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쇄된 진실
최강우는 헤드폰을 귀에 고쳐 쓰며, 손을 부르르 떨기 시작했다. 헤드폰 너머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너무나 생생했고, 그 내용 또한 믿기 힘들 만큼 추악했다. 백승철 회장의 거만하고 묵직한 음성과 임용태 교감의 비굴하게 굽실거리는 아첨. 송민우의 학폭 기록을 세탁하고 피해자인 강준혁을 가해자로 둔갑시키려는 추악한 밀실 거래의 전말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이건…… 진짜다.”
강우의 입술 사이로 마른 탄식이 흘러나왔다. 학생회의 압박으로 신문부 예산이 전액 삭감될 위기에 처해 좌절하고 있던 젊은 언론인의 심장에, 거대한 진실의 주파수가 다이렉트로 내리꽂히고 있었다.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기사를 쓰면 신문부를 완전히 폐쇄하겠다는 한지훈 부회장의 협박이 뇌리를 스쳤지만, 이 녹음 파일을 듣고도 침묵하는 것은 기자로서의 죽음을 의미했다.
그때였다. 신문부실의 낡은 철문이 거칠게 열리며 싸늘한 구두 굽 소리가 정적을 깼다.
“최강우 부장, 밤늦게까지 고생이 많네.”
얄브스름한 입술에 비열한 미소를 지은 학생회 부회장 한지훈이었다. 그의 뒤에는 팔에 규율부 완장을 찬 우람한 체격의 학생들이 버티고 서 있었다. 지훈은 무테안경을 치켜올리며 최강우의 책상 위를 날카롭게 스캔했다.
“내일 아침 교무 회의에서 신문부 예산 전액 삭감안과 함께 공식 폐부 절차가 최종 결재될 예정이야. 혹시라도 쓸데없는 활자를 단 한 줄이라도 찍어내서 밖으로 돌릴 생각은 하지 마. 네 학생부 종합 전형 추천서까지 백지화되는 꼴을 보고 싶지 않다면 말이지.”
지훈은 강우의 노트북 화면을 흘깃 보더니, 인쇄실로 이어지는 안쪽 문을 가리키며 규율부원들에게 지시했다.
“내일 아침 행정실 직원들이 와서 장비를 전면 봉쇄하기 전까지 이 방 주변을 철저히 감시해. 쥐새끼 한 마리도 들어오거나 나가지 못하게.”
지훈이 차가운 비웃음을 남기고 사라진 뒤, 신문부실 내부에는 숨 막히는 침묵만이 맴돌았다. 규율부원 두 명이 문 앞 복도에 버티고 서서 팔짱을 꼈다. 최강우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이미 노트북 안에는 녹취록의 대화 내용을 활자화한 ‘호외(Special Edition) 신문’의 최종 편집본이 완성되어 있었다. 인쇄기만 돌리면 500부의 진실이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었지만, 문 앞의 사냥개들이 눈을 부릅뜨고 있는 한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여기까지인가……”
강우가 절망 어린 혼잣말을 내뱉으며 모니터를 끄려던 찰나, 신문부실 구석에 쌓여 있던 낡은 과월호 신문 더미 뒤편 어둠 속에서 조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좌절할 시간은 없습니다, 선배.”
강우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어둠 속에서 걸어 나온 것은 감색 도서부 완장을 찬 2학년 3반의 박도현이었다. 유행이 지난 검은색 뿔테 안경 너머의 눈빛은 비정상적일 만큼 차분하고 냉철했다. 도현은 주머니에서 아버지가 남겨준 은색 줄자를 꺼내 손끝으로 쓸어내리며 강우의 책상 앞으로 다가왔다.
“박도현……? 네가 왜 여기에……”
“선배가 기사를 인쇄하기만 한다면, 배포는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배포라고? 문 앞에 규율부 놈들이 지키고 서 있어! 인쇄기 소리만 나도 들이닥쳐 장비를 다 박살 낼 텐데 어떻게 인쇄를 하고, 어떻게 이 무거운 신문 뭉치를 밖으로 빼돌린단 말이야!”
강우가 목소리를 낮추어 다급하게 소리쳤다. 도현은 안경테를 살짝 고쳐 쓰며 나지막하게 대답했다. 그의 톤은 흔들림이 없었다.
“인쇄기 소음은 복도에서 감지할 수 없습니다. 지금 본관 지하 보일러실의 대형 환풍기가 가동되는 시간이니까요. 그 진동과 소음이 건물 전체에 울리기 때문에 2층 신문부실의 미세한 모터 소리는 완벽히 묻힙니다. 문제는 인쇄된 500부의 신문을 밖으로 빼돌리는 물리적 경로입니다.”
