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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자의 눈에 비친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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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화고등학교 본관 로비 중앙에는 전교생의 숨통을 조이는 거대한 유령이 서 있었다. 가로 4미터, 세로 2미터에 달하는 대형 LED 전광판. 푸른빛을 뿜어내는 그 화면에는 1등부터 600등까지, 전교생의 모의고사 성적과 내신 등급이 실시간으로 박제되어 있었다.


화면의 가장 높은 곳, 이른바 ‘천상계’라 불리는 1등급의 맨 위에는 언제나 단 하나의 이름이 고정되어 있었다.


[1등: 2학년 1반 정우진]


그 이름은 성화고에서 단순한 성적 우수자가 아니었다. 유력 국회의원의 아들이자 차기 재단 후계자로 거론되는 존재, 법과 교칙 위에 군림하는 무형의 권력이었다. 전광판 앞을 지나가는 학생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고개를 숙였다. 그들의 시선은 전광판 하단, 붉은색으로 물든 7등급 이하의 ‘아웃사이더’ 영역을 피하려 애쓰고 있었다. 성적과 집안 배경이 곧 인간의 등급이 되는 이곳에서, 낙인은 곧 사회적 사형 선고와 같았기 때문이다.


박도현은 그 차가운 푸른 빛의 사각지대, 로비 구석의 그늘에 서 있었다.


감색 성화고 교복은 다림질 선이 칼같이 잡혀 있었지만, 어깨는 약간 구부정했다. 유행이 지난 검은색 뿔테 안경 너머로 도현은 전광판을 바라보는 학생들의 걸음걸이를 관찰했다. 도현의 왼쪽 팔뚝에는 먼지가 묻은 감색 ‘도서부 완장’이 채워져 있었다. 누구도 도현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그는 그저 매일 아침 도서실 책 수레를 밀며 복도를 배회하는, 존재감 제로의 아웃사이더에 불과했으니까.


하지만 도현의 머릿속은 전교생의 동선과 행동 패턴을 실시간으로 기록하는 거대한 데이터베이스였다.


‘2학년 2반 최성재. 보폭 65센티미터. 왼쪽 어깨가 평소보다 2도 낮아짐. 아침부터 일진 무리에게 상납금을 뜯겼군.’

‘3반 오진우. 시선 각도 아래 15도 고정. 스마트폰 게임 화면의 반사광 강도로 보아 밤샘 플레이를 숨기려 함.’


도현의 가문은 학교 근처에서 작은 ‘도현 세탁소’를 운영하고 있었다. 어릴 적부터 수천 벌의 옷을 다림질하며, 도현은 기계적인 반복 속에서 아주 미세한 보풀, 얼룩, 섬유의 결을 포착하는 극강의 관찰력을 길렀다. 옷을 보면 그 사람의 하루가 보였다. 소매의 마찰 흔적으로 필기 습관을 읽었고, 깃에 배어 있는 미세한 향수나 담배 냄새로 그가 방과 후에 다녀온 은밀한 장소를 알아냈다. 이곳 성화고에서 도현은 완벽한 위장 신분인 ‘도서부원’의 탈을 쓴 채, 모든 기득권의 움직임을 감시하는 보이지 않는 눈이었다.


그리고 오늘, 그 차가운 계급도의 균열이 도현이 속한 2학년 3반 교실에서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김민우, 너지?”


조용하던 3반 교실의 공기를 찢고 날카로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만년 전교 2등이자 강박증적인 성적 집착자인 서지혜였다. 그녀의 눈 밑에는 짙은 다크서클이 내려앉아 있었고, 손톱은 피가 날 정도로 물어뜯겨 있었다. 지혜는 거친 걸음걸이로 교실 중앙에 앉아 있던 평범한 학생, 김민우의 책상 앞으로 다가갔다.


민우는 흠칫 놀라며 어깨를 움츠렸다. 그의 손에 쥔 샤프펜슬이 잘게 떨렸다.


“지, 지혜야? 갑자기 무슨 소리야……?”


“시치미 떼지 마. 이번 ‘심화 수학’ 내신 시험지, 교무실 금고에서 유출된 거 말이야. 범인 너잖아.”


