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부의 가치와 첫 번째 계산기
석탄 매연과 눅눅한 바닷바람이 뒤섞인 제국 수도 에스펜의 외곽 빈민가. 낡은 목조 주택의 2층 셋방은 언제나처럼 음산한 한기로 가득 차 있었다. 천장 구석에서 떨어진 빗방울이 바닥에 놓인 양철 양동이로 뚝, 뚝 떨어지며 신경질적인 박자를 만들어냈다.
방 안쪽 침상에는 지독한 만성 폐질환으로 깊이 잠든 어머니 유씨 부인의 가냘픈 숨소리가 들려왔고, 그 앞을 가로막은 채도현은 창백한 얼굴로 손에 쥔 물건을 꽉 쥐었다.
그것은 조부인 채덕수 교수가 유산으로 남겨준 목제 기계식 계산기였다. 고풍스러운 배나무로 짜인 아치형 외관에, 수십 개의 미세한 청동 톱니바퀴와 건반들이 정교하게 맞물려 있는 아티팩트. 도현의 손가락바닥에 닿는 나무 건반의 촉감은 차가웠지만, 그의 머릿속은 이미 뜨겁게 끓어오르고 있었다.
"오빠……!"
열네 살 된 여동생 채유나가 그의 허리춤을 붙잡고 부르르 떨었다. 유나의 목덜미를 거칠게 잡아챈 사내의 손아귀는 굳은살과 흉터로 얼룩져 있었다. 수도 뒷골목을 지배하는 사채 조직 ‘흑수파’의 두목, 발타자르였다.
"조용히 해라, 꼬맹아. 네 오빠 놈이 돈을 토해내지 않으면 오늘 밤으로 넌 남부 선창가의 하수구로 팔려 갈 테니까."
발타자르가 쇠파이프를 바닥에 쾅 내려놓으며 기괴한 미소를 지었다. 그의 뒤를 지키는 다섯 명의 험악한 거구들이 셋방의 좁은 입구를 완전히 봉쇄하고 있었다. 방 안에는 썩은 기름 냄새와 싸구려 독주 냄새가 진동했다.
도현은 심호흡을 하며 눈을 가늘게 떴다. 마력 회로가 없어 제국의 흔한 하급 마법조차 쓰지 못하는 유약한 학자. 그것이 현재 그의 육체적 한계였다. 하지만 도현의 눈동자 너머, 뇌리에 존재하는 ‘즉각적 암산 회로’가 초고속으로 회전하기 시작했다. 조부에게 전수받은 가문의 심상 비전이 그의 시야를 완전히 지배했다.
"발타자르 송주(統領)."
도현의 목소리는 창백한 안색과 달리 놀라울 정도로 차분하고 단호했다.
"숙부인 채만식이 진 빚은 분명 은화 백 닢이었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갑자기 은화 오백 닢이라는 터무니없는 금액이 된 겁니까?"
"하! 이 먹물만 먹은 새끼가 세상 물정을 모르네."
발타자르가 침을 뱉으며 품속에서 때 묻은 채무 계약서를 꺼내 흔들었다.
"니 삼촌 놈이 서명한 거다. 일주일마다 이자가 복리로 붙는다는 조항이지. 게다가 가문의 옛 인장까지 저당 잡혔어. 숫자는 거짓말을 안 해, 학자 놈아. 당장 오백 닢을 내놓던가, 아니면 저 기집애를 넘겨라!"
유나가 공포에 질려 도현의 회색 로브 자락을 꽉 쥐었다. 도현은 도망친 숙부 채만식의 탐욕스러운 얼굴을 떠올렸다. 도박에 미쳐 가문의 유산마저 팔아넘기고 야반도주한 인간. 하지만 그 대가를 무고한 여동생이 치르게 둘 수는 없었다.
도현은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그의 손목에 밴 굳은살과 잉크 얼룩이 촛불 불빛에 선명하게 드러났다.
"장부를 보여주십시오."
"뭐?"
"당신들이 이자를 계산한 그 기장 장부 말입니다. 숫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 하셨지요? 그렇다면 제국 법률에 따라 채권의 원금과 이자 산출 내역을 채무자에게 명확히 제시할 의무가 있습니다. 장부를 확인하기 전에는 단 1센트도 넘겨줄 수 없습니다."
