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는 다리와 닫힌 철문
철문이 부서질 듯 닫힌 지하 스터디룸에는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교탁 위에서 붉은빛을 발하던 토마토 모양의 뽀모도로 타이머는 눈치 없이 째깍거리며 마지막 1분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남겨진 아이들은 얼어붙은 채 서로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유진은 단어장을 쥔 손을 떨었고, 민우는 키보드 위에 손을 얹은 채 굳어 있었다. 하은은 움츠러든 어깨를 더욱 좁히며 찢어진 현우의 연습장 조각을 멍하니 응시했다.
현우가 전화를 받고 나가며 흘린 핏방울 몇 개가 낡은 콘크리트 바닥 위에서 서서히 굳어가고 있었다.
“태희야... 현우 오빠 저러고 나가면 어떡해? 내일이 첫 모의고사잖아.”
유진이 떨리는 목소리로 정적을 깨뜨렸다. 가면에 가려진 그녀의 얼굴 너머로 극심한 불안감이 묻어났다.
태희는 마른침을 삼켰다. 머릿속이 복잡하게 꼬여 들어갔다. 청아제일고 학칙 제14조, 연대책임제. 조원 중 단 한 명이라도 무단 결시하거나 과락을 맞으면 전원 즉각 퇴학이다. 그것은 학교 측이 F조를 합법적으로 축출하기 위해 설계한 정교한 덫이었다. 현우가 내일 아침 시험장에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동안 밤을 새워가며 쌓아온 모든 노력이 한순간에 수포로 돌아간다.
“민우야, 현우 휴대전화 GPS 추적할 수 있어?”
태희의 질문에 민우가 안경을 치켜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꺼졌어. 기지국 신호가 완전히 차단된 상태야. 마지막으로 잡힌 위치는 현우네 옥탑방 근처인데... 그 이후로는 먹통이야.”
가슴을 짓누르는 압박감에 태희는 관자놀이를 짚었다. 쓸려나간 무릎의 상처가 욱신거렸지만, 지금 그녀를 가장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은 실패에 대한 극심한 공포였다. 만약 F조가 해체된다면 남동생 태민이의 만성 천식 치료비 지원도, 어머니의 빚을 갚을 유일한 동아줄인 교내 특별 장학금도 전부 날아간다.
‘안 돼. 여기서 무너질 수는 없어.’
태희는 입술을 깨물며 가죽 다이어리를 움켜쥐었다. 오윤재 선배의 노트에서 발견한 지혜를 떠올리며, 그녀는 이 상황을 해결할 이성적인 돌파구를 찾아야만 했다.
***
같은 시각, 본관 5층 ‘청아관’의 개인 자습실.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정갈한 교복 차림의 한재준이 어둠 속에서 스마트폰 액정 화면을 바라보며 나직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그의 안경 렌즈 너머로 차갑고 비열한 눈빛이 번뜩였다.
재준은 서랍 깊숙한 곳에서 꺼낸 대포폰을 들고 있었다. 그의 손가락이 화면을 미끄러지듯 움직였다. 그는 이미 사전에 현우의 가정사를 철저히 조사해 두었다. 유도 유망주였던 아들이 운동을 그만두고 방황하자 알코올 중독과 폭력성으로 일관하던 현우의 부친, 김도식. 그 괴물 같은 남자의 뇌를 자극하는 것은 너무나도 쉬운 일이었다.
재준은 낮고 가라앉은 목소리로 가식적인 동정심을 가장한 문자 메시지를 김도식에게 전송했다.
[김도식 씨 맞으시죠? 아드님이 유도는 완전히 때려치우고, 가난한 여학생 꽁무니나 쫓아다니며 밤새 쓸데없는 공부를 하고 있더군요. 내일 중요한 시험이 있다는데, 참 안타깝습니다.]
전송 버튼을 누르는 재준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 심리적 이간질 및 가스라이팅. 상대방의 가장 아픈 구석을 찔러 스스로 파멸하게 만드는 것만큼 완벽한 전술은 없었다.
“윤태희, 네가 아무리 발버둥 쳐봐야 꼴찌들은 결국 쓰레기일 뿐이야. 내일 네 잘난 성적표가 어떻게 곤두박질치는지 지켜봐 주지.”
재준은 대포폰의 전원을 끄고 서랍 속으로 밀어 넣었다. 그의 완벽한 계획 하에, F조의 톱니바퀴는 이미 어긋나기 시작하고 있었다.
***
달동네 비탈길 끝자락, 현우의 옥탑방.
