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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점 붉은 펜의 은밀한 음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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쿵, 쿵, 쿵!


낡은 철문이 비명 같은 소리를 지르며 흔들렸다. 문고리를 난폭하게 덜컹거리는 소리와 함께, 문틈 사이로 차가운 손전등 불빛이 칼날처럼 지하실의 어둠을 갈랐다.


“안에 누구 있어! 당장 문 열어!”


학생부장 조기철의 위압적인 고함이 구관 지하 복도를 사정없이 흔들었다.


일촉즉발의 위기였다. 주황색 백열등 아래 서 있던 F조 아이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갔다. 아이돌 연습생인 유진은 공포심에 가슴을 움켜쥐었고, 민우는 황급히 노트북의 우회 통신망 케이블을 뽑아냈다. 현우의 거구 역시 문 앞을 막아서며 팽팽하게 긴장했다. 붕대를 감은 그의 오른손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윤태희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안경 너머로 차가운 이성을 빛내며 주머니 속의 황동 마스터 키를 꺼내 들었다.


“모두 짐 챙겨. 책이랑 필기도구 하나도 남김없이 가방에 넣어.”


태희의 낮고 단호한 목소리가 아이들을 진정시켰다. 그녀는 스터디룸 안쪽 벽면에 있는 낡은 철제 보일러 배관으로 다가갔다. 힘껏 배관을 밀어내자, 덩굴 풀에 가려져 있던 낡은 비상구 철문이 모습을 드러냈다. 경비원 박종두 옹이 알려준 구관의 숨겨진 도주로였다.


철컥.


황동 열쇠가 녹슨 구멍에 맞물려 돌아가며 묵직한 소리를 냈다.


“현우야, 유진이하고 하은이 데리고 먼저 나가. 민우는 내 뒤를 따라와.”


“하지만 너는……!”


현우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태희를 바라보았지만, 태희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시간 없어. 당장 움직여.”


앞문 자물쇠가 부서지기 직전, F조 아이들은 좁고 어두운 배관 통로를 통해 신속하게 몸을 빠져나갔다. 태희는 마지막으로 지하실의 주황색 백열등 스위치를 내리고, 칠판의 낙서들을 걸레로 쓸어내린 뒤 비상구 문을 닫아걸었다.


쏟아지는 밤비 속으로 탈출한 아이들은 숨을 몰아쉬며 학교 후문의 개천가 비탈길을 달렸다. 간신히 아지트를 지켜냈다는 안도감도 잠시, 태희의 마음속에는 한재준과 남궁진이 편의점 모퉁이에서 나누던 음산한 밀담의 잔상이 짙은 어둠처럼 가라앉았다.


그들의 보복은 예상보다 훨씬 빠르고 집요하게 찾아왔다.


***


다음 날 아침, 본관 2학년 3반 교실.


조회종이 울리기 무섭게 교탁 앞에 선 수학 교사 최만수가 분필을 집어 들었다. 기름진 머리를 빗어 넘긴 그는 남궁진 학년 주임의 충직한 오른팔이자, 하위권 학생들을 ‘교실의 산소 아까운 존재들’이라 부르는 잔인한 차별주의자였다.


탁, 탁, 탁, 탁!


최만수가 칠판에 신경질적으로 글자를 적어 내려갈 때마다 허연 분필 가루가 교탁 위로 눈처럼 날렸다. 칠판에 새겨진 글자를 확인한 반 아이들의 입에서 나직한 비명이 흘러나왔.


[1학기 수학 및 국어 통합 수행평가 주제]

- 주제: ‘한계 효용 극대화 모델을 통한 토마스 홉스의 사회계약론적 최적화 검증과 수학적 수식 증명’

- 비중: 1학기 내신 성적의 40%


교실 안이 순식간에 술렁이기 시작했다.


“미친 거 아냐? 고등학생 보고 대학원 수준의 논문을 쓰라는 거야?”

“수학 기하학이랑 인문학 철학을 어떻게 수식으로 연계해?”