발타자르가 코웃음을 쳤다.
"이 새끼가 진짜 미쳤나. 쇠파이프 맛을 봐야 장부를 읽겠냐?"
"제가 여기서 맞아서 쓰러지면, 당신들은 은화 한 닢도 건지지 못하고 학술원 연구원 상해죄로 사법부의 추적을 받게 될 겁니다. 하지만 제가 장부를 확인하고 수긍한다면, 합법적인 자산 대물변제 계약을 체결할 수 있습니다. 어느 쪽이 당신들에게 이익입니까?"
도현의 단호한 태도와 정교한 협상 화법에 발타자르는 순간 멈칫했다. 그는 도현이 단순한 겁쟁이 학 서생이 아님을 직감했다.
"좋다. 5분 주지. 어디 그 잘난 대가리로 계산해 봐라."
발타자르가 품속에서 조잡하게 기장된 단식 가죽 장부를 도현의 발밑으로 툭 던졌다.
도현은 바닥에 엎드려 장부를 펼쳤다. 그가 장부를 응시하는 순간, 그의 특수 기량인 '초인적 감사안(Superhuman Audit Eye)'이 발동했다. 엉망으로 뒤섞인 단식 기장의 숫자들 위로, 붉은색 마력 선들이 어지럽게 투사되며 불일치하는 수치들이 도드라지기 시작했다.
동시에 도현은 왼손으로 목제 기계식 계산기의 태엽을 감았다.
드르륵, 탁.
정교한 톱니바퀴들이 맞물려 회전하는 마찰음이 고요한 방 안에 울려 퍼졌다. 도현의 손가락이 나무 건반을 초고속으로 두드렸다. 건반이 눌릴 때마다 기계 내부의 구리판과 톱니바퀴들이 공명하며 기하학적인 수치 수식들을 그의 뇌리에 실시간으로 그려냈다.
'원금 은화 100닢. 일주일 이자율 10%. 복리 기장.'
도현의 눈동자가 좌우로 빠르게 움직였다. 그의 즉각적 암산 회로가 제브 수석 세무관조차 경악할 속도로 계산을 완료했다. 단 2분 만에, 도현은 장부 이면에 숨겨진 비열한 조작을 완벽하게 포착해 냈다.
"발타자르 송주."
도현이 기계식 계산기의 상단 크랭크를 탁 소리 나게 멈추며 고개를 들었다. 그의 창백한 뺨에 차가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이 장부는 가짜입니다. 조작되었군요."
"뭐라 하셨냐, 이 새끼가?"
발타자르가 쇠파이프를 움켜쥐며 살기를 뿜어냈다.
"당신들은 일주일 단위 복리 이자를 계산하면서, 매주 수요일과 토요일에 이자를 중복 기재했습니다. 즉, 일주일에 두 번 이자를 복리로 적용하는 삼중 이자 계산법(Triple-Interest)을 썼군요. 이로 인해 실제 원리금 합계는 복리 한계를 아득히 초과했습니다."
도현은 계산기의 구리 다이얼을 가리키며 단호하게 말을 이었다.
"제국 이자 제한법 제14조에 따르면, 사금융업자의 연이율은 원금의 40%를 초과할 수 없으며, 이를 위반하여 삼중 이자를 부과할 경우 채무 계약 자체가 원천 무효가 됩니다. 또한, 황실 세무 고시에 의거하여 당신들이 불법 사설 금융업을 영위하며 탈세한 금액은 현재 누적 은화 삼백 닢에 달합니다."
"이, 이 새끼가 무슨 개소리를……!"
발타자르의 얼굴이 눈에 띄게 일그러졌다. 그는 제법 영악하게 장부를 조작해 왔으나, 설마 가난한 학자 놈이 단 몇 분 만에 제국 세법 조항을 인용하며 삼중 기장의 수학적 오류를 완벽하게 잡아낼 줄은 꿈에도 몰랐다.
"법? 이 빈민가에서 그딴 황제 놈의 법이 통할 것 같냐!"
