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부의 강철과 은밀한 적자(赤字)
벽란루 최상층을 흔들던 장대비는 어느새 잦아들었으나, 도현의 왼손 손가락에 끼워진 청옥 반지는 여전히 차가운 푸른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마차 창밖으로 스치는 수도 에스펜의 밤풍경은 남부의 화려함에서 벗어날수록 급격히 황량해졌다. 남부 대운하의 온기가 사라진 자리를 채운 것은 북쪽 산맥에서 불어오는, 살을 에는 듯한 칼바람이었다.
도현은 손목에 감긴 실크 손수건을 가만히 쓸어내렸다. 하은교가 직접 묶어준 붉은 비단 손수건에서는 아직 그녀 특유의 짙은 침향 냄새가 옅게 배어 있었다. 그녀는 도현을 향해 숨길 수 없는 집착을 드러내며 그를 사대 가문의 공통 방패막이로 내세웠다. 하지만 도현은 그 도구의 사슬을 역으로 쥐고 흔들 생각이었다.
덜컹거리는 마차가 멈춰 선 곳은 수도 북부에 위치한 설씨 가문의 거대 영지, ‘북부 철강 단지’의 초입이었다. 마차 문이 열리자마자 쇠가 타들어 가는 매캐한 냄새와 웅장한 망치 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거대한 용광로들이 뿜어내는 붉은 열기가 밤하늘을 핏빛으로 물들이고 있었으나, 그 아래를 지키는 사설 기사단의 분위기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내려라, 학자.”
마차 문앞에 선 여인의 목소리는 낮고 단호했다.
은빛 단발머리 사이로 드러난 차가운 푸른 눈동자. 군더더기 없는 짙은 감청색 제복을 입고, 등 뒤에는 자신의 키만 한 거대한 강철 대검을 메고 있는 여장부. 북부 철강과 무력을 장악한 설씨 가문의 후계자, 설수련이었다. 그녀는 도현의 가냘픈 체구와 회색 학자 로브, 그리고 손목에 감긴 붉은 손수건을 한 차례 훑어보더니 나직하게 혀를 찼다.
“하은교가 제법 쓸 만한 놈을 골랐다고 자랑하기에 기대했건만, 잉크 냄새나 풍기는 약골이 왔군. 칼 한 자루 쥐지 못하는 네가 북부의 강철 기사단이 당면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거라 보나?”
“칼은 쥔 자의 힘만큼만 베어내지만, 숫자는 세상을 통째로 움직입니다, 수련 아가씨.”
도현은 차가운 바람에 기침을 참으며 품속의 목제 기계식 계산기를 단단히 움켜쥐었다. 수련은 그의 대답에 대꾸하지 않고 몸을 돌려 연무장 안쪽으로 걸어갔다.
연무장 중앙에는 수백 명의 설씨 가문 기사들이 훈련을 멈춘 채 웅성거리고 있었다. 그들의 눈빛에는 굶주림과 피로, 그리고 깊은 불신이 서려 있었다. 제국 최강이라 불리던 기사단이 이토록 황폐해진 이유는 명확했다. 최근 무리한 군수 보급 원가 상승과 원인을 알 수 없는 재정 적자 때문이었다.
수련의 숙부이자 광산의 지분을 독점한 가문의 원로, 설진태는 이 재정 위기를 빌미로 수련의 후계자 직위를 박탈하려 목을 죄어오고 있었다. 기사단이 파산하면 수련 역시 실각할 터였다. 이것이 바로 설씨 가문이 도현을 가짜 사위로 승인한 ‘은밀한 적자(赤字)’의 내막이었다.
“기사단장 한스 경, 장부를 가져오십시오.”
도현의 요청에 묵직한 판금 갑옷을 입은 거구의 사내, 강철의 한스가 다가왔다. 그의 얼굴에는 수많은 전투 흉터가 가득했으나, 눈빛만큼은 정직하고 강직했다. 한스는 유약해 보이는 학자 청년을 불신하는 눈빛으로 두꺼운 가죽 보급 장부를 툭 던지듯 건넸다.
도현은 연무장 한구석의 거친 목제 테이블 위에 장부를 펼쳤다. 그리고 품속에서 목제 기계식 계산기를 꺼내 들었다.
타르르릉, 탁, 타닥.
정교한 톱니바퀴가 맞물려 돌아가는 소리가 사막 같은 연무장에 울려 퍼졌다. 도현의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으며 그의 고유 기량인 ‘초인적 감사안(Superhuman Audit Eye)’이 활성화되었다.
수만 개의 숫자가 나열된 기사단 일일 식량 및 철강 보급 대장이 도현의 시야 속에서 푸른빛의 입체 격자로 재구성되었다. 대차대조표의 수치들이 오차 없이 정렬되는 순간, 장부 곳곳에서 조작된 붉은색 수치들이 뱀처럼 꿈틀거리며 도드라졌다.
‘단순한 인플레이션이 아니다.’
도현의 뇌내 연산 회로가 초고속으로 회전했다.
‘철광석 원자재 공급 단가는 시장 평균보다 40% 이상 부풀려져 있고, 기사단에 실제로 인도된 선철의 중량은 장부상 수치와 전혀 맞지 않아. 이건…… 조직적이고 정교한 내부 횡령이다.’
도현이 장부의 모순을 완전히 포착해 낸 바로 그 순간이었다.
“학자 서생 놈이 감히 신성한 기사단의 보급 장부를 더러운 손으로 만지는구나!”
