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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란루의 여왕과 파산 장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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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곽 빈민가의 어둠을 가르며 다가온 마차는 거대한 푸른 바다매 문양이 금사로 수놓인 하씨 가문의 명품 마차였다. 빗줄기가 마차의 가죽 지붕을 세차게 때리는 소리 속에서, 도현은 침상에 누운 어머니의 가쁜 숨소리를 한 번 더 확인했다.


“오빠…… 꼭 가야 해?”


Yuna가 그의 회색 학자 로브 자락을 꼭 쥐며 눈물을 글썽였다. 도현은 여동생의 손을 부드럽게 떼어내며 싱긋 웃어 보였다.


“어머니의 약을 구하려면 이 방법뿐이야. 발타자르가 여기 남아서 너희를 지켜줄 테니 걱정하지 마라.”


방 한구석에서 몽둥이를 든 채 대기하던 흑수파 두목 발타자르가 급히 고개를 숙였다. 도현의 지략에 완벽히 굴복한 그는 이제 도현을 단순한 학자가 아닌 자신의 목줄을 쥔 지배자로 모시고 있었다.


“염려 놓으십시오, 서생님. 황실 친위대가 정식 영장을 들고 오기 전까지는 제 목숨을 걸고 사모님과 누님을 지키겠습니다.”


도현은 고개를 끄덕인 뒤, 조부의 유산인 목제 기계식 계산기가 담긴 가죽 가방을 어깨에 메고 마차에 올랐다. 반나절 뒤면 징세관 크루아가 정식 압류 영장을 들고 들이닥칠 것이다. 그전에 하씨 가문의 비호를 받아내고 은화 100닢을 손에 넣어야만 했다.


마차는 수도 에스펜의 진흙탕 길을 지나 남부 무역의 심장부로 향했다. 빈민가의 악취가 점차 사라지고, 사치스러운 향수 냄새와 화려한 마법 가로등의 불빛이 창가를 채우기 시작했다. 마침내 마차가 멈춰 선 곳은 남부 대운하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화려한 3층 누각, 벽란루(壁瀾樓)였다.


벽란루는 하씨 가문의 수도 지부이자 고위 귀족들이 밀약을 나누는 사교계의 요새였다. 입구에는 마력 탐지 장치가 붉은빛을 발하고 있었고, 단단한 가죽 갑옷을 입은 하씨 가문의 사설 경비병들이 삼엄하게 경비를 서고 있었다.


“학술원의 채도현 서생이십니다. 후계자님의 초대를 받고 오셨습니다.”


마부의 말에 경비병들이 도현의 서생증을 까다롭게 검사한 뒤에야 문을 열어주었다. 도현은 붉은 대리석 계단을 올라 벽란루 최상층인 3층 연회장으로 향했다. 문이 열리자, 은은한 침향 냄새와 함께 사치스러운 비단 커튼 뒤로 한 여인의 실루엣이 드러났다.


하은교.


남부 무역을 사실상 지배하는 하씨 가문의 도도한 후계자이자, 사교계에서 ‘벽란루의 여왕’이라 불리는 미녀였다. 그녀는 불타는 듯한 붉은 비단 드레스를 입고, 화려한 금장식 왕관을 쓴 채 도현을 오만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날카로운 고양이상의 눈매와 붉은 입술은 보는 이의 숨을 멎게 만들 정도로 치명적이었다.


“네놈이 제법 깐깐한 크루아를 장부 몇 구절로 쫓아냈다는 그 가난한 학자 놈인가 보구나.”


은교는 들고 있던 은빛 부채로 턱을 괴며 차가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녀의 주변에는 하씨 가문의 일류 경호원들이 삼엄한 기세를 뿜어내고 있었다. 무력이 전혀 없는 도현으로서는 그 기압만으로도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황실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 가장 다루기 쉽고 유약한 ‘가짜 약혼자’ 방패막이를 구하고 있었는데…… 생각보다 훨씬 마르고 초라한 놈이 왔군. 이런 학자 놈이 공작가의 사위 자리를 감당할 수 있겠어?”


그녀의 조롱 섞인 말에 경호원들이 나직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도현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가죽 가방을 고쳐 메며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그의 눈동자에는 두려움 대신 철저한 계산이 서려 있었다.


“하은교 아가씨.”


도현의 나직하고 단호한 목소리가 연회장의 웃음소리를 일시에 잠재웠다. ‘협상 테이블 지배력’ 기량이 발동하는 순간이었다.


“방패막이가 필요하시다면 더욱 저를 선택하셔야 할 겁니다. 황실 재무상 루드비히가 남부 무역선단에 부과하려는 징벌적 관세가 무려 35%에 달한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은교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부채 뒤에 숨겨진 그녀의 입술이 살짝 굳어졌다.


“그걸 네놈이 어떻게 알지?”


“황실 조세 절차법의 최근 개정안과 남부 선단의 일일 통행량 데이터를 교차 분석해 보면 쉽게 도출되는 수치입니다. 하씨 가문이 최근 의문의 폭풍우로 선단 20척을 잃고 유동성 위기에 처했다는 소문이 돌고 있더군요. 황실은 이 기회를 틈타 관세 장벽으로 귀 가문의 숨통을 끊으려 하고 있습니다. 이런 위기 상황에서 무력만 강하고 머리가 빈 다른 귀족 자제를 약혼자로 세우신다면, 가문의 장부는 한 달도 버티지 못하고 황실의 압수 수색에 통째로 털리게 될 겁니다.”