교실 안의 모든 소음이 단숨에 휘발되었다. 아이들의 시선이 일제히 두 사람에게 꽂혔다. 시험지 유출. 최근 일주일 동안 성화고 전체를 뒤흔들며 교감과 담임 교사들이 안달 나게 만들었던 그 금기의 단어였다. 상위 1% 엘리트 집단의 성적을 보존하기 위해 학교 측이 극비리에 덮으려 했던 사건이 교실 한복판에서 폭로된 것이다.


“나, 난 정말 아니야! 난 교무실 근처에는 가본 적도 없어!”


민우의 목소리가 뒤집어졌다. 그의 얼굴은 순식간에 흙빛으로 변했다. 소심하고 존재감 없던 민우는 이러한 집단적인 시선 집중을 견딜 수 있는 성격이 아니었다.


“거짓말하지 마. 내가 오늘 아침에 익명 제보를 받았어. 네가 야간 자율학습 때 복도 끝 교무실 주변을 서성거리는 걸 본 사람이 있대. 게다가 이번 모의고사에서 네 수학 점수만 이상하게 폭등했잖아!”


서지혜의 목소리에는 확신에 찬 독기가 서려 있었다. 전교 1등 정우진을 꺾기 위해 하루 18시간씩 공부하던 그녀에게, 부정한 방법으로 성적을 올린 자의 존재는 자신의 모든 노력을 모욕하는 쓰레기와 다름없었다. 지혜의 선동에 교실 안의 평범한 대다수 학생들도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침묵하는 군중은 언제나 확실한 희생양을 원했다. 자신들의 낮은 등급에 대한 분노를 쏟아부을 수 있는 만만한 표적을.


그때, 교실 앞문이 거칠게 열리며 3반 담임이자 기득권 옹호론자인 서태수 교사가 들어섰다.


서태수는 금테 안경을 치켜올리며 교탁을 지휘봉으로 날카롭게 내리쳤다. 탕! 하는 소리와 함께 교실이 다시 얼어붙었다.


“아침부터 무슨 소란들이냐? 서지혜, 무슨 일이지?”


“선생님, 김민우 가방을 수색해야 합니다. 이번 심화 수학 시험지 유출범이 김민우라는 확실한 제보가 있습니다.”


서태수 담임의 시선이 민우에게 닿았다. 그 눈빛에는 교육자로서의 걱정이나 진실을 밝히려는 의지 따위는 추호도 없었다. 오직 귀찮은 사건을 신속히 종결지어, 자신이 관리하는 우등생들의 생기부에 오점을 남기지 않겠다는 속물적인 계산만이 번뜩였다. 서태수는 정우진의 아버지인 국회의원 정태식 라인에 줄을 대기 위해 안달이 나 있는 인물이었다.


“민우야.”


서태수의 목소리가 낮고 위협적으로 깔렸다.


“선생님이 좋게 말할 때 가방 열어라. 정말 떳떳하다면 검사에 응하지 못할 이유가 없겠지?”


“선생님, 진짜 아니에요! 저 자습 시간 내내 독서실에 계속 있었어요! 독서실 대장도 확인해 보세요!”


민우는 억울함에 눈물을 흘리며 호소했다. 그것은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필사적인 알리바이 주장이었다. 그러나 서태수는 차갑게 비웃었다.


“내가 이미 확인했다, 민우야. 그날 야간 자율학습 독서실 출입 대장에 네 서명은 빠져 있더구나. 어디서 감히 교사 앞에서 뻔뻔하게 거짓말을 해?”


“그, 그건 제가 깜빡하고 서명을 안 한 것뿐이에요! 진짜로……”


“시끄럽다!”


서태수의 권위적인 호통에 민우의 항변은 완벽하게 묵살당했다. 교실 안의 공기는 이미 민우를 범죄자로 낙인찍고 있었다. 서지혜는 승기를 잡았다는 듯 입꼬리를 미세하게 올렸다.


도현은 교실 맨 뒷자리, 창가 구석에서 그 광경을 한 걸음 뒤로 물러서서 지켜보고 있었다.


안경테를 가볍게 밀어 올리며, 도현의 예리한 시선이 서지혜의 손끝과 서태수 담임의 목울대에 고정되었다.