아이들의 웅성거림을 비웃듯, 최만수가 교탁을 출석부로 쾅 내리쳤다. 매서운 소음이 교실의 공기를 얼려버렸다.


“조용히 해! 청아제일고 학생이라면 이 정도 융합적 사고는 기본이다. 특히……”


최만수의 기름진 시선이 맨 뒷자리 구석, F조 아이들에게로 향했다. 그의 입꼬리가 비열하게 뒤틀렸다.


“모의고사 가채점 결과가 조금 올랐다고 어깨 펴고 다니는 돌연변이 쓰레기들이 몇 명 보이던데, 착각하지 마라. 이번 수행평가는 교사의 ‘고유 권한’ 하에 철저하게 대학원 논문 심사 수준으로 채점할 테니까. 기준 미달 보고서는 가차 없이 0점, 즉 과락(F)이다.”


노골적인 선전포고였다. 기말고사를 치르기도 전에 수행평가 감점 폭탄으로 F조 전체를 합법적으로 도태시키겠다는 남궁진과 최만수의 추악한 음모가 교실 한복판에 공표된 것이다. 현우는 이빨을 악물며 주먹을 쥐었고, 유진은 겁에 질려 손목의 실팔찌를 만지작거렸다.


쉬는 시간이 되자마자, 반장 정다은이 서류철을 안고 조심스럽게 태희의 책상 앞으로 다가왔다. 다은은 주변의 눈치를 살피며, 일부러 행정 유인물을 건네는 척 태희에게 몸을 굽혔다.


“태희야…… 이거 좀 봐.”


다은이 나직하게 속삭였다.


“무슨 일이야, 다은아?”


“어제 교무실 밀실 뒷방에서 남궁 주임님이랑 최만수 선생님이 하는 얘기를 들었어. 이번 수행평가, 무조건 너희 F조 애들 다 떨어뜨리려고 출제 기준 자체를 기괴하게 조작한 거래. 이미 상위권 우등생들 연합인 ‘청아관’ 애들한테는 임성택 컨설턴트가 짠 비공개 해설 가이드라인이 다 돌았어. 너희가 아무리 완벽하게 보고서를 써가도, 최 선생님이 고유 권한을 내세워서 무더기 감점 폭탄을 던질 거야. 무조건 0점 주려고 작정했어.”


태희의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한재준과 남궁진이 주고받던 그 흰색 봉투 속의 모의가 바로 이것이었던 것이다.


“알려줘서 고마워, 다은아.”


태희는 꼿꼿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상대가 합법적인 교직 권한을 무기로 칼을 휘두른다면, 이쪽에서도 규정과 명분을 무기로 맞서야 했다.


태희는 곧장 본관 교무실로 향했다. 최만수의 책상 앞으로 다가간 태희는 예의 바르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최만수 선생님, 이번 통합 수행평가 채점 기준표의 불공정성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고자 합니다. 고등학교 교육과정을 아득히 초과한 대학원 수준의 평가 기준은 교육부 가이드라인에 위배됩니다.”


최만수는 돋보기안경 너머로 태희를 빤히 바라보더니, 코방귀를 뀌며 들고 있던 붉은색 채점 펜을 책상 위에 툭 던졌다.


“윤태희, 네가 전교 1등이라고 해서 교사의 채권에 도전하려 드는 거냐? 채점 기준은 교사의 ‘고유 권한’이자 학년 주임님의 승인을 받은 합법적인 사항이야. 일개 학생이 감히 어디서 훈계를 하려 들어?”


“하지만 공정하지 못한……”


“시끄러워! 범죄자 집안 딸년이 학교의 배려로 장학금 받고 다니면 조용히 공부나 할 것이지, 쓰레기 낙제생들 감싸고 도느라 정신이 나갔군. 당장 나가! 한 번만 더 교무실에서 소란 피우면 벌점 부과하고 선도위원회에 넘길 테니까!”