도현은 머릿속의 ‘마인드팰리스’를 가동했다. 성화고등학교 본관의 모든 출입구와 CCTV 각도, 그리고 이 시간대에 움직이는 인적 물류 동선이 입체적인 홀로그램처럼 그의 머릿속에 매핑되었다.
“적들은 디지털 감시망과 규율부의 물리적 검문으로 우리를 가두었다고 믿고 있습니다. 하지만 기득권의 오만함은 언제나 자신들이 ‘투명인간’ 취급을 하는 가장 낮은 곳의 존재들을 계산에 넣지 않죠. 그 맹점을 찌를 겁니다.”
도현은 품에서 구형 무전기를 꺼내 짧은 신호를 보냈다.
[PDH: 미순 아주머니, 지금 신문부실 앞 복도로 대형 쓰레기 수거 카트를 밀고 와 주십시오. 두식 형님은 행정실 공식 문서 수령용 빈 박스 세 개를 들고 본관 후문으로 진입해 주십시오.]
무전기 너머로 짧은 수신음이 들려왔다. 도현은 최강우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인쇄기를 가동하십시오. 시간은 정확히 15분입니다.”
강우는 도현의 안경 너머로 번뜩이는 기묘한 지략적 확신에 압도당했다. 더 이상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강우는 마우스를 움켜쥐고 인쇄 실행 버튼을 눌렀다. 드르륵, 하며 신문부실 안쪽의 구형 고속 인쇄기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도현의 예측대로, 창밖 지하 보일러실에서 불어오는 거대한 환풍기 소음이 건물 벽면을 타고 웅웅거리며 인쇄기의 진동을 완벽하게 상쇄시켰다.
정확히 15분 뒤, 뜨끈뜨끈한 잉크 냄새를 풍기는 500부의 호외 신문이 대형 묶음으로 인쇄실 바닥에 쌓였다. 타이밍에 맞춰 신문부실의 철문이 가볍게 세 번 두드려졌다. 도현이 문을 열자, 큰 쓰레기 수거 카트를 밀고 위생 장갑을 낀 본관 청소부 최미순 아주머니가 들어왔다.
“도현 학생, 준비되었어요.”
아주머니는 카트 밑바닥에 숨겨진 ‘이중 바닥 수거함’의 뚜껑을 열었다. 도현은 신속하게 신문 300부를 세 개의 묶음으로 나누어 이중 바닥 깊숙한 곳에 밀어 넣었다. 그 위로 무겁고 냄새나는 젖은 바닥 걸레들과 시커먼 쓰레기봉투들이 겹겹이 덮였다. 일반적인 규율부원들이나 보안 요원들이 더럽고 악취가 나는 쓰레기통 밑바닥까지 손을 집어넣어 정밀 수색할 리는 만무했다. 기득권층의 생리적인 혐오감을 역이용한 완벽한 아날로그 위장막이었다.
동시에 본관 후문 방향에서는 택배 기사 강두식이 ‘행정실 제출용 공식 문서’라는 라벨이 붙은 대형 택배 상자 세 개를 수레에 싣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왔다. 두식은 신문부실 내부로 자연스럽게 진입하여 나머지 200부의 신문을 상자 안에 넣고, 행정실 전용 공식 봉인 테이프로 입구를 단단히 밀봉했다.
“자, 그럼 출발해 볼까요?”
두식이 호쾌하게 웃으며 수레를 밀었다.
진짜 위기는 본관 1층 로비 출입구였다. 한지훈의 지시를 받은 규율부장 김호진과 대원들이 퇴근하는 학생들의 가방을 불시 검문하며 출입구를 통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최미순 아주머니가 쓰레기 카트를 밀고 로비로 들어서자, 김호진이 날카로운 시선으로 아주머니를 멈춰 세웠다.
“아주머니, 잠깐만요. 카트 안에 든 거 뭡니까?”
“어머, 학생. 하루 종일 복도랑 교실에서 나온 쓰레기봉투랑 더러운 걸레들이지 뭐겠어? 냄새나니까 저리 비켜요.”
아주머니가 짐짓 퉁명스럽게 쏘아붙였지만, 김호진은 의심의 끈을 놓지 않고 카트 안쪽을 랜턴으로 비추었다.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 도현은 본관 2층 난간 그늘에 서서 ‘시선 유도 트랩(Gaze Induction Trap)’을 발동할 타이밍을 계산했다. 도현은 주머니에서 묵직한 구리 동전 몇 개를 꺼내, 복도 반대편의 철제 자판기 동전 투입구 방향으로 정확하게 튕겼다.
