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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한 번의 방화쇠 (One-Sh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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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갠 성화고등학교의 아침 공기는 축축하고 비릿했다. 운동장 가장자리의 낡은 조경 수풀 사이로 스며든 물기가 흙냄새를 무겁게 끌어올리고 있었다.


박도현은 교복 조끼 안감 깊숙한 곳에 넣어둔 아날로그 카세트테이프의 묵직한 감촉을 느꼈다. 어젯밤, 송민우 패거리가 철수하자마자 폐쇄된 구 매점 창고의 천장 대들보 틈새에서 무사히 회수한 물건이었다. 테이프 안에는 송민우가 제 열등감과 나르시시즘에 취해 쏟아낸 범행 전말과 부회장 한지훈의 사주 정황이 고스란히 채록되어 있었다.


준혁의 희생이 만든 결과물이었다. 준혁은 현재 보건 교사 김미영의 비호 아래 보건실 안쪽 침대에 누워 있었다. 오른쪽 어깨뼈에 가해진 쇠파이프의 충격으로 전치 3주의 심한 타박상과 미세한 출혈이 있었지만, 준혁은 도현에게 테이프를 건네받는 순간에도 입꼬리를 올리며 조용히 웃었다.


‘도현아, 난 괜찮아. 놈들의 자백을 받아냈으니 내 어깨는 아깝지 않아.’


준혁의 단단한 신뢰는 도현의 심장 가장 깊은 곳에 얹힌 묵직한 부채감이 되었다. 그리고 그 부채감은 기득권의 오만함을 송두리째 부숴버릴 차가운 지략의 불꽃으로 정제되었다.


도현은 다락방에서 분석했던 또 하나의 물증을 떠올렸다. 서지혜가 민우의 가방에서 꺼내 흔들었던 시험지 파지 조각. 그 모퉁이에서 검출된 미세한 기계식 방청유 성분은 일반 교무실 복사기가 아닌, 본관 4층 교무처 깊숙한 곳에 위치한 ‘기밀 금고’의 경첩에만 극비리에 사용되는 특수 PFPE(Perfluoropolyether) 윤활유였다. 한지훈이 행정동 마스터키를 무단 도용해 금고를 직접 열고 시험지를 탈취했음을 입증하는 과학적이고 움직일 수 없는 물리적 연계선이었다.


‘CCTV 원본 영상 속 송민우의 3.5도 골반 비대칭 보행 지문, 그리고 이 아날로그 자백 테이프와 PFPE 윤활유 분석표. 세 개의 단서가 하나의 과녁을 가리키고 있다.’


도현은 머릿속 ‘기억의 도서관’을 가동했다. 징계위원회가 열리기까지 남은 시간은 이제 겨우 1시간 남짓. 적들은 자신들의 완벽한 사법적 시스템 안에서 민우를 희생양으로 삼아 사건을 조용히 매장하려 할 것이다. 그 견고한 성벽을 무너뜨리기 위해서는 증거를 쪼개어 제시하는 어설픈 반론은 통하지 않는다.


‘최종 폭로의 단일화(One-Shot Exposure).’


도현이 세운 그림자 정보망의 가장 강력한 타격 규칙이었다. 적들이 빠져나갈 구멍을 찾기 전에, 전교생과 학부모, 그리고 교사들이 모두 집결한 가장 공식적인 석상에서 단 한 번의 기습으로 카르텔을 완전히 붕괴시켜야 한다.


오전 8시 15분.


도현은 감색 도서부 완장을 왼쪽 상완에 단단히 차고, 구관 지하의 어두운 보일러실 배관 통로를 통해 소리 없이 움직였다. 일제강점기 방공호로 지어져 지금은 소실된 설계도 속에만 존재하는 이 지하 통로는 본관 행정동 지하를 거쳐 대강당 지하 중앙 방송 통제실로 은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감시 카메라가 단 한 대도 닿지 않는 완벽한 물리적 사각지대였다.


통제실 철문 앞에 다다르자, 어둠 속에서 푸른색 셔츠를 입은 실루엣이 나타났다. 방송부의 장비 노예이자 반란자인 장동현이었다. 동현은 목에 무선 마이크 헤드셋을 걸친 채, 극도의 긴장감으로 온몸을 미세하게 떨고 있었다.


“도, 도현아…… 진짜 이 방법밖에 없는 거야? 걸리면 난 퇴학이야. 방송부 선배들이 나한테 뒤집어씌울 거라고.”


도현은 걸음을 멈추고 장동현의 동공을 가만히 응시했다. 동현의 호흡 주기는 분당 26회로 치솟아 있었고, 손가락 끝은 차갑게 식어 있었다. 도현은 조용히 다가가 동현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 흔들림 없이 차분했다.


“동현아. 방송부 선배들의 가혹행위 일지가 담긴 USB를 내가 왜 네 책상에 두었는지 기억해?”


“…….”


“기득권은 너에게 가산점이라는 가짜 사탕을 주며 장비 노예로 부려 먹다가, 일이 터지면 가장 먼저 너를 꼬리로 자를 거야. 송민우가 그랬듯이. 넌 그들의 사냥개가 아니야. 네가 가진 기술의 주인을 스스로 결정해.”


도현의 나지막한 음성은 동현의 내면에 억눌려 있던 기수 열외에 대한 증오심과 정의감을 정교하게 자극했다. 동현의 쇄골 떨림이 멈추고, 눈빛에 단호한 결의가 깃들었다.


“……알았어. 믹서 뒤편 오디오 아웃라인에 직렬 연결할게.”


