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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등의 자리를 꺾고 달린 새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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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태희! 지금 이 문을 나서면 무단이탈로 1교시는 즉시 0점 처리다! 전교 1등 타이틀도, 네가 목매던 장학금도 전부 끝장이라는 소리야!”


학년 주임 남궁진의 차가운 사자후가 교실 안을 찢어발겼다. 교단 위에 선 그의 무테안경 너머로 노골적인 경멸과 당혹감이 교차했다. 전교생의 모범이 되어야 할 전교 1등이 시험 시작 직전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초유의 사태. 교실 안의 아이들은 숨조차 쉬지 못한 채 태희를 바라보았다. 저 멀리 창가 자리에 앉은 한재준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뒤틀렸다. 계획대로라는 듯한, 지독하게 비열한 미소였다.


하지만 태희는 멈추지 않았다. 어깨에 가방을 단단히 고쳐 메며 남궁진을 똑바로 응시했다.


“학칙 제14조에 따르면 공동 학습 조원 중 단 한 명이라도 결시하거나 과락을 맞으면 F조 전원이 즉각 퇴학 처분을 당합니다. 제가 이 자리에서 100점을 맞아봤자, 현우가 시험장에 오지 못하면 저 역시 퇴학입니다.”


태희의 목소리는 얼음장처럼 차분했지만, 그 안에는 뼈를 깎는 듯한 오기가 서려 있었다.


“제 백분위 99.9%라는 숫자가 아무리 빛나도, 시스템이 파놓은 함정 앞에서는 무용지물이라는 뜻이죠. 그러니까…… 데려오겠습니다. 제 손으로 직접.”


“윤태희!”


남궁진의 고함을 뒤로한 채, 태희는 교실 뒷문을 거칠게 열고 복도로 뛰쳐나갔다. 빗방울이 창문을 때리기 시작하는 소리가 들렸다. 예비종의 잔향이 채 가시지 않은 복도를 달리며 태희는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냈다. 화면에는 수신 불가 신호만 깜빡이고 있었다. 한재준이 현우의 아버지 김도식을 자극해 감금했다는 심증은 확실했다. 하지만 물증을 찾을 시간 따위는 없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오직 속도뿐이었다.


태희는 젖은 복도를 미끄러지듯 달려 정문을 통과했다. 빗줄기가 순식간에 굵어지며 그녀의 단정한 단발머리와 교복 셔츠를 적셨다. 안경알에 빗물이 맺혀 시야가 흐려졌지만, 그녀는 안경을 벗어 주머니에 찔러 넣고 달동네 비탈길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가파르고 좁은 골목길. 빗물과 흙탕물이 뒤섞여 흘러내리는 진흙탕 비탈길은 디딜 때마다 미끄러졌다. 무릎의 쓸린 상처가 욱신거렸고, 빗물을 머금은 구두는 납덩이처럼 무거웠다. 숨이 턱밑까지 차올라 폐가 찢어질 것 같은 통증이 밀려왔다. 가난한 집안 형편, 만성 천식을 앓는 남동생 태민이의 파란색 흡입기 약값, 어머니의 거친 손마디…… 그 모든 현실적 족쇄들이 발목을 잡아당기는 것 같았다.


‘여기서 멈추면 다 끝이야. 나도, 현우도, F조 아이들도 전부 어른들이 만든 등급제의 쓰레기통으로 처박히는 거라고!’


태희는 빗물을 훔쳐내며 달리는 와중에 스마트폰을 켜 단축번호를 눌렀. 학교 앞 ‘하늘편의점’의 야간 알바생이자 F조의 든든한 조력자인 김동현이었다.


“동현 오빠! 제발 도와주세요! 현우 아버지가 현우를 옥탑방 지하실에 가둔 것 같아요. 오토바이로 현우네 마당에서 시선 좀 끌어주세요! 제발요!”


“뭐? 현우가? 알았어, 지금 바로 출발할게!”


동현의 든든한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리자마자 태희는 전화를 끊고 마지막 언덕길을 향해 몸을 던졌다. 지독한 가난의 냄새가 배어있는 달동네 골목길 끝자락, 현우의 옥탑방 주택이 눈앞에 나타났다.