매서운 호통과 함께 연무장 입구에서 일련의 기사들이 들이닥쳤다. 설수련의 숙부, 설진태를 따르는 사설 기사들이었다. 그들은 험악한 인상을 쓰며 도현을 순식간에 둥글게 에워쌌다. 차가운 쇠사슬과 장검들이 도현의 코앞에서 서늘한 기세를 풍기며 뽑혀 나왔다.
“남부 하씨 가문의 청옥 반지를 끼고 붉은 손수건을 두른 꼴을 보니, 필시 남부에서 보낸 첩자가 분명하다! 가문의 군사 기밀을 훔치려 한 죄, 군율에 따라 현장에서 즉각 처단하겠다!”
설진태 파벌의 행동대장이 검날을 도현의 목덜미로 거칠게 밀어붙였다. 윽, 하는 신음과 함께 도현의 회색 학자 로브의 깃이 찢겨 나갔고, 창백한 뺨 옆목에 붉은 찰과상 상처가 얇게 그어졌다. 선명한 핏방울이 차가운 흙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검을 거두어라!”
설수련이 격노하여 등 뒤의 대검을 뽑아 들었다. 푸른 검기가 연무장 바닥을 가르며 먼지를 일으켰으나, 그 순간 단상 위에서 설진태의 비호를 받는 장로들이 군율 책자를 치켜들며 소리쳤다.
“후계자님, 멈추십시오! 가문의 군율 제14조에 따르면, 허가받지 않은 외부인이 군수 장부를 무단 열람할 경우 즉각 간첩 혐의로 구금하여 심문하게 되어 있습니다. 비록 약혼자라 할지라도 예외는 없습니다. 수련 아가씨께서 이를 막으신다면 가문의 대법을 위배하는 것입니다!”
가문 법률의 맹점과 무력을 결합한 치밀한 압박. 수련의 아름다운 얼굴이 분노와 제약으로 인해 일그러졌다. 장로들의 말대로 정당한 명분 없이 기사들을 베어낸다면 그녀의 후계자 직위는 그 즉시 날아갈 터였다. 수련의 대검 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하지만 무력의 포위망 한복판에 선 도현은 피가 흐르는 목을 가만히 매만지며, 오히려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그는 품속에서 자신이 방금 계산기로 연산하여 복사해 둔 기사단 일일 보급 대장의 비교 서류를 꺼내 높이 쳐들었다.
“간첩이라니, 당치도 않은 소리.”
도현의 나직하고 지적인 목소리가 기사들의 소란을 뚫고 명확하게 울려 퍼졌다.
“기사단장 한스 경. 당신은 기사들의 명예와 군율을 목숨처럼 여기는 고결한 무장이라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묻겠습니다. 기사단의 영광스러운 검이, 자신들의 배를 갉아먹는 진짜 쥐새끼를 지키는 방패로 쓰여도 괜찮은 것입니까?”
“무슨 소리냐, 학자 서생!”
한스가 묵직한 발걸음으로 다가오며 도현을 쏘아보았다. 도현은 기죽지 않고 서류의 수치들을 큰소리로 낭독하기 시작했다.
“장부 제28쪽을 보십시오. 이번 달 기사단에 납품된 ‘북부 정련 선철’의 총중량은 50톤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선철을 제련하기 위해 소모된 석탄의 양은 단 30톤에 불과합니다. 한스 경, 제철소의 기본 공정을 아신다면 석탄 30톤으로는 아무리 뛰어난 장인이라도 선철 30톤 이상을 제련해 낼 수 없음을 아실 겁니다. 그렇다면 장부상에 기록된 나머지 20톤의 선철은 하늘에서 떨어진 것입니까?”
연무장에 기묘한 침묵이 감돌았다. 기사들의 눈동자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뿐만 아닙니다. 기사단 일일 식량 대장에는 매일 1,500인분의 호밀이 전출된 것으로 되어 있으나, 구료원의 실제 소비량은 900인분에 불과합니다. 매일 600인분의 호밀 대금이 어디로 사라졌는지 계산해 보셨습니까? 이 기사단이 겪고 있는 ‘은밀한 적자’는 자연재해나 유동성 부족이 아닙니다. 매달 기사단 예산의 정확히 40%가 가짜 영수증을 통해 외부로 흘러 나가고 있습니다!”
도현이 제시한 정확하고 반박 불가능한 수치들. 그리고 그 자금의 최종 종착지가 설진태 원로의 사설 계좌와 연결되어 있다는 기하학적 자금 흐름도가 기사들의 눈앞에 펼쳐졌다.
“이, 이놈이 날조를 하는구나! 당장 저놈의 목을 베어라!”
당황한 설진태 파벌의 행동대장이 비명을 지르며 검을 내리치려 했다.
깡-!
하지만 그의 검날은 도현의 목에 닿기 전, 묵직한 강철 판금 장갑에 가로막혀 튕겨 나갔다. 기사단장 강철의 한스였다. 한스는 분노로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설진태 파벌의 기사들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검을 거두어라.”
한스의 무거운 목소리가 연무장 전체를 지배했다.
“이 학자의 말이 사실이라면, 우리의 굶주림은 황실의 압박 때문이 아니라 내부의 배신자 때문이었다는 뜻이다. 기사단 전체는 현 시간부로 보급 장부의 정밀 감사에 착수한다. 방해하는 자는 누구를 막론하고 가문의 반역자로 간주해 베어버리겠다!”
형세가 한순간에 뒤집혔다. 기사단장의 정식 개입으로 주도권을 쥔 도현은 찢어진 로브 깃을 가다듬으며 설수련의 흔들리는 눈동자를 정면으로 마주 보았다. 하지만 위기는 이제 시작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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