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의 고립
“요즘 야간 정리를 참 열심히 하네, 박도현?”
이성민의 목소리는 구관 도서관의 서늘한 공기를 가르며 낮게 내려앉았다. 그의 손에 들린 수기 출입 대장의 모서리가 미세하게 도현의 시야 끝에 걸렸다.
도현은 순간적으로 맥박을 측정했다. 분당 68회. 평정심은 유지되고 있었지만, 뇌세포는 폭발적으로 연산을 시작했다. 이성민은 송민우처럼 주먹을 먼저 휘두르는 삼류 양아치가 아니다. 철저히 논리와 데이터를 바탕으로 상대를 조여오는 학생회 최고의 사냥개. 그의 눈빛은 도현의 감색 도서부 완장을 뚫어버릴 듯 집요하게 고정되어 있었다.
여기서 똑똑하게 대꾸하거나 논리적인 알리바이를 대는 순간, 이성민의 의심은 확신으로 바뀐다. 완벽주의적인 사냥개는 자신과 대등한 수준의 ‘지적 우아함’을 가진 상대를 찾고 있었다. 그렇다면 도현이 취해야 할 태도는 단 하나뿐이었다. 철저한 무가치함. 이성민의 오만한 인지적 편견을 자극해 그 스스로 추적 궤도를 이탈하게 만드는 것.
도현은 어깨를 한껏 움츠리며 고개를 푹 숙였다. 비뚤어진 안경테를 흙먼지가 묻은 손가락으로 어설프게 밀어 올리며, 목소리를 잘게 떨었다.
“아, 서, 서기장님……! 그, 그게…… 죄송합니다. 제가 집안 형편이 조금 어려워서요.”
“집안 형편?”
이성민의 한쪽 눈썹이 해괴한 것을 보았다는 듯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네…… 저희 어머니가 학교 근처에서 작은 세탁소를 하시는데, 요즘 불경기라 월세 내기도 벅차거든요. 한태수 선생님께서 야간 도서 정리 근로학생으로 절 추천해 주셔서…… 이거라도 해야 한 달 차비랑 참고서 값을 겨우 벌 수 있어서요. 서, 서명 대장에 제 이름이 자주 적힌 건…… 어떻게든 한 시간이라도 더 일해서 시급을 채우려고 민지 누나랑 이민우 선배한테 사정사정해서 대신 정리해 주겠다고 한 겁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학칙 위반인가요? 제발 교감 선생님께는 말씀하지 말아 주세요…….”
도현은 비굴할 정도로 손을 비비며 이성민의 눈을 똑바로 마주치지 못하고 바닥을 짚었다. 그의 시선은 이성민의 칼같이 다려진 교복 바지 주머니 근처에 머물렀다.
이성민의 호흡 주기가 미세하게 길어졌다. 팽팽하게 날이 서 있던 그의 어깨 근육이 스르륵 이완되는 것이 보였다. 사냥개의 본능적인 경계심이 ‘가난뱅이 찌질이의 구차한 변명’이라는 지극히 상식적이고 하찮은 현실 앞에 완벽하게 무장해제된 것이다. 이성민이 보기에 박도현이라는 존재는 전교를 뒤흔든 그림자 설계자가 아니라, 하루 몇 천 원의 시급에 목을 매는 비참한 흙수저에 불과했다.
“가난뱅이 냄새가 진동을 하는군.”
이성민은 혐오감이 가득 찬 눈빛으로 도현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들고 있던 수기 대장을 가죽 가방 속에 거칠게 밀어 넣었다.
“장부는 학생회실로 수거해 가겠다. 필적 대조를 해보면 네 구차한 변명이 사실인지 아닌지 금방 드러나겠지. 허튼짓할 머리도 안 되어 보이지만, 만에 하나 대장의 서명이 위조되었거나 공백 시간의 행적이 의심스러우면 그 즉시 교내 장학금 취소는 물론이고 강제 전학 조치까지 취하겠다. 알아들었나, 박도현?”
“네, 네……! 감사합니다, 서기장님! 정말 감사합니다!”
도현은 바닥에 엎드린 채 연신 고개를 숙였다. 이성민은 코웃음을 치며 구두 굽 소리를 요란하게 울리며 도서관을 빠져나갔. 쾅, 하고 굳게 닫히는 도서관 문소리와 함께 숨 막히는 긴장감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바닥에 엎드려 있던 도현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비뚤어졌던 안경을 칼같이 수평으로 맞추는 그의 눈빛에는 방금 전의 비굴함 따위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차갑고 깊은, 심연 같은 눈동자가 이성민이 사라진 문을 응시했다.
‘이성민이 수기 대장을 가져갔다.’