동현은 주머니에서 인두기와 납땜 도구를 꺼냈다. 도현은 주머니에서 ‘교내 방송 제어용 무선 수신기’ 칩을 꺼내 동현에게 건넸다. 동현은 익숙한 손놀림으로 방송실 메인 믹서 콘솔의 섀시를 열고, 아날로그 오디오 출력 보드 회로 사이에 칩을 직렬로 납땜하기 시작했다. 타닥거리는 미세한 납땜 연기가 어두운 통제실 안을 채웠다.


그 시각, 본관 1층의 CCTV 통제실에서는 경비원 오윤식이 도현과의 약속대로 순찰 동선을 인위적으로 조정하고 있었다. 덕분에 방송실 주변의 보안 순찰은 완벽하게 30분 동안 마비된 상태였다.


“설치 끝났어.”


동현이 땀을 닦으며 믹서 커버를 닫았다. 겉보기에는 평소와 전혀 다름없는 방송 콘솔이었다. 하지만 내부에는 도현의 스마트폰 신호를 받아 전교의 모든 전광판과 스피커를 강제로 장악할 수 있는 유령 칩이 숨겨져 있었다.


도현은 스마트폰을 꺼내 지민이 오피스텔 기지에서 대기 중인 Clover 메신저를 켰다.


[LJM: 서버 세팅 100%. P2P 우회 스트리밍 주파수 락 완료. 도현아, 클릭 한 번이면 전교생 스마트폰 인트라넷 화면까지 동시에 강제 팝업 송출 대기 모드로 전환돼.]


[PDH: 대기해. 징계위가 시작되는 순간 격발한다.]


오전 8시 50분.


본관 1층 소회의실의 굳게 닫힌 문 너머로 무겁고 숨 막히는 침묵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소회의실 중앙의 기다란 마호가니 테이블 상석에는 교감 임용태가 대머리를 감추기 위해 길게 넘긴 옆머리를 만지작거리며 앉아 있었다. 그의 옆에는 담임 서태수 교사가 신경질적으로 지휘봉을 만지작거렸고, 맞은편에는 송민우의 아버지이자 지역 유지인 백승철이 번쩍이는 금시계를 찬 채 거만하게 턱을 치켜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차가운 기득권의 시선들 한가운데, 김민우가 땀에 젖어 헝클어진 머리칼을 숙인 채 앉아 있었다. 민우의 어깨는 잔뜩 풀이 죽어 있었고, 손가락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김민우 학생.”


교감 임용태가 고압적인 목소리로 서류를 탕탕 쳤다.


“이미 네 가방에서 발견된 심화 수학 시험지 파지 조각이 명백한 물증으로 존재해. 더 이상 무의미한 부인으로 학교의 명예를 실추시키지 말고, 이 자백서에 서명해라. 그래야 강제 전학 수준에서 조용히 마무리 지을 수 있어.”


“전…… 정말 아닙니다. 전 금고 근처에도 가지 않았습니다……”


민우의 목소리는 흐느낌에 가까웠다. 하지만 서태수 교사는 차가운 조소를 지으며 지휘봉으로 테이블을 탁 쳤다.


“민우야, 선생님이 네 성적이 갑자기 폭등했을 때부터 알아봤다. 부정한 방법으로 전교 등수를 올리려 한 건 심각한 범죄야. 서명해. 더 이상 시간 끌지 마라.”


백승철 역시 거만하게 거들었다.


“요즘 애들은 겁이 없단 말이야. 남의 자식 앞길 막으려고 이런 추악한 짓을 벌이다니. 어서 처리합시다, 교감 선생님. 바쁜 사람 시간 빼앗지 말고.”


회의실 벽면의 아날로그 시계 초침이 오전 9시 정각을 가리키는 순간, 교감 임용태가 엄숙한 표정으로 의사봉을 쥐어 올렸다.


“그럼, 성화고등학교 학폭위 및 징계위원회의 최종 결정을 선고하겠다. 피징계자 김민우 학생에 대해 시험지 탈취 및 부정행위 혐의로 즉각적인 강제 전학 처분을——”


임용태의 손에 들린 의사봉이 마호가니 테이블을 향해 하강하기 시작했다.


바로 그 순간, 대강당 지하 중앙 방송 통제실의 어둠 속에서 도현이 숨을 죽였다. 그의 시야 속에서 모니터의 오디오 파동이 미세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도현은 마인드팰리스를 가동해 본관 소회의실 내부의 움직임을 초 단위로 동기화해 연산했다.


‘지금이다.’


도현은 방송 콘솔의 마스터 페이더를 힘차게 밀어 올렸다. 그의 길고 단단한 손가락이 스마트폰 화면 위, 지민이 설계한 최종 송출 마우스 클릭 버튼 위에 얹어졌다.


도현의 검지 손가락 끝이 화면을 가볍게 누르는 순간.


팅——!


본관 복도의 대형 LED 전광판, 급식실의 모니터, 대강당의 거대한 스크린, 그리고 징계위원회 소회의실 내부의 빔프로젝터 화면까지, 성화고등학교 전역에 배치된 모든 전자기기의 화면이 일제히 핏빛처럼 붉은 적색으로 암전되었다.


동시에 교실과 복도의 모든 스피커에서 거친 주파수 마찰음이 일며 전교생의 스마트폰 화면이 일제히 강제 송출 대기 모드로 전환되었다. 숨이 멎을 듯한 기묘한 정적이 학교 전체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HẾT CHƯƠ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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