마당으로 들어서는 순간, 태희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마당 한가운데에는 술 냄새를 풍기며 붉게 충혈된 눈을 한 거구의 김도식이 깨진 소주병을 손에 쥔 채 서성거리고 있었다. 유도 선수 출신의 비대한 풍채가 뿜어내는 위압감은 상상 이상이었다. 옥탑방 지하실 계단 입구 앞에는 현우의 여동생 김현아가 주저앉아 울부짖고 있었다.


“언니! 오빠가 저 밑에 갇혔어요! 아빠가 쇠사슬로 잠갔어요! 오빠 손에서 피가 나요!”


“이 기집애가 어디서 소리를 질러!”


김도식이 붉은 얼굴로 소주병을 치켜들며 현아에게 다가가려 했다. 태희가 몸을 던져 현아의 앞을 막아서려던 찰나, 귀를 찢는 듯한 오토바이 엔진 소리가 좁은 골목길을 가득 채웠다.


부아아앙—!


동현이 모는 편의점 배달용 오토바이가 마당 안으로 미끄러지듯 들어섰다. 젖은 흙탕물이 사방으로 튀며 김도식의 바지를 적셨다. 동현은 오토바이 전조등을 김도식의 얼굴에 정면으로 비추며 가속기를 거칠게 당겼다.


“아저씨! 오토바이 불법 주차 신고 들어왔는데, 이거 아저씨 땅 맞습니까? 얘기 좀 합시다!”


“뭐야? 이 새끼가 미쳤나!”


눈이 부신 전조등 빛과 굉음에 눈을 찌푸린 김도식이 소주병을 휘두르며 동현에게로 방향을 틀었다. 동현은 능숙하게 오토바이를 선회하며 김도식을 마당 구석으로 유인하기 시작했다. 완벽한 시선 교란이었다.


“현아야, 지하실로 안내해!”


태희는 현아의 손을 잡고 빗물이 고인 지하실 계단 아래로 뛰어 내려갔다. 어둡고 눅눅한 지하 공간의 끝에, 녹슨 철문이 거대한 쇠사슬과 황동 자물쇠로 굳게 잠겨 있었다. 문틈 사이로 거친 호흡 소리가 새어 나왔다.


“현우야! 안에 있어?”


태희가 철문을 두드리며 소리쳤다.


“태희야……? 너 왜 여기 있어…… 오늘 모의고사잖아! 전교 1등 시험은 어쩌고!”


철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현우의 목소리는 절망과 통증으로 갈라져 있었다. 자신의 오른손 붕대 감은 골절 부위가 다시 뒤틀려, 안쪽에서 맨손으로 문을 부수려다 피투성이가 된 채 주저앉아 있었던 것이다.


“시끄러워! 네가 안 오면 나도 퇴학이야! 문 열 테니까 준비나 해!”


태희는 주변을 미친 듯이 뒤졌다. 열쇠는 없었다. 그 순간, 빗물에 젖은 진흙 바닥에 뒹굴고 있는 낡고 무거운 시멘트 벽돌이 눈에 들어왔. 거칠고 모서리가 깨진 붉은 벽돌이었다.


태희는 망설임 없이 벽돌을 양손으로 들어 올렸다. 가녀린 여고생의 팔에는 너무나도 무거운 무게였다. 뼈마디가 비명을 질렀지만, 그녀는 온 힘을 다해 쇠사슬 자물쇠를 향해 벽돌을 내리쳤.


깡—!


날카로운 금속음이 지하실 사방에 메아리쳤다. 자물쇠는 찌그러졌을 뿐 부서지지 않았다. 반동으로 인해 벽돌의 거친 단면이 태희의 부드러운 손바닥을 긁고 지나갔다. 붉은 피가 손바닥에서 흘러내려 빗물과 섞였다. 타는 듯한 통증이 밀려왔지만 태희는 이빨을 악물었다.


“그만해, 윤태희! 너 손 다쳐! 네 손은 연필 쥐고 공부해야 하는 손이잖아! 나 같은 쓰레기 때문에 왜 네 인생을 망쳐!”


현우가 안에서 문을 발로 차며 울부짖었다. 그의 목소리에 담긴 지독한 자책감과 슬픔이 태희의 심장을 찔렀다. 태희는 피투성이가 된 손으로 다시 벽돌을 꽉 쥐었다.


“누가 너더러 쓰레기래? 넌 F조 조원이고, 내 팀원이야! 난 내 팀원 절대 포기 안 해!”


태희는 비명에 가까운 고함을 지르며 온 체중을 실어 벽돌을 내리쳤.


깡! 콰직—!