쨍그랑! 떼구르르——
고요한 로비에 쇠붙이가 부딪쳐 굴러가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어? 저기 누구 있어!”
김호진과 규율부원들의 시선이 일제히 소리가 난 어두운 복도 모퉁이로 쏠렸다. 그들의 주의 집중이 분산되는 골든타임은 단 5초.
“빨리 지나가세요.”
도현의 나지막한 속삭임과 동시에, 최미순 아주머니는 카트를 밀고 로비 자동문을 신속하게 통과해 어둠 속으로 빠져나갔고, 뒤따르던 택배 기사 강두식 역시 행정실 공식 마크가 찍힌 상자를 수레에 실은 채 경비원의 무의식적인 거수경례를 받으며 유유히 교문을 통과했다. 화려한 디지털 감시 카메라와 삼엄한 규율부의 눈을 완벽하게 무력화한 아날로그 물류망의 승리였다.
새벽 5시 30분. 아직 어둠이 가시지 않은 이른 아침의 성화고등학교 본관.
도현과 1학년 도서부 신입 한유리는 오피스텔 임시 기지에서 전달받은 500부의 호외 신문을 가방에 나누어 담고 본관 내부로 침투했다. 도현은 머릿속으로 본관 복도 천장에 설치된 돔형 카메라들의 15초 회전 주기를 완벽하게 연산했다.
“유리야, 내 발걸음 템포에 정확히 맞춰서 움직여. 카메라가 오른쪽 벽면을 비추는 3초 동안 왼쪽 기둥 그늘로 슬라이딩하는 거야.”
“네, 선배.”
도현은 감색 도서부 완장을 차고 소리 없이 복도를 횡단했다. ‘CCTV 사각지대 보행’ 수칙에 따라, 카메라 렌즈의 반사광 각도를 완벽하게 피해 가며 2학년 교실들을 차례로 돌기 시작했다. 유리는 도현의 그림자 뒤에 바짝 붙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교실 문을 소리 없이 열고 들어가, 2학년 전 학급의 책상 위에 한 부씩 신문을 올려놓는 단순하고도 정교한 작업이 반복되었다. 밤샘 배포 작업으로 인해 도현의 눈은 극도로 건조해졌고 온몸의 근육이 비명을 질렀지만, 그의 손길은 멈추지 않았다. 마침내 마지막 3반 교실의 맨 앞자리 책상 위에 신문을 올려놓는 것으로 500부의 배포 작전이 완벽하게 끝났다.
오전 8시 10분. 아침 조례 시간.
교실로 들어서는 학생들의 비명 섞인 웅성거림이 복도 전체를 뒤흔들었다. 책상 위에 놓인 강렬한 헤드라인의 호외 신문이 아이들의 눈을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백승철 회장과 임용태 교감의 추악한 거래: 송민우 학폭 무마 및 강준혁 가해자 조작 녹취록 단독 폭로!]
학생들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신문에 인쇄된 녹취록 전문을 소리 내어 읽기 시작했다. 돈과 권력으로 법을 유린하려던 기득권 카르텔의 위선이 적나라하게 활자화되어 전교생의 손 위에 쥐어져 있었다.
“이거 진짜 교감 목소리잖아! 대박……”
“송민우가 준혁이를 일방적으로 때려놓고 쌍방 폭행으로 조작하려고 했다고?”
여론은 순식간에 폭발했다. 한지훈이 그동안 조작해 왔던 가짜 평판의 둑이 단 한 장의 종이 신문 앞에서 무참히 부서져 내리고 있었다.
바로 그때, 2학년 3반 교실 앞문이 거칠게 열리며 담임 서태수 교사가 들어섰다. 서태수는 교실 안의 이질적인 기류와 아이들이 들고 있는 신문을 본 순간,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지휘봉을 쥔 그의 손이 흉하게 떨렸다.
“이, 이게 무슨 짓들이야! 당장 그 가짜 뉴스 종이 쪼가리 치우지 못해!”
서태수는 교탁 앞자리 학생의 책상으로 돌진해 신문을 거칠게 낚아채며 찢어발기기 시작했다. 하얗게 질린 얼굴로 비명을 지르듯 소리치는 담임의 추악한 반응은, 역설적으로 신문에 적힌 내용이 100% 진실임을 교실 안의 모두에게 증명해 줄 뿐이었다.
도현은 교실 맨 뒷자리 창가 구석 책상에 앉아, 안경테를 조용히 밀어 올리며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서태수는 찢어진 신문 조각을 바닥에 내팽개쳤지만, 이미 수백 명의 눈동자에 새겨진 진실까지 찢어발길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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