도현은 품속에서 가죽 장부를 꺼내 테이블 위에 가볍게 얹었다.


“하지만 저를 가짜 사위로 내세우신다면, 학술원의 압류 금지 특권법을 방패 삼아 가문의 비밀 장부들을 합법적으로 은닉해 드릴 수 있습니다. 숫자를 다루는 법을 모르는 자는 결코 이 금융 전쟁에서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은교는 도현의 거침없는 언변과 정교한 수치 분석에 속으로 깊은 충격을 받았다. 단순한 허수아비인 줄 알았던 학자 놈이 가문의 가장 아픈 아킬레스건을 정확히 짚어내고 있었다.


그녀는 붉은 입술을 짓씹으며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제법 훌륭한 주둥이로구나. 하지만 하씨 가문은 말만 번지르르한 학자는 믿지 않는다. 네놈의 그 건방진 머리가 진짜 쓸모가 있는지 증명해 봐라.”


은교가 손가락을 튕기자, 시녀 올리비아가 단단한 쇠사슬로 묶인 거대한 가죽 장부 상자를 테이블 위에 무겁게 내려놓았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먼지가 살짝 일었다.


“최근 의문의 폭풍우로 침몰했다고 처리된 ‘남부 무역선단 파산 장부 원본’이다. 가문의 회계사들이 수차례 감사했으나 아무런 오차도 찾지 못했고, 결국 단순 자연재해로 결론지어 가문에 막대한 적자를 안긴 장부지. 네놈에게 딱 3일을 주겠다. 이 장부 속에서 가문의 손실을 복구할 진짜 원인을 찾아내라.”


은교는 몸을 앞으로 숙이며 도현의 눈을 매섭게 쏘아보았다. 그녀의 고양이 같은 눈빛에 살기가 서렸다.


“만약 3일 내에 아무런 해답도 내놓지 못한다면, 귀한 가문의 장부를 훔쳐본 사기죄로 네놈의 양 손목을 잘라 대운하에 던져버릴 것이다. 계약하겠느냐?”


실패하면 사지 절단이라는 가혹한 계약 조건. 하지만 도현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당장 어머니의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었다.


“좋습니다. 수락하지요.”


도현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다만, 저 역시 계약 조건을 걸겠습니다. 지금 당장 제 어머니의 치료 약값인 은화 100닢을 선지급해 주십시오. 그리고 제가 장부를 분석하는 3일 동안 제 가족의 신변을 하씨 가문의 사설 기사단 이름으로 확실하게 보장해 주십시오.”


은교는 도현의 거침없는 태도에 코웃음을 쳤다. 하지만 그의 눈빛에 담긴 기백은 마음에 들었다.


“건방진 놈. 좋다. 내 너에게 기회를 주지.”


그녀는 품속에서 푸른 청옥으로 조각된 패를 꺼내 도현에게 던졌다. 벽란루의 모든 구역을 출입할 수 있고 하씨 가문의 비호를 상징하는 ‘벽란루 출입 청옥패’였다. 이와 함께 은화 100닢이 묵직하게 담긴 주머니가 도현의 손에 쥐어졌다.


“올리비아, 이 녀석에게 밀실을 내주고 장부를 분석하게 해라. 그리고 이 녀석의 집으로 은화 100닢과 사설 경비병 5명을 즉시 파견해라.”


“예, 아가씨.”


도현은 청옥패와 은화 주머니를 가슴 깊이 품었다. 일단 어머니의 약값과 반나절 뒤 닥쳐올 크루아의 압류를 막을 방패막이는 완벽히 확보했다. 이제 남은 것은 자신의 목숨을 건 3일간의 지적 사투뿐이었다.


도현은 올리비아의 인도를 받아 벽란루 지하 깊은 곳에 위치한 비밀 밀실로 향했다. 촛불 몇 개만이 어두운 방안을 밝히고 있었고, 테이블 위에는 거대한 파산 장부 원본이 굳게 닫힌 채 놓여 있었다.


도현은 심호흡을 한 뒤, 가죽 장부의 첫 장을 무겁게 펼쳤다. 그리고 가문의 비전인 ‘이중장부 심상 가시화법’을 기동하며 ‘초인적 감사안’을 활성화했다.


서늘한 촛불 불빛 아래, 장부의 빽빽한 숫자 더미가 도현의 시야 속에서 재배열되기 시작했다. 수천 장의 단식 기장 영수증과 선박 수리 대금, 그리고 해상 보험금 청구 내역들이 그의 머릿속에서 거대한 입체 그래프로 그려졌다.


단순한 폭풍우 사고로 기록된 수치들.


하지만 도현의 손끝이 장부의 미세한 수식 경계를 훑는 순간, 그의 눈동자가 날카롭게 빛났다. 조작된 숫자들의 틈새에서, 단순한 자연재해가 아닌 교묘하게 은폐된 횡령의 수치와 고의적인 방화의 흔적들이 붉은 선으로 연결되며 그의 뇌리에 도드라져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자연재해가 아니었군.”


도현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걸렸다. 장부의 거대한 음모가 그 실태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HẾT CHƯƠ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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