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원의 음모와 줄리안의 선전포고
남부 포구의 바닷바람에는 썩은 비린내와 눅눅한 소금기가 섞여 있었다. 하지만 채도현의 머릿속을 채우고 있는 것은 그보다 훨씬 더 서늘한 현실의 수치들이었다.
하태성이 움직였다. 포구의 물류망을 빼앗기고 밀수선조차 정박하지 못하게 되자, 놈은 벼랑 끝에 몰린 쥐새끼처럼 가장 비열한 수단을 선택했다. 하나뿐인 여동생, 채유나의 납치.
‘시릴이 움직이는 자객들이 빈민가 셋방을 덮치기 전에 방어선을 구축해야 한다.’
도현은 깊은 밤, 벽란루의 은밀한 처소에서 발타자르를 마주하고 있었다. 흑수파의 두목은 이제 도현의 눈빛 한 번에도 몸을 사리는 완벽한 사냥개가 되어 있었다.
“발타자르.”
“예, 나리. 말씀만 내리십시오.”
“오늘 밤으로 흑수파의 정예 조직원들을 내 옛 빈민가 셋방 주변에 매복시켜라. 하태성의 사주를 받은 정보 브로커 시릴이 납치조를 보낼 것이다. 놈들이 유나에게 손을 대기 전에 역으로 포위해 생포해라. 단, 소란을 피워서는 안 된다. 어머니의 병세가 깊으니, 집 안으로는 절대 침입자가 들어가지 못하게 철저히 외곽에서 차단해라.”
“걱정 마십시오, 나리. 쥐새끼 한 마리도 방 문턱을 넘지 못하게 대가리를 깨놓겠습니다.”
발타자르가 이빨을 드러내며 물러갔다. 도현은 그의 뒷모습을 보며 왼손 네 번째 손가락에 끼워진 하씨 가문의 청옥 약혼 반지를 천천히 돌렸다. 푸른 빛을 발하는 반지는 든든한 방패였지만, 동시에 더 큰 폭풍을 끌어당기는 자석이기도 했다.
가족의 신변은 발타자르의 사설 무력으로 묶어두었으나, 그것은 임시방편에 불과했다. 황실의 공권력이 직접 개입하기 시작하면 일개 뒷골목 조직으로는 감당할 수 없다. 도현에게는 황실조차 함부로 침범할 수 없는 절대적인 법적 방패가 필요했다.
‘제국 학술원의 수석 연구원 지위. 그리고 그에게 부여되는 압류 금지 특권.’
그 특권을 쥐어야만 황실 세무부의 초법적인 가택 수색과 체포 영장으로부터 가족을 완벽하게 지켜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오르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할 관문이 있었다.
바로 제국 학술원의 가장 거만한 천재이자, 가혹 징세론을 옹호하는 귀족 자제들의 수장, 줄리안이었다.
***
다음 날 아침, 제국 학술원 대강당.
아치형의 높은 천장 아래로 쏟아지는 아침 햇살 속에서 귀족 자제들의 비아냥거림이 메아리쳤다. 화려한 비단으로 마감된 학자 로브를 입은 귀족 학생들이 도현이 강당으로 들어서자 일제히 길을 터주며 조롱 섞인 웃음을 터뜨렸다.
“오, 저기 오시는군. 공작가의 치맛자락을 잡고 기어 올라간 가짜 사위 놈이.”
“가난한 학자 서생이라더니, 결국 돈에 영혼을 팔아넘겼군. 하씨 가문의 개가 되어 장부를 만지니 손끝에서 은화 냄새가 진동을 하겠어.”
비웃음의 중심에는 금발에 푸른 눈을 빛내며 단상 위에 오만하게 서 있는 청년이 있었다. 줄리안.
명망 높은 세무 관료 가문의 적자이자 학술원의 수석 후보인 그는, 항상 빳빳하게 다려진 최고급 학자복을 입고 거만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의 주변에는 부패한 부원장 레오폴드의 비호를 받는 귀족 학생들이 장벽처럼 둘러서 있었다.
“채도현.”
줄리안이 단상에서 내려오며 도현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의 눈빛에는 가문 배경이 없는 평민 학자에 대한 극단적인 경멸과 시기심이 서려 있었다.
