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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이머와 아이돌의 기발한 퀘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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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스름한 주황색 백열등 불빛이 구관 지하 비밀 스터디룸의 눅눅한 벽면을 타고 흘러내렸다. 낡은 목재 책상 위에는 라면 냄새와 습한 곰팡이 향이 뒤섞인 채 부유하고 있었다.


태희는 안경을 치켜올리며 자신의 손바닥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현우가 어젯밤 조심스럽게 발라준 연고 덕분에 쓰라린 통증은 한결 가라앉았지만, 붉게 가라앉은 상처 흔적은 여전했다. 하지만 지금 태희의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손바닥의 상처가 아니었다. 어젯밤 하늘편의점 창밖, 가로등 불빛 아래에서 묵직한 흰색 봉투를 주고받던 한재준과 학년 주임 남궁진의 음산한 실루엣.


‘그 봉투 속에 든 게 무엇이든, F조를 완전히 도태시키려는 음모겠지.’


태희는 지독한 편두통을 느끼며 관자놀이를 짚었다. 1교시 국어 영역 0점. 그 대가로 특별 장학금 수혜 자격이 박탈될 위기였고, 반지하 단칸방의 방세와 남동생 태민이의 천식 흡입기 약값을 걱정해야 하는 가난의 무게가 가슴을 짓눌렀다. 하지만 태희는 입술을 깨물며 가죽 다이어리를 펼쳤다. 밤새 자신의 수면 시간을 조각내가며 조원들의 행동 패턴과 정서적 트라우마를 분석해 기록한 ‘F조 성장 일지’였다.


“이봐, 전교 1등. 나 오늘 피시방 가야 하니까 자습은 대충 끝내지?”


스터디룸 구석에서 헐렁한 후드티를 뒤집어쓴 민우가 삐딱하게 앉아 중얼거렸다. 그의 손가락은 자체 개조한 고성능 미니 노트북의 키보드 위를 기계적으로 두드리고 있었다. 화면에는 화려한 RPG 게임의 길드전 레이드가 실시간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종합 성적 하위 10%의 중증 게임 중독자. 하지만 정보 교과만큼은 전교 1등을 놓치지 않는 천재적인 해킹 능력을 숨긴 아웃사이더.


태희는 말없이 칠판 앞으로 걸어가 분필을 쥐었다.


“강민우, 오늘 목표는 영어 필수 어휘 100개 암기야. 칠판에 적은 어근 분석법을 토대로……”


“아, 지루해. 주입식 교육의 전형이네.”


민우는 하품을 크게 하며 귀에 헤드폰을 걸쳤다. 태희의 전통적인 교수법은 게임에 절여진 그의 뇌에 단 1초의 자극도 주지 못했다. 태희는 칠판을 짚은 손에 힘을 주었다. 어젯밤 밤새 머리를 쥐어짜며 준비한 비장의 카드를 꺼낼 때였다. 꼴찌들을 공부시키기 위해서는 억압적인 회찍질이 아니라, 그들의 뇌가 가장 흥분하고 몰입할 수 있는 영역을 학업과 결합해야 했다.


태희는 가방에서 자신의 스마트폰을 꺼내 민우가 스터디룸에 은밀히 우회 연결해 둔 무선 인터넷망 포트에 접속했다. 그리고 민우의 노트북 화면으로 특수 제작한 로컬 스크립트를 기습적으로 송출했다.


틱, 틱, 틱.


민우의 노트북 화면이 순식간에 암전되더니, 붉은색 픽셀 글씨로 정교하게 디자인된 퀘스트 창이 팝업되었다.


[★ 실시간 돌발 퀘스트: 숫자의 감옥을 해킹하라 ★]

- 임무: 영어 필수 단어 100개 암기 및 실시간 하브루타 테스트 통과.

- 제한 시간: 40분.

- 보상: 경험치 100 획득 및 ‘하늘편의점 야간 자습용 고성능 마우스’ 혹은 ‘PC방 2시간 자유 이용권’ 쿠폰.

- 실패 시 페널티: F조 스터디룸 무선 인터넷 우회 포트 24시간 강제 셧다운.


민우의 손가락이 키보드 위에서 뚝 멈췄다. 그의 둥근 뿔테 안경 너머로 번뜩이는 천재적인 안광이 서렸다. 민우는 노트북 화면을 들여다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태희를 바라보았다.


“……이거 네가 짰냐?”


“네가 어제 연결해 둔 프록시 서버의 보안 취약점을 좀 이용했어.”


태희는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타이머의 태엽을 감았다. 째깍거리는 소리가 지하실의 정적을 깨웠다.


“실패하면 네가 밤새 돌리는 매크로 프로그램도 전부 날아갈 텐데, 퀘스트를 수락하겠어, 게이머?”


민우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승부욕. 평생 자신을 쓰레기라 부르며 방치하던 학교 시스템 속에서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기묘한 도전 욕구가 그의 심장을 두드렸다.


“재미있네. 전교 1등이 코딩도 할 줄 알고. 수락하지, 그 퀘스트.”


민우는 즉각 단어장을 움켜쥐고 무서운 속도로 텍스트를 뇌리에 크롤링하기 시작했다. 게임 퀘스트를 격파하듯 그의 눈동자가 좌우로 격렬하게 움직였다.


그러나 민우의 돌파구와 달리, 반대편 책상에서는 또 다른 위기가 싹트고 있었다.