녹슨 황동 자물쇠의 고리가 비틀리며 쇠사슬이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철문이 거칠게 열리며 어둠 속에서 피와 먼지로 범벅이 된 현우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의 오른손 압박 붕대는 붉은 피로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태희는 주저하지 않고 현우의 왼손을 꽉 움켜쥐었다. 피 묻은 그녀의 손바닥 온기가 현우의 차가운 손으로 고스란히 전해졌다.


“일어나. 뛰어.”


현우는 멍하니 태희를 바라보았다. 단정하던 그녀의 교복은 흙탕물로 엉망이 되었고, 안경은 잃어버린 채 머리카락은 비에 젖어 뺨에 달라붙어 있었다. 손바닥에서는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언제나 차갑고 위선적이라고 생각했던 전교 1등이, 자신을 구하기 위해 온몸을 던져 쇠사슬을 부수고 서 있었다.


현우의 마음속 깊은 곳에 쳐져 있던 지독한 불신의 빗장이, 그 거친 벽돌 소리와 함께 산산조각 나며 허물어졌다.


“어디 가, 이 새끼들아!”


마당 위에서 김도식이 소리를 지르며 계단 아래를 내려다보았지만, 동현이 오토바이 경적을 울리며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현우야, 뒤는 내가 맡을 테니까 무조건 뛰어!”


동현의 외침과 동시에 현우는 태희의 손을 잡고 빗속으로 발을 내디뎠다. 두 사람은 달동네 비탈길을 미친 듯이 질주하기 시작했다. 쏟아지는 폭우가 그들의 얼굴을 때렸고, 진흙탕이 다리를 무겁게 짓눌렀지만 두 사람의 손은 단 한 순간도 떨어지지 않았다. 현우는 다친 손가락의 통증도 잊은 채, 오직 앞서 달리는 태희의 단호한 등만을 바라보며 한계까지 달렸다.


***


오전 8시 50분, 청아제일고등학교 2학년 3반 교실.


1교시 언어 영역 시험 종료를 알리는 시계 침이 단 10분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교실 안은 고요한 연필 소리만이 가득했고, 남궁진은 팔짱을 낀 채 만족스러운 미소로 텅 빈 태희와 현우의 책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쾅—!


교실 뒷문이 부서질 듯 열리며 두 개의 그림자가 교실 안으로 들이닥쳤다.


반 아이들이 일제히 고개를 들어 경악을 금치 못했다. 문앞에 선 두 사람은 그야말로 엉망진창이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빗물과 진흙으로 젖어 있었고, 태희의 손바닥과 현우의 붕대에서는 붉은 피가 바닥으로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남궁진의 얼굴에서 미소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의 눈동자가 믿을 수 없다는 듯 격렬하게 흔들렸다.


“너희들…… 지금이 어느 시간이라고 감히 이 꼴로 시험장에 난입하는 거냐! 즉시 퇴실해라!”


남궁진이 단상을 내리치며 고함을 질렀다. 하지만 태희는 피 묻은 손으로 자신의 책상 위에 놓여 있던 백지 OMR 카드를 움켜쥐었다. 그녀는 이미 1교시를 통째로 날려 0점이 확정된 상태였다. 그러나 그녀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김현우 학생은 시험 종료 10분 전 정식 입실했습니다. 마킹할 자격이 있습니다.”


태희는 현우를 그의 책상으로 밀어 넣었다. 현우는 자리에 앉아 젖은 숨을 몰아쉬며 피에 젖은 압박 붕대를 이빨로 꽉 물어 당겨 다시 동여맸다. 그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 자신을 위해 전교 1등의 백분위 99.9%라는 완벽한 성적표를 과감히 포기하고 피를 흘린 소녀가 바로 눈앞에 서 있었다.


현우는 떨리는 왼손으로 컴퓨터용 싸인펜을 쥐었다. 그리고 찢겨진 예상 문제집의 기억을 머릿속에서 더듬으며, 남은 10분 동안 OMR 카드에 필사적으로 마킹을 시작했다.


종료 벨이 울리기 직전, 마지막 번호에 마킹을 마친 현우는 고개를 들어 자신을 바라보며 엷은 미소를 짓고 있는 태희를 바라보았다. 비와 땀, 그리고 피로 범벅이 된 전교 1등의 얼굴은, 그가 평생 보아온 그 어떤 숫자보다 아름다웠다.

HẾT CHƯƠ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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