최만수는 서류철로 태희를 밀쳐내듯 문전박대했다. 교무실 안의 다른 교사들은 남궁진의 눈치를 보며 일제히 고개를 돌려 방관했다.


문이 닫히고, 태희는 차가운 복도 한복판에 홀로 섰다. 억울함과 분노로 심장이 격렬하게 요동쳤다. 상대는 법과 제도라는 철벽을 두르고 있었고, 자신들이 휘두르는 붉은 채점 펜이 곧 법이라며 비웃고 있었다.


어둡고 서늘한 구관 지하 스터디룸으로 돌아온 태희는 책상에 주저앉아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방법이 없어…… 최만수가 0점을 주겠다고 작정하고 채점표를 쥐고 있는 이상, 우리가 어떤 보고서를 제출해도 무조건 과락이야.’


지독한 무기력감과 절망감이 그녀의 숨통을 조여왔다. 동생 태민이의 천식 호흡기 약값, 가계 부채의 족쇄, 그리고 자신을 믿고 밤새 단어를 외우고 대사를 외우던 조원들의 얼굴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만 같았다.


그때였다.


지독한 침묵만이 가득하던 스터디룸 안에서, 누군가 태희의 교복 소매 끝동을 조용히 잡아당겼다.


태희가 고개를 들었다.


그곳에는 선택적 함구증을 앓는 소녀, 서하은이 서 있었다. 늘 움츠러든 어깨로 헤드폰을 쓴 채 구석에 유령처럼 앉아 있던 아이.


하은은 말없이 태희를 바라보며, 자신의 품에 꼭 안고 있던 두껍고 정갈한 가죽 표지의 스프링 노트를 내밀었다. 하은의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지만, 그녀의 맑고 깊은 눈망울만큼은 흔들림이 없었다.


사락.


하은이 노트를 펼쳐 태희의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그곳에는 하은이 붉은색 만년필로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정갈하게 적어 내려간 글자들이 빼곡히 박혀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낙서가 아니었다. 최만수 교사가 출제한 난해한 통합 수행평가 문항에 대한 치밀하고 완벽한 ‘논리적 구조 분석’이었다.


[최만수 교사의 출제 문항 자체의 전제 오류:

홉스의 사회계약론적 최적화 모델(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은 한계 효용 수식과 수학적으로 양립할 수 없음. 홉스는 생존을 위한 권리의 ‘전면 양도’를 전제로 하지만, 한계 효용 수식은 개인의 ‘점진적 선택’을 전제로 하기 때문. 즉, 최만수의 출제 주제는 학문적 모순이자 성립 불가능한 전제 오류임.]


태희의 숨이 턱 멈췄다. 안경알 너머로 하은이 적어 내려간 문장들이 번개처럼 내리쳤다.


하은은 다시 한 장을 넘겼다. 그곳에는 백승우 노신사로부터 빌려온 ‘수행평가 고득점 족보’의 과거 만점 답안 분석과, 최만수 교사의 역대 채점 취향이 완벽하게 대조되어 표로 정리되어 있었다.


하은이 필담 노트 하단에 다시 한 줄을 꾹꾹 눌러 적었다.


[출제자가 스스로 파놓은 논리적 모순이야. 우리가 이 오류를 완벽하게 증명하는 보고서를 써낸다면, 최만수 선생님도 전교생 앞에서 감히 우리에게 0점을 던지지 못해. 채점 붉은 펜이 스스로 부러지게 만들자, 태희야.]


교실에서는 한마디도 하지 못하던 유령 같은 소녀. 하지만 그녀의 머릿속은 그 어떤 우등생보다 차갑고 거대한 논리의 우주를 완벽하게 지배하고 있었다.


태희는 하은의 노트를 올려다보며, 천천히 떨리는 주먹을 쥐었다. 절망으로 얼어붙던 그녀의 심장 가장 깊은 곳에서, 다시 한번 뜨거운 반란의 온기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HẾT CHƯƠ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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