‘서지혜. 말은 당당하지만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어. 불안을 숨기기 위해 일부러 목소리 톤을 평소보다 15헤르츠 이상 높였군. 그리고 서태수 담임…….’


도현은 서태수의 목소리 톤과 호흡 주기를 분석했다. 서태수는 교사로서 분노한 것이 아니었다. 그의 시선은 민우의 가방이 아니라, 이미 완성된 시나리오의 다음 장을 기다리듯 교실 앞문 쪽을 힐끗거리고 있었다. 그것은 사전에 약속된 연극을 수행하는 연기자의 전형적인 행동 패턴이었다.


‘이건 기획된 누명이다.’


도현의 가슴 밑바닥에서 뜨거운 불길이 치솟았다. 2년 전, 기득권의 위선과 학교 폭력의 덫에 걸려 억울하게 스스로 생을 마감했던 친동생 박도진의 마지막 모습이 뇌리를 스쳤다. 동생 역시 저렇게 무기력하게, 아무런 물증도 없이 계급의 희생양으로 던져졌었다. 그 비참한 기억이 도현의 심장을 난도질했다.


‘또다시 내 눈앞에서 똑같은 비극이 반복되게 두지는 않겠다.’


도현은 주머니 속에서 은색 줄자를 꽉 쥐었다. 아버지가 물려준 유품이자, 사물의 정확한 규격을 측정할 때 쓰던 도구. 도현은 차갑게 이성을 다잡았다. 정면으로 나서서 서태수와 서지혜를 막아서는 것은 하책 중의 하책이었다. 그들은 교사의 권위와 학부모회의 백그라운드를 쥐고 있었다. 이기기 위해서는 철저히 아날로그적인 맹점을 포착하고, 적들이 스스로 파놓은 함정의 모순을 찔러야 했다.


그때, 서지혜가 민우의 가방 지퍼를 거칠게 낚아채 아래로 찢듯이 열어젖혔다.


쫘악! 하는 비명 같은 소리와 함께 민우의 가방이 뒤집혔다. 바닥으로 쏟아지는 교과서와 필기구들.


그리고 그 소란스러운 낙하 속에서, 서지혜의 손가락이 가방 안쪽 비밀 주머니로 파고들었다. 그녀의 손끝이 무언가를 낚아채 허공으로 들어 올렸다.


반쯤 구겨지고 찢어진 수십 장의 종이 조각들.


그 종이의 맨 윗장에는 굵은 고딕체로 선명하게 인쇄된 글자가 박혀 있었다.


[2025학년도 2학년 1학기 중간고사 심화 수학 출제 기안서 (비밀)]


교실 안이 단숨에 경악으로 물들었다. 민우는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하얗게 질려 굳어버렸고, 서태수 담임은 지휘봉을 치켜들며 차가운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서지혜가 그 위조된 시험지 파지 조각들을 교실 중앙에서 흔들어 보이며 여론을 장악하는 바로 그 순간.


도현의 눈동자가 안경 너머로 그 종이 조각들에 고정되었다. 세탁소에서 수만 장의 옷감과 종이 영수증을 다루며 단련된 도현의 시각 센서가 그 찢어진 종이의 섬유 결을 프레임 단위로 쪼개어 분석하기 시작했다.


‘종이의 평량이 이상해. 일반 학교 복사용지인 80g이 아냐. 광택과 두께로 보아 최소 120g 이상의 고급 수입 모조지다. 그리고 저 모서리…….’


도현의 코끝이 미세하게 씰룩였다. 교실 안의 먼지 냄새를 뚫고, 그 종이 조각에서 아주 희미한 기계식 방청유 냄새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교무실의 평범한 복사기에서는 절대 날 수 없는, 본관 4층 기밀 금고 경첩에서나 쓰이는 특수 윤활유의 냄새.


도현은 조용히 안경을 고쳐 썼다.


‘서지혜, 그리고 그 배후의 정우진. 너희가 완벽하다고 믿은 그 물증이, 오히려 너희의 목을 조르는 가장 확실한 덫이 될 것이다.’


교실의 소란을 뒤로한 채, 은둔형 전략가 박도현의 첫 번째 그림자 첩보전이 마침내 방화쇠를 당겼다.

HẾT CHƯƠ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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