 단상 위를 때렸다.


“치유사단이 내 남편의 사인을 단순 심장마비로 결론짓고 서둘러 장례를 치르려 했다는 서류를 보았다. 가문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라는 허울 좋은 핑계로, 남편의 차가운 몸속에 숨겨진 진실을 묻으려 한 자들이 누구인가?”


“전하! 그것은 교단의 신성한 정화 의식에 따른……”


케네스가 다급히 변명하려 했으나, 대공비는 차가운 눈빛으로 그의 말을 잘라냈다.


“입을 다물라, 심문관. 진실을 밝히지 못하고 권력의 뒤에 숨어 사인을 조작하는 신전이야말로 신을 기만하는 자들이 아닌가?”


대공비는 품속에서 순백의 양피지 서한 한 장을 꺼내 줄리안 판사의 단상 위로 거칠게 던졌다. 서한의 하단에는 알리스터 대공가의 붉은 왁스 봉인과 함께, 제국 황실이 보증하는 금빛 옥새 인장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제국 고대 사법 헌장 제7조에 의거하여, 알리스터 대공의 유해에 대한 모든 권한은 미망인인 내게 있다. 나는 내 남편의 억울한 죽음을 밝히기 위해, 이 자리에서 피고인 로건에게 남편의 시신을 해부할 것을 공식적으로 허가한다.”


연병장 전체가 거대한 침묵에 잠겼다.


유족의 공식 허가 서한. 그것도 황실의 옥새가 찍힌 절대적인 법적 면죄부였다. 이 서한이 제출된 이상, 줄리안 판사도, 이단심문소의 케네스도 더 이상 신성모독이나 사령술이라는 프레임으로 로건의 부검을 막아설 법적 명분이 존재하지 않았다.


로건은 쇠사슬에 묶인 오른손을 가볍게 움직여 품속에 숨겨진 엘레나의 은장도의 차가운 감촉을 느꼈다. 그의 입가에 승리의 미소가 번졌다.


대공비는 뒤를 돌아 연병장 정문 너머의 어둠을 향해 단호하게 명령했다.


“남편의 유해를 법정으로 들여보내라. 이 검시관이 남편의 몸속에 숨겨진 추악한 살의를 가려낼 것이다.”


대공비의 단호한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연병장 정문 너머의 어두운 복도에서 육중한 마차의 바퀴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고오오오—*


동료 시체 수거인 잭과 죄수 마차 마부 피터가 이끄는, 시체 냄새와 마력 파동을 외부로 전혀 유출하지 않도록 특수 설계된 ‘시신 이송용 이중 밀폐 마차’가 연병장 법정 중앙을 향해 무겁고 느리게 진입하기 시작했다.

HẾT CHƯƠ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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