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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자의 감옥을 깨는 첫 번째 온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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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물이 멎은 구관 지하실의 공기는 지독하게 눅눅하고 차가웠다. 주황색 백열등만이 낡은 스터디룸의 탁자 위를 쓸쓸하게 비추고 있었다. 태희는 책상 위에 놓인 자신의 양손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시멘트 벽돌을 움켜쥐고 지하실 자물쇠를 내리칠 때 생긴 상처들이 손바닥 곳곳에 붉은 갈라짐으로 박혀 있었다. 쓰라린 통증이 신경을 타고 뇌를 자극했지만, 태희의 마음을 더 무겁게 짓누르는 것은 가슴 깊은 곳에서 울리는 차가운 현실이었다.


‘국어 0점.’


청아제일고등학교 입학 이래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숫자. 전교 1등의 성적표에 새겨진 그 비현실적인 공백은 태희의 목을 조르는 보이지 않는 밧줄과 같았다. 머릿속에서 어머니 한정임의 지친 얼굴이 아른거렸다. 밤새 요양원에서 환자들을 돌보고 돌아와 거칠어진 손으로 가계부를 정리하며, ‘엄마는 너만 믿는다’고 나직하게 읊조리던 목소리. 만성 천식을 앓는 남동생 태민이의 파란색 흡입기 약값과 밀린 반지하 방세가 이번 모의고사 0점으로 인해 날아가 버릴 위기였다. 재단에서 지급하는 ‘교내 특별 장학금’ 수혜 조건은 ‘전교 1등 유지’였으니까.


“가채점 결과 나왔어.”


지하 스터디룸 구석에서 노트북 키보드를 두드리던 민우가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그의 충혈된 눈동자가 화면의 스프레드시트를 향해 있었다. 평소의 냉소적인 표정은 온데간데없고, 민우의 손가락 끝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우리 조 평균…… 62.5점이야.”


순간 스터디룸 안의 공기가 멈췄다. 유진이 숨을 들이켜며 단어장을 떨어뜨렸고, 헤드폰을 쓰고 있던 하은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그럼…… 우리 퇴학 안 당하는 거야?”


유진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청아제일고 학칙 제14조, 공동 학습 조원 중 단 한 명이라도 과락(F, 평균 60점 미만)을 받으면 전원 퇴학이라는 연대책임제의 덫. 그 가혹한 올가미를 가까스로 넘어선 순간이었다. 현우가 마지막 10분 동안 피를 흘리며 마킹한 답안지와 민우, 유진, 하은이 밤새 외운 개념들이 빛을 발한 결과였다.


하지만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민우가 화면을 태희 쪽으로 돌리며 씁쓸하게 말했다.


“근데 윤태희, 네 성적이 이상해. 수학, 영어, 과학은 전부 만점인데…… 국어가 0점이야. OMR 카드가 백지로 처리됐어. 이거 채점 오류 아니야?”


그 말에 유진과 하은이 태희의 책상 앞으로 다가왔다. 태희는 피 묻은 손바닥을 숨기기 위해 슬그머니 손을 책상 밑으로 내렸지만, 안경 너머의 흔들리는 눈동자까지 감출 수는 없었다.


“오류가 아니야.”


문가에 삐딱하게 기대어 서 있던 현우가 낮고 갈라진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그의 오른손에는 피와 빗물에 젖어 붉게 물든 압박 붕대가 애처롭게 감겨 있었다. 현우는 고개를 숙인 채, 이빨을 악물며 말을 이었다.


“윤태희 시험 시작할 때 교실에 없었어. 나 데려오느라 시험 포기하고 학교 뛰쳐나간 거야.”


“뭐……? 그게 무슨 소리야, 현우야?”


유진의 얼굴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렸다.


“한재준 그 새끼가 우리 아버지를 부추겨서 나를 옥탑방 지하실에 가뒀어. 내가 시험장에 못 오게 하려고. 윤태희는 그거 알고 지하실 문 부수러 온 거고.”


현우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쇠사슬로 감긴 문을 벽돌로 내리쳐서 열었어. 자기 손바닥이 다 터져나가는지도 모르고…… 나 같은 쓰레기 때문에 전교 1등짜리 시험을 그냥 날려버렸다고.”


스터디룸 안은 지독한 침묵 속에 가라앉았다. 유진은 태희의 엉망이 된 교복 깃과 손바닥의 붉은 상처를 번갈아 바라보다가, 결국 눈물을 터뜨렸다.