유진이 영어 단어장 뒤에 숨겨진 윤리와 사상 교과서를 보며 이마에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홉스, 로크, 루소의 사회계약론과 동양 사상가들의 난해한 텍스트들이 그녀의 눈앞에서 어지럽게 소용돌이쳤다. 대형 기획사 ‘스타덤’의 에이스 연습생으로서 겪는 가혹한 평가 압박과 수면 부족, 그리고 가면 우울증이 겹치며 그녀의 호흡이 서서히 가빠지기 시작했다.


“유진아, 괜찮아?”


옆자리에 앉아 있던 하은이 깜짝 놀라며 필담 노트를 내밀었다. 유진은 자신의 떨리는 왼손목에 감긴 은색 실팔찌를 꽉 움켜쥐었다. 태희가 지난 모의고사 날 공황 발작을 진정시키기 위해 묶어준 소중한 끈이었다.


“나…… 이 단어들이 전부 나를 비웃는 것 같아. ‘자연 상태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다’라는 문장을 보는데, 기획사 연습실의 거울방에 갇힌 것처럼 숨이 안 쉬어져……”


유진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주입식 암기 교육은 그녀의 심리적 트라우마를 자극하는 가장 날카로운 칼날이었다. 태희는 다이어리를 덮고 유진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밤새 작성한 또 하나의 무기, 얇은 연극 대본 형태의 유인물을 유진의 책상 위에 부드럽게 올려놓았다.


“유진아, 억지로 외우지 마. 너는 대본을 외우는 배우잖아.”


“……대본?”


유진이 눈물을 훔치며 유인물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딱딱한 철학 공식이 아닌, 인물들의 성격과 대사, 무대 지시문이 정교하게 적혀 있었다.


“다중지능 이론에 따르면, 너는 언어적 암기력보다 신체 운동과 대인 관계적 감수성이 극대화된 천재야. 사상가들의 이론을 하나의 연극 캐릭터로 생각하는 거지.”


태희는 대본의 첫 장을 가리켰다.


“토마스 홉스는 기획사 대표 유만식처럼 인간의 이기심을 극단적으로 불신하는 차가운 독재자 캐릭터야. 반면 존 로크는 계약을 어기면 언제든 대표를 갈아치울 수 있다고 주장하는 합리적인 주주 대표 캐릭터고. 장 자크 루소는 자유로운 무대를 갈망하는 예술가 캐릭터지. 어때, 이해가 가?”


유진의 흔들리던 눈동자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추상적인 철학 개념이 그녀가 매일 겪는 연예계의 현실적인 역학 관계로 치환되는 순간, 뇌의 닫혀 있던 인지 영역이 폭발적으로 열렸다.


“이거…… 진짜 대본 같아. 캐릭터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그럼 직접 연기해 봐. 하은이가 관객이자 연출가가 되어 피드백을 줄 거야.”


하은은 환하게 웃으며 필담 노트에 [유진이의 루소 연기, 기대할게!]라고 적어 보였다.


유진은 스터디룸 중앙으로 걸어 나갔다. 그녀는 깊은 호흡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가 떴다. 순간, 가면 우울증의 그늘 뒤에 숨겨져 있던 에이스 연습생의 압도적인 표현력과 스토리텔링 역량이 뿜어져 나왔.


“자연 상태의 인간은 원래 자유롭고 평등했어!”


유진은 루소의 대사를 읊조리며, 마치 가혹한 기획사의 쇠사슬을 끊어내려는 자유로운 영혼의 예술가처럼 몸짓을 크게 가져갔다.


“하지만 사유 재산과 사회라는 제도가 생기면서, 인간은 도처에서 사슬에 묶이게 되었지. 그래서 우리는 진짜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정당한 계약을 맺어야 해!”


그녀의 목소리가 지하 스터디룸의 붉은 벽돌 벽에 부딪혀 웅장하게 울려 퍼졌다. 홉스 가면을 쓴 현우가 퉁명스럽게 대사를 받아치자, 스터디룸 안은 순식간에 뜨거운 배움의 연극 무대로 변모했다. 민우 역시 단어 퀘스트 100개를 완벽히 클리어하여 ‘경험치 획득’ 알림음이 노트북에서 울리자, 의기양양하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


숫자와 등급이라는 가짜 가치로 아이들을 짓밟던 청아제일고의 차가운 주입식 교육 방식과 대비되는, 오직 F조만이 개척해 낸 주체적이고 뜨거운 대안 학습의 현장이었다. 아이들의 얼굴에 오랜만에 가공되지 않은 진실한 웃음꽃이 피어났다.


새벽 1시.


스터디룸의 공부 열기가 최고조에 달하며, 모두가 가채점 평균을 넘어 기말고사를 정복할 수 있다는 희망에 부풀어 있던 그 순간이었다.


철컥.


스터디룸 문바깥, 어둡고 낡은 구관 도서관 복도 깊은 곳에서 정적을 깨뜨리는 날카로운 소리가 울렸다.


딸랑, 딸랑, 딸랑딸랑!


청동 방울이 거칠게 부딪히는 요란하고 다급한 경보음. 박종두 경비원이 남궁진과 선도부의 야간 기습 단속 수색대가 다가오고 있음을 알리는 최후의 비상 신호였다.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주황색 백열등 불빛 아래에서, 태희는 굳어버린 손가락으로 마스터 키를 꽉 움켜쥐었다. 복도 저편에서 무거운 군화 소리가 지하 계단을 밟고 내려오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HẾT CHƯƠ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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