도현은 머릿속 마인드팰리스를 가동해 타임리미트를 연산했다. 비록 이민우와 김민지의 필적을 완벽하게 위조해 두었지만, 이성민이 사설 필적 감정원에 장부를 넘기거나 집요하게 대조를 시작한다면 길어야 사흘, 혹은 나흘 안에 위조 사실이 밝혀질 터였다.
물리적인 알리바이의 한계가 오고 있었다. 적들의 감시망은 점차 아날로그의 영역을 넘어 디지털 전산망 전체로 확장되려 하고 있었다. 학생회장 정우진이 대강당 방송실의 납땜 그을음을 추적하기 시작한 이상, 오프라인으로 쪽지를 전달하고 아날로그 녹음기를 매설하는 방식만으로는 머지않아 한계에 부딪힐 것이 자명했다.
‘암호화된 자체 디지털 보안망이 필요하다. 학생회의 패킷 추적과 와이파이 감시를 완벽히 무력화할 수 있는 전용 메신저와 보안 인프라.’
도현에게는 그 일을 해낼 수 있는 천재적인 기술적 조력자가 절실했다. 머릿속에 성화고등학교 2학년 전교생의 동선 지도가 펼쳐졌다. 그중에서도 가장 구석진 곳, 누구도 눈길을 주지 않는 어둠 속에 처박힌 단 하나의 이름이 붉은빛을 발하며 떠올랐다.
2학년 5반, 임지민.
***
다음 날 방과 후, 성화고등학교 본관 2층은 하교하는 학생들의 소음으로 가득했다. 하지만 도현은 그 화려한 군중 속에서 완벽한 ‘투명인간의 원칙’을 고수하며 5반 교실 앞 복도를 배회하고 있었다. 어깨를 약간 굽히고, 시선은 바닥 15도 각도로 고정한 채 책 수레를 미는 도현의 모습은 그 누구의 경계심도 자극하지 않았다. 학생회 프락치들이 복도 곳곳에서 눈을 부릅뜨고 있었지만, 그들의 시선은 도현의 감색 도서부 완장을 스치고 지나갈 뿐이었다.
도현은 5반 교실 뒷문을 통해 내부를 정밀 관찰했다.
교실 맨 뒷자리 구석, 창가 바로 옆자리에 임지민이 있었다. 그녀는 한여름에 가까운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먼지가 타서 거뭇해진 회색 후드티를 머리 깊숙이 눌러쓰고 있었다. 눈동자를 완전히 가려버린 긴 앞머리, 그리고 귀에 꽂힌 커다란 노이즈 캔슬링 헤드폰은 세상 모든 존재와의 접촉을 거부하겠다는 단단한 성벽처럼 보였다.
임지민. 전교 1위의 수학적 재능과 천재적인 코딩 능력을 가졌으나, 극도의 대인기피증(안면공포증)을 앓고 있는 자발적 아웃사이더.
도현은 그녀의 트라우마 원인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1년 전, 학생회 부회장 한지훈이 교내 익명 커뮤니티 ‘성화고 대나무숲’을 개설했을 당시, 그는 지민의 천재적인 개발 능력을 알아보고 강제로 학생회 전용 성적 조작 프로그램을 만들라고 협박했었다. 지민이 이를 완강히 거절하자, 교활한 한지훈은 대나무숲의 여론 조작 알고리즘을 가동해 지민을 타깃으로 삼았다. 그녀의 얼굴을 악의적으로 합성한 가짜 사진과 입에 담을 수 없는 악성 루머를 유포해 한 여학생의 인격을 완전히 난도질하고 마녀사냥을 주도했던 것이다. 그 사건 이후 지민은 세상과 문을 닫고 교실 구석에서 스스로를 고립시켰다.
‘한지훈이 저지른 추악한 짓의 결과물이지.’
도현은 차가운 분노를 억누르며 지민의 행동 패턴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지민은 책상 위에 아주 낡은 구형 싱크패드 노트북을 올려놓고 있었다. 그녀의 얇은 손가락이 키보드 위를 움직이는 속도는 경이로울 정도였다. 타닥, 타다닥, 탁.
도현은 귀를 기울였다. 지민의 타건 소리(BPM)를 청각적으로 분석했다. 일반적인 타이핑 소리가 아니었다. 일정한 리듬과 주기를 반복하는 기계적인 타건음.
‘분당 650타. 백스페이스 키를 누르는 주기가 거의 없어. 코딩 오류를 실시간으로 머릿속에서 완벽히 연산하며 타이핑하고 있다는 뜻이다.’
도현은 복도 유리창에 반사되는 지민의 노트북 화면을 미세한 각도로 관찰했다. 안경 렌즈의 굴절을 이용해 굴절된 화면의 픽셀 조각들을 조합해 나갔다. 지민의 화면에는 검은색 터미널 창이 띄워져 있었고, 수많은 녹색 코드 줄이 폭포처럼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녀는 학교 공식 인트라넷의 보안 방화벽 취약점을 해킹하고 있었다. 성화고가 도입한 스마트폰 제어 시스템의 감시망을 우회하기 위해, 그녀는 매일 방과 후 이 시간대에 백도어 포트를 생성하고 있었다.