“바보야? 윤태희, 너 진짜 바보야? 왜 우리 같은 쓰레기들 때문에 네 인생을 망쳐! 우린 어차피 학교에서 낙오자 취급받는 애들이잖아! 왜 네 귀한 성적을 우리한테 던지냐고!”


유진의 외침은 원망이 아닌, 감당할 수 없는 미안함과 부채감에서 나오는 비명이었다. 언제나 차가운 독재자처럼 자신들을 통제하려던 전교 1등이, 실은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 가장 소중한 것을 기꺼이 던졌다는 사실이 아이들의 심장을 사정없이 후벼팠다.


하은은 떨리는 손으로 줄노트를 펼쳐 만년필을 꾹꾹 눌러 적었다. 맑은 종이 위에 푸른 잉크가 번져나갔다.


[태희 너도 아버지가 없구나…… 우리랑 똑같이 아프고 힘든 처지면서, 왜 혼자서 다 짊어지려고 해? 왜 우리를 지키려고 네 몸을 부숴?]


하은이 노트를 들어 태희의 눈앞에 보였다. 글자 하나하나에 담긴 따뜻하고 깊은 공감이 태희의 굳게 닫혀 있던 강박의 벽을 건드렸다. 태희는 입술을 바짝 깨물었다. 울지 않으려 안경다리를 꽉 쥐었지만, 손바닥의 찰과상 통증보다 가슴 안쪽에서 뿜어져 나오는 뜨거운 감정이 더 강했다.


그때, 현우가 묵묵히 태희의 앞으로 걸어왔. 그는 자신의 낡은 체육부 가방을 뒤적거리더니 작은 연고 튜브와 새 붕대를 꺼내 들었다. 학교로 돌아오는 길에 약국에 들러 사 온 모양이었다. 현우는 붕대 감은 투박한 오른손으로 조심스럽게 태희의 피 묻은 손을 끌어당겼.


“아프니까 가만히 있어.”


현우의 말투는 여전히 퉁명스러웠지만, 태희의 손바닥에 연고를 바르는 손길은 지독할 정도로 섬세하고 조심스러웠다. 거친 유도 선수 출신의 반항아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부드러운 온기였다. 차가운 연고가 상처에 닿자 태희는 미세하게 몸을 떨었다. 현우는 고개를 숙인 채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미안하다. 너더러 재단의 개라고 부르고, 위선자라고 욕해서…… 진짜 미안해.”


현우의 눈에서 떨어진 눈물 한 방울이 태희의 손등 위로 떨어졌다. 빗물보다 더 뜨거운 온기였다. 태희는 그 눈물을 보며 자신의 마음속에 가두어 두었던 오만한 강박증이 서서히 녹아내리는 것을 느꼈다. 성적이라는 숫자, 완벽한 계획표, 타인을 기계처럼 통제하려던 효율성의 논리…… 그 차가운 숫자의 감옥이 아이들의 진심 어린 온기 앞에서 허물어지고 있었다.


태희는 가방에서 늘 쥐고 다니던 두꺼운 플래너를 꺼냈다. 조원들의 일거수일투족을 통제하기 위해 10분 단위로 빼곡하게 적어두었던 강박의 상징. 태희는 망설임 없이 그 플래너를 스터디룸 구석의 플라스틱 쓰레기통 속으로 던져 넣었다. 툭, 소리와 함께 플래너가 먼지 속에 처박혔다.


“이제 이런 기계적인 계획표는 없어.”


태희는 눈물을 훔치며 안경을 고쳐 썼다. 상처 입은 눈매였지만, 그 어느 때보다 단단하고 맑은 눈빛이었다.


“너희는 쓰레기가 아니야. 내 소중한 팀원이고, 우리는 하나의 공동운명체야. 내가 장학금을 잃었든 말든 상관없어. 기말고사 때 다시 빼앗아 오면 돼. 그러니까…… 이제부터 진짜 같이 공부하자. 서로의 속도에 맞춰서.”


유진이 코를 훌쩍이며 고개를 끄덕였고, 민우는 말없이 낡은 모자를 푹 눌러썼지만 입가에 엷은 미소를 띠었다. 하은은 필담 노트를 꼭 쥔 채 환하게 웃어 보였다. 차가운 구관 지하실에, 처음으로 어른들의 통제와 등급제의 칼날이 미치지 않는 인간적인 온기가 가득 찼다.


“배고프다. 밤새 비 맞고 뛰었더니 배 속에서 천둥이 치네.”


현우가 붕대를 다 감은 뒤 머리를 긁적이며 분위기를 깨뜨렸다. 조원들이 참지 못하고 가벼운 웃음을 터뜨렸다. 태희 역시 붉어진 눈을 하고서 나직하게 웃었다.