술 냄새가 진동하는 좁은 방안으로 붉게 충혈된 눈의 김도식이 들이닥쳤다. 그의 손에는 반쯤 비어 있는 소주병이 들려 있었다.
“야, 김현우!”
도식의 거친 고함 소리가 얇은 벽을 찢어발기듯 울렸다. 현우는 동생 현아를 자신의 등 뒤로 숨기며 아버지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무슨 일이에요, 아버지. 술 드셨으면 그냥 주무세요.”
“주무시라고? 이 새끼가 어디서 눈을 똑바로 떠!”
도식은 손에 들고 있던 술병을 바닥에 내던졌다. 유리 파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사방으로 튀었다. 현아는 겁에 질려 현우의 교복 셔츠 자락을 꼭 쥔 채 흐느꼈다.
“너 유도 관두고 딴짓거리 하고 다닌다며? 어떤 가난뱅이 기집애 뒤나 닦아주면서 책인지 뭔지 들여다본다며!”
도식은 현우의 책상 위로 돌진해 태희가 만들어준 모의고사 예상 문제집과 손때 묻은 오답 노트를 닥치는 대로 움켜쥐었다.
“이딴 쓸데없는 종이쪼가리가 네 인생을 구원해 줄 것 같아? 넌 내 밑바닥 인생을 이어받을 꼴찌 새끼야! 유도 아니면 넌 아무것도 아니라고!”
쫙, 쫙!
가죽 표지가 뜯겨 나가고 하얀 속지들이 도식의 거친 손길에 의해 사정없이 찢겨 나갔다. 밤새 잠을 쫓아가며 수식을 적고 오답을 분석했던 시간들이 순식간에 달동네 바닥의 쓰레기로 변해갔다.
“하지 마세요! 제발 그만하세요!”
현우가 참지 못하고 도식의 팔을 붙잡았다. 유도로 다져진 단단한 악력이 도식의 손목을 조였지만, 도식은 비열하게 웃으며 고개를 돌려 등 뒤의 현아를 바라보았다.
“이 새끼 봐라? 아버지한테 주먹질이라도 하겠다고? 그래, 쳐봐. 네가 날 치는 순간, 저 계집애 면상도 무사하지 못할 줄 알아라.”
도식의 시선이 공포에 질린 현아에게 머물렀다. 현우는 이빨을 악물었다. 온몸의 근육이 분노로 터질 듯 팽팽하게 긴장했지만, 자신이 주먹을 휘두르는 순간 동생에게 가해질 폭력의 무게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의 오른손 붕대 감은 골절 부위가 분노의 압박감으로 인해 다시 쓰라리게 저려왔다.
“...잘못했어요. 그러니까 현아는 건드리지 마세요.”
현우가 힘겹게 손을 풀며 고개를 숙였다. 도식은 쳇 하고 침을 뱉으며 현우의 덜미를 움켜쥐었다.
“따라와, 이 새끼야. 머리에 든 똥 좀 빼야겠어.”
도식은 현우를 다세대 주택 반지하에 위치한 어둡고 습한 보일러실 겸 지하실로 끌고 내려갔. 곰팡이 냄새가 코를 찌르는 어둠 속으로 현우가 내던져졌다.
철컥, 스르릉!
무거운 철문이 닫히고, 낡은 쇠사슬이 문고리를 감싸 안으며 자물쇠가 잠기는 금속음이 어둠 속에서 잔인하게 울려 퍼졌다.
“거기 처박혀서 정신이나 차려! 내일 시험인지 뭔지 가기만 해봐라, 아주 다리를 부러뜨려 놓을 테니까!”
도식의 발걸음 소리가 멀어지고, 현우는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 주저앉았다. 사방은 완벽한 암흑이었다. 손가락 끝에서 흘러내린 피가 바닥을 적셨다. 현우는 어둠 속에서 자신의 무기력함과 꺾여버린 꿈의 잔재를 껴안은 채, 소리 없이 울부짖었다.
***
다음 날 아침 7시 50분, 청아제일고등학교 2학년 3반 교실.
모의고사 당일의 교실은 팽팽한 긴장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아이들은 책상 위에 오답 노트를 펼쳐놓고 마지막 점검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하지만 맨 앞자리에 앉은 태희의 시선은 자꾸만 뒷문 옆, 텅 빈 김현우의 책상으로 향했다. 책상 위에는 주인을 잃은 의자만이 삐딱하게 놓여 있었다.