‘보안 패치를 우회하는 고유한 코딩 습관…… 함수 선언부 뒤에 항상 예외 처리(Try-Catch) 루프를 이중으로 설계하는군. 전형적인 오픈소스 다크웹 기여자의 프로그래밍 아키텍처다.’
도현이 지민의 천재성에 감탄하며 그녀의 손가락 움직임을 관찰하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지민의 어깨가 일순 굳어졌다. 타건 소리가 뚝 끊겼다.
극도의 대인 경계심을 가진 천재의 감각은 짐승처럼 예민했다. 지민은 헤드폰을 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누군가 자신을 정밀하게 관찰하고 있다는 미세한 시선과 기척을 본능적으로 감지한 것이다.
후드티 너머로 그녀의 가쁜 호흡 소리가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지민의 쇄골뼈가 불규칙하게 요동쳤다. 호흡 주기(RPM)가 분당 35회 이상으로 치솟았다. 과호흡 발작 증세였다. 지민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노트북 화면을 쾅 닫아버리고, 책상 위에 엎드려 머리를 감싸 쥐었다. 주변의 평범한 공기조차 그녀의 숨통을 조여오는 올가미처럼 느끼는 듯했다.
도현은 즉각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여기서 억지로 다가가 말을 걸거나 위로하려 든다면, 그녀의 마음의 빗장은 영원히 걸려 잠길 터였다. 상처받은 천재에게 어설픈 동정이나 인간적인 접근은 독약과 같았다.
‘직접적인 접촉은 불가능하다. 그녀가 신뢰하는 언어, 오직 데이터와 아날로그의 은밀함으로 접근해야 해.’
도현은 교실 내부의 동선과 감시 카메라의 각도를 머릿속 마인드팰리스로 계산했다. 5반 아이들이 방과 후 체육 수업을 위해 교실을 완전히 비우는 골든타임 50분이 다가오고 있었다.
***
오후 5시 10분. 5반 교실은 텅 비어 있었다.
도현은 감색 도서부 완장을 찬 채, 자연스럽게 5반 교실 뒷문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의 걸음걸이는 먼지처럼 조용했다. 도현은 지민의 빈 책상 앞으로 다가갔다.
그녀가 늘 마시는 편의점 데자와 밀크티 캔이 책상 모퉁이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캔 표면에는 차가운 습기가 맺혀 아래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도현은 주머니에서 ‘세탁소 특제 무취 분필’을 꺼냈다. 이 분필은 냄새가 전혀 나지 않아 교사들의 불시 소지품 검사에도 걸리지 않는 완벽한 위장 도구였다. 일반적인 조명 아래서는 평범한 먼지 얼룩처럼 보이지만, 스마트폰 플래시의 특정 각도 파장 아래서만 미세하게 반사광을 발하는 특수 안료가 배합되어 있었다.
스슥.
도현은 지민의 책상 우측 하단 모퉁이에 가볍게 형광 반사 표식을 그렸다. 지민이 노트북을 올려놓을 때 오직 그녀의 시선 각도에서만 은은하게 반짝일 이정표였다.
그리고 도현은 품에서 정교하게 접힌 낡은 종이 메모 한 장을 꺼냈다. 아날로그 우선의 원칙에 따른 수기 난수표가 적힌 메모였다. 도현은 데자와 캔을 살짝 들어 올려, 그 차가운 밑바닥에 메모를 숨기듯 끼워 넣었다.
메모에는 지민이 방금 전까지 노트북으로 뚫으려다 실패했던 학교 인트라넷 방화벽의 진짜 백도어 포트 번호가 정교하게 적혀 있었다.
[Port: 443 -> Bypass Redirect: 8080]
그리고 그 밑에 나지막한 손글씨로 적힌 단 한 줄의 문장.
[당신을 가둔 그 대나무숲의 알고리즘을, 나와 함께 깨부수지 않겠습니까.]
도현은 메모를 완전히 고정시킨 뒤, 책상 위의 먼지 상태와 의자의 각도를 단 1밀리미터의 오차도 없이 완벽하게 원래대로 되돌려 놓았다. 현장 완전 복구 수칙의 이행이었다.
도현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5반 교실을 나섰다. 복도 창가 너머로 지민의 날카로운 트라우마를 유발했던 한지훈이 학생회 간부들과 함께 거만한 걸음걸이로 걸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도현은 안경테를 쓸어내리며 차갑게 미소 지었다.
천재를 가둔 고독의 벽에, 마침내 보이지 않는 균열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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