“가자. 내가 컵라면 살게.”


다섯 아이들은 구관 지하실의 철문을 잠그고 밖으로 나섰다. 밤하늘은 빗물이 가신 뒤 맑게 개어 있었고, 차가운 공기 사이로 가을밤의 별들이 조용히 빛나고 있었다.


그들이 향한 곳은 학교 정문에서 조금 떨어진 골목 모퉁이의 ‘하늘편의점’이었다. 노란색 야간 조명이 밤거리를 따뜻하게 밝히고 있는 그곳은, 어른들의 감시망이 미치지 않는 유일한 해방구였다. 편의점 문을 열고 들어가자, 야간 알바생인 대학 휴학생 김동현이 오토바이 헬멧을 카운터에 내려놓으며 그들을 반갑게 맞이했다.


“어이, 영웅들 왔냐? 아까 옥탑방에서 아주 첩보전 찍더만. 무사해서 다행이다.”


“동현 오빠, 아까 진짜 고마웠어요. 오빠 아니었으면 나 지하실에서 나오지도 못했을 거예요.”


현우가 머리를 숙이며 감사를 전했다. 동현은 서글서글하게 웃으며 유통기한이 몇 시간 남지 않은 삼각김밥 여러 개와 따뜻한 캔음료를 테이블 위로 슬그머니 밀어놓았다.


“이거 폐기 직전인 건데, 아까 고생한 F조 특별 배식이다. 맛있게 먹고 기운 차려라.”


“와! 대박! 동현이 형 최고!”


민우가 삼각김밥을 낚아채며 환호했고, 아이들은 편의점 구석의 플라스틱 테이블에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뜨거운 물을 부은 컵라면에서 뿜어져 나오는 구수한 수증기가 아이들의 얼굴을 따뜻하게 감싸 안았다. 삼각김밥을 나누어 먹고, 라면 국물을 들이켜며 나누는 소소한 이야기들. 그곳에는 전교 1등도, 전교 꼴찌도, 아이돌 연습생도 없었다. 오직 서로의 아픔을 이해하고 함께 살아남은 다섯 명의 평범한 열여덟 살 청춘들만이 존재했다.


태희는 라면을 후후 불어 한 입 먹으며 가만히 웃음 짓는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숫자로 매겨진 등급이 가득한 교정 안에서는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가슴을 채우는 묵직한 포만감과 온기였다. 이 아이들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성적표 따위는 몇 번이고 시멘트 벽돌로 깨부술 수 있을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때였다.


따뜻한 라면 연기 사이로 편의점 유리창 너머 어두운 밤거리가 태희의 시야에 들어왔. 편의점 맞은편, 가로등 불빛이 흐릿하게 비추는 골목길 구석에 검은색 세단 한 대가 조용히 멈춰 서 있었다.


태희는 무심코 시선을 던졌다가 가늘게 눈을 떴다.


차문이 열리고 내린 인물은 단정하게 다려진 청아제일고 교복 깃을 세운 전교 2등 한재준이었다. 그의 얼굴에는 낮에 교실에서 보여주었던 가식적인 미소 대신, 지독할 정도로 차갑고 음침한 안색이 서려 있었다.


재준은 주변을 극도로 살피더니, 골목 어둠 속에서 걸어 나오는 한 남자를 향해 다가갔다. 목끝까지 단추를 채운 흐트러짐 없는 단정한 양복 차림의 남자. 학년 주임 남궁진이었다.


재준은 자신의 품 안에서 두껍고 묵직한 흰색 비밀 봉투를 꺼내 남궁진에게 건넸다. 남궁진은 익숙한 손놀림으로 봉투를 받아 자신의 양복 안주머니 깊숙한 곳에 집어넣었다. 두 사람은 가로등 불빛 아래에서 머리를 맞댄 채, 무언가 음험하고 정교한 계획을 모의하듯 은밀하게 속닥거리기 시작했다.


편의점 창가 너머로 비치는 그 추악한 유착의 실루엣을 바라보며, 태희는 젓가락을 쥔 손에 서서히 힘을 주었다. 따뜻하던 가슴속 온기가 순식간에 차가운 이성적 투지로 변해갔다.


‘한재준, 그리고 남궁진…….’


F조가 첫 모의고사에서 살아남았다는 안도감도 잠시, 적들의 진짜 음모가 어둠 속에서 거대한 아가리를 벌리고 다가오고 있었다. 태희는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창밖의 어둠을 매섭게 쏘아보았다.

HẾT CHƯƠ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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