“공작가의 개가 된 기분이 어떤가? 하씨 가문의 파산 장부를 조작해 비자금을 만들어주고 청옥 반지를 구걸했다지? 우리 학술원의 명예를 더럽히는 비열한 기회주의자 놈.”
도현은 걸음을 멈추고 줄리안을 차분하게 응시했다. 창백한 안색에 잉크 얼룩이 묻은 회색 로브를 입은 도현은, 화려한 줄리안의 기세 앞에서도 한 치의 흔들림이 없었다. 오히려 그의 깊고 지적인 흑청색 눈동자가 줄리안의 안면 근육의 미세한 떨림을 읽어내고 있었다.
“줄리안.”
도현의 목소리는 낮고 고요했으나 강당 전체에 명확하게 울려 퍼졌다.
“학술원은 진리를 탐구하는 곳이지, 가문의 배경을 자랑하는 사교계 살롱이 아닙니다. 제가 누구와 약혼을 했든, 그것이 제 학문적 성과와 숫자의 정확함을 훼손하지는 않습니다.”
“학문적 성과? 숫자의 정확함?”
줄리안이 코웃음을 치며 품속에서 두꺼운 논문 서류를 꺼내 바닥에 내던지듯 탁자 위에 올렸다.
“네놈이 주장하는 ‘감세와 경제 활성화’ 이론은 황실의 재정을 파탄 내고 제국의 기강을 흔드는 궤변에 불과하다. 제국의 안정을 위해서는 평민과 상인들에게 가혹한 세금을 부과하여 황실 금고를 채워야 한다는 것이 내 고전 세법 논문이다. 숫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지. 세금을 더 거두면 재정이 늘어난다. 이 단순한 진리를 부정하는 네놈은 사기꾼이다!”
주변의 귀족 학생들이 일제히 동조하며 야유를 보냈다. 그때, 강당 뒤편의 화려한 문이 열리며 부원장 레오폴드가 위엄 가득한 발걸음으로 걸어 나왔다. 줄리안의 가문으로부터 막대한 뇌물을 받은 부패한 교육 관료의 등장에 대강당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무슨 소란인가?”
레오폴드가 도현을 차갑게 내려다보며 엄숙한 목소리로 말했다.
“채도현. 학술원 부원장으로서 네놈의 최근 행실과 궤변에 가까운 세법 주장을 묵과할 수 없다. 학술원의 명예를 실추시킨 죄를 물어 네놈을 강제 퇴학 처분해야 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그것은 명백한 억지이자 함정이었다. 줄리안의 가문과 결탁해 도현을 학계에서 영구히 매장하려는 음모. 도현은 에라스무스 원장이 황실의 압박으로 자리를 비운 사이, 레오폴드가 권한을 남용하고 있음을 간파했다.
“부원장님.”
도현이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학술원의 규칙에 따르면, 학자 간의 학문적 대립은 사법적 징계가 아닌 ‘공개 대토론회’를 통해 검증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퇴학 처분을 내리시기 전에, 저와 줄리안의 세법 이론 중 어느 쪽이 진짜 제국을 위한 길인지 숫자로 증명할 기회를 주십시오.”
줄리안이 기다렸다는 듯 비열한 미소를 지으며 끼어들었다.
“좋다! 공개 대토론회를 신청해라, 채도현. 대신 조건이 있다. 만약 네놈이 토론회에서 패배한다면, 학적 영구 박탈은 물론이고 네놈이 가진 그 조잡한 ‘목제 계산기’를 포함한 모든 가산을 몰수하고 수도에서 영구 추방당할 것이다. 감당할 수 있겠나?”
“감당하겠습니다.”
도현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주제는 ‘황실의 세무 정책과 민중의 소비력 상관관계’로 하지요. 내일 아침, 이곳 대강당에서 백 명의 학자들과 배심원들 앞에서 숫자로 끝을 봅시다.”
“내일 아침이라, 아주 성급한 무덤을 파는구나. 좋다, 승인하지!”
레오폴드가 만족스러운 듯 미소를 지으며 승인 도장을 찍었다. 귀족 학생들의 비웃음 소리가 강당을 가득 채우는 동안, 도현은 조용히 뒤돌아 강당을 빠져나왔다. 그의 품속에 숨겨진 목제 기계식 계산기의 톱니바퀴들이 미세하게 공명하듯 차가운 소리를 내고 있었다.