발타자르가 품속에서 날카로운 단검을 뽑아 도현의 목덜미에 들이댔다. 차가운 칼날이 도현의 살갗을 짓눌렀지만, 도현은 호흡을 가다듬으며 품속에서 미리 작성해 둔 서류 한 장을 천천히 꺼내 보였다.
"통하지 않는지 시험해 보십시오. 이 서류는 제가 당신들이 오기 전 작성해 둔 황실 세무부 고발장입니다."
"고발장 따위, 여기서 널 죽이고 찢어버리면 끝이다!"
"과연 그럴까요?"
도현이 나직하게 속삭였다.
"당신들이 매달 황실 세무부의 수석 세무관 '제브'에게 은밀히 상납해 온 뇌물 장부의 내역 역시 제 머릿속에 있습니다. 이 고발장은 이미 백지아의 정보망을 통해 사교계와 사법부에 동시 폭로 대기 상태로 묵약되어 있습니다. 제가 오늘 밤 무사히 이 방을 나가지 못하거나 여동생의 신변에 조금이라도 이상이 생기면, 내일 아침 당신들의 은신처와 뇌물 계좌 장부가 대광장에 뿌려질 겁니다."
'제브'라는 이름이 도현의 입에서 나오는 순간, 발타자르의 손이 눈에 띄게 떨렸다. 그의 이마에서 식은땀 한 방울이 흘러내려 턱 끝으로 떨어졌다. 황실 세무관과의 밀약은 흑수파의 생존줄이었다. 그것이 폭로된다면 조직의 해체는 물론, 황실 친위대에 의해 삼족이 멸해질 대역죄였다.
"너…… 너 대체 정체가 뭐냐? 일개 학자 놈이 어떻게 그 이름을……."
"저는 숫자를 다루는 사람입니다. 숫자는 흐름을 남기고, 저는 그 흐름을 감사(監査)할 뿐이지요."
도현은 칼날 앞에서도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발타자르의 동공을 응시했다. 미세 거짓말 간파안이 발타자르의 마음속에서 피어오르는 극단적인 공포와 패배감을 정확히 포착했다. 심리적 레버리지가 완벽하게 작동한 순간이었다.
스르륵.
발타자르가 결국 힘없이 검을 거두었다. 그의 거구는 도현의 창백한 기세 앞에 짓눌려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원금 은화 백 닢만 받겠다. 이자는 없는 것으로 하지. 삼촌의 인장 반지도 돌려주마."
"현명한 선택이십니다, 송주."
도현이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유나를 자신의 등 뒤로 완전히 숨겼다. 절망적인 빈민가 셋방의 첫 번째 위기를 오직 장부와 지략만으로 극복해 낸 짜릿한 역전의 순간이었다.
그러나 그 카타르시스가 채 가시기도 전.
쾅——!
낡은 목조 주택의 문짝이 거대한 충격과 함께 산산조각이 나며 안쪽으로 고꾸라졌다. 자욱한 먼지 속에서 묵직한 가죽 장화 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황실 세무부의 명령이다! 모두 멈춰라!"
방 안으로 들이닥친 사내들은 황실 세무부 제복을 입은 병사들이었다. 그리고 그 선두에는 화려하지만 때가 탄 귀족 의복을 입고, 한 손에는 가죽 채찍을, 다른 한 손에는 붉은 양가죽 영장을 든 사내가 서 있었다.
동부 상권의 악독한 세금 징수관, 바론 드 크루아였다.
크루아가 오만한 미소를 지으며 붉은 영장을 도현의 눈앞에 들이밀었다. 영장 전면에는 황실 재무부의 직인과 함께 거대한 붉은 글씨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강제 압류 집행장]
"채도현. 네 놈의 가문이 체납한 황실 세금과 벌금을 징수하기 위해, 이 가택의 모든 가산과 신체를 강제 압류한다!"
압류 영장의 붉은 빛이 도현의 창백한 얼굴을 비추는 순간, 셋방 안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사채업자를 물리친 자리에 더 거대하고 합법적인 황실의 권력이 칼날을 들이민 것이다. 도현은 다시 한번 조부의 기계식 계산기를 움켜쥐며 차가운 눈빛으로 크루아를 응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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