***
토론회 전날 밤, 도현의 학술원 개인 서재.
창밖으로는 차가운 밤비가 대지를 적시고 있었다. 어두운 방 안, 책상 위에는 오직 한 자루의 촛불만이 흔들리며 도현의 창백한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탁, 탁, 타닥, 타르르릉.
정교한 태엽 소리와 함께 목제 기계식 계산기의 톱니바퀴들이 쉴 새 없이 회전했다. 도현의 손가락은 건반 위를 번개처럼 움직이며 수많은 세금 수치와 인구 통계 데이터를 연산하고 있었다.
“선배님…… 정말 이 장부로 내일 토론회에 나서실 겁니까?”
옆에서 양가죽 장부들을 정리하던 후배 로이가 걱정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의 손끝은 긴장으로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이 장부에는 황실 세무부의 과거 세입 데이터와 수도 빈민가의 실제 소비 수치가 아주 정교하게 기재되어 있습니다만…… 자세히 보면 미세한 기하학적 수치 오류가 몇 군데 존재합니다. 줄리안이 이 오류를 잡아내기라도 한다면, 토론회는 시작하자마자 패배로 끝날 겁니다.”
도현은 계산기의 작동을 멈추고, 잉크가 묻은 가죽 장부의 특정 페이지를 조용히 덮었다. 그의 입가에 서늘한 미소가 걸렸다.
“로이, 숫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하지만 인간은 자신이 보고 싶은 숫자만을 믿는 어리석은 동물이지.”
“예……?”
“줄리안과 레오폴드는 내일 나를 확실하게 매장하기 위해 오늘 밤 무슨 짓이든 저지를 거다. 특히 내가 토론회에서 사용할 장부의 내용을 미리 훔쳐보고 싶어 미칠 지경이겠지.”
도현은 책상 서랍을 열고, 방금 작성한 오류투성이의 장부를 가장 눈에 잘 띄는 책상 한가운데에 내려놓았다.
“이것은 ‘가짜 장부 유인 전술’이다. 적들이 스스로 조작된 데이터의 늪에 빠지도록 던져두는 미끼지.”
로이가 경악하며 입을 벌렸다.
“그럼 진짜 장부는 어디에 있습니까?”
“진짜는 이미 내 머릿속에 기장되어 있다. 그리고 이사벨라 수녀원장님을 통해 확보한 진짜 빈민가 통계 원본은 발타자르가 안전하게 보관하고 있지. 내일 토론회는 숫자의 대결이 아니라, 적들의 탐욕과 자만심을 사냥하는 덫이 될 것이다.”
도현은 촛불을 불어 끄고, 로이와 함께 서재 옆방의 그림자 속으로 몸을 숨겼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밤비 소리만이 가득하던 서재의 창문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찰칵, 하는 날카로운 마찰음과 함께 창문이 열리고, 검은 복면을 쓴 가냘픈 체구의 스파이가 소리 없이 서재 안으로 침투했다.
그림자는 기민한 동작으로 책상 앞으로 다가갔다. 어둠 속에서 스파이의 눈이 번쩍였다. 놈의 시선이 책상 한가운데에 놓인 도현의 가죽 장부에 고정되었다.
스파이는 망설임 없이 장부를 품속에 찔러 넣고, 들어왔던 창문을 통해 밤 안개 속으로 소리 없이 사라졌다.
옆방의 문틈으로 그 모든 과정을 지켜보던 로이가 침을 삼키며 도현의 소매를 잡았다.
“선, 선배님! 정말로 훔쳐 갔습니다! 부원장의 스파이가 틀림없습니다!”
어둠 속에서 도현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깨진 창문 틈새로 불어오는 차가운 밤바람이 그의 회색 로브 자락을 흔들었다.
도현은 스파이가 사라진 어두운 창밖을 바라보며, 왼손 네 번째 손가락의 청옥 반지를 가볍게 쓸어내렸다. 그의 입가에 걸린 차가운 미소가 촛불이 꺼진 어둠 속에서 잔인하게 빛나고 있었다.
“계획대로 흘러가는군.”
도현의 나직한 혼잣말이 밤비 소리에 묻혀 흩어졌다.
“줄리안, 네놈이 훔쳐 간 그 숫자들이 내일 아침 네놈의 목을 베는 가장 날카로운 단두대의 칼날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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