8시 정각. 예비 종이 울리기까지 남은 시간은 단 30분.
태희는 스마트폰을 켜 민우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강민우, 아직도 신호 안 잡혀?]
[안 잡혀. 옥탑방 근처에서 신호가 완전히 끊겼어. 누군가 인위적으로 기기를 차단한 게 분명해.]
민우의 답장에 태희의 심장이 격렬하게 뛰기 시작했다. 무단 결시. 학칙 제14조에 따르면 결시생이 발생한 조는 즉각 전원 퇴학 처분이다. 남궁진 주임이 설계한 덫이 목전까지 다가와 그녀의 목을 조르는 것 같았다.
태희는 자리에서 일어나 교탁 앞으로 걸어갔다. 담임인 권미숙 교사가 시험 감독 서류를 정리하고 있었다.
“선생님, 김현우 학생이 아직 등교하지 않았습니다. 집에 무슨 사고가 생긴 것 같아요. 전화를 안 받는데, 혹시 가정 방문이나 연락을 취해 주실 수 있으신가요?”
태희의 절박한 요청에 권미숙 교사는 안경을 고쳐 쓰며 신경질적인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윤태희, 지금 네가 남 걱정할 때니? 오늘 모의고사 성적이 네 학생기록부와 장학금 수혜 여부를 결정짓는 거 알고 있잖아. 그 문제아 한 명 때문에 네 인생을 망칠 작정이야? 자리에 앉아서 네 시험이나 신경 써.”
“하지만 선생님, 연대책임제 때문에 현우가 안 오면 저도 퇴학이에요!”
“그건 학교 당국의 방침이고, 교사인 내가 관여할 문제가 아니야. 자리에 앉아.”
차가운 거절이었다. 교사마저도 시스템의 톱니바퀴가 되어 약자의 낙오를 묵인하고 있었다. 태희는 주먹을 쥔 채 입술을 바짝 깨물었다.
8시 15분.
교실 앞문이 열리며, 차갑고 단정한 양복 차림의 학년 주임 남궁진이 감독관 완장을 찬 채 들어섰다. 그의 무테안경 너머로 비치는 눈빛은 얼음처럼 차가웠다. 남궁진은 교실 안을 훑어보더니, 텅 빈 현우의 책상을 바라보고는 입가에 얇은 미소를 띠었다.
그는 태희와 눈이 마주치자, 그녀가 들을 수 있도록 나직하고 잔인하게 속삭였다.
“윤태희, 1등의 자리는 참 외롭고 무거운 법이지. 네가 짊어진 꼴찌들의 무게가 결국 너를 끌어내리는구나. 안타깝지만 이것이 능력주의 사회의 정당한 결과란다.”
남궁진은 단상 위에 시험지 뭉치를 올려놓으며 교실 전체를 향해 엄숙하게 선언했다.
“전원 자리에 앉아라. 지금부터 시험지를 배부하겠다. 1교시 시작 종이 울린 이후에는 그 어떤 이유로도 입실이 불가능하며, 무단 결시는 즉각 학칙에 의거해 엄중 처단한다.”
교실 안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째깍거리는 벽시계의 초침 소리가 태희의 귓가에서 천둥처럼 울려 퍼졌다.
8시 20분.
시험지가 아이들의 책상 위로 한 장씩 배부되기 시작했다. 태희의 책상 위에도 하얗고 빳빳한 국어 영역 시험지가 놓였다. 모의고사 백분위 99.9%를 자랑하는 그녀에게 이 시험지는 원래 자신의 완벽함을 증명할 도구에 불과했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눈에 들어오는 것은 시험지의 글자가 아니었다.
맨 뒷자리, 먼지 쌓인 텅 빈 현우의 책상.
그곳에 감겨 있던 붉은 피가 밴 하얀 붕대의 환영.
“위선 떨지 마, 윤태희!”라며 울부짖던 현우의 상처받은 눈빛.
태희는 자신의 손가락 사이에 끼워진 붉은 펜을 내려다보았다. 이 펜을 잡고 시험을 치른다면 그녀는 전교 1등의 자리를 지킬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현우는 지옥 같은 지하실에서 영원히 낙오자로 낙인찍혀 버려질 것이고, 자신 역시 연대책임이라는 덫에 걸려 파멸할 것이다.
‘숫자의 감옥을 깨뜨려라.’
오윤재 선배가 남긴 문구가 태희의 심장을 강하게 때렸다. 진정한 배움이란, 진정한 연대란 무엇인가. 남을 짓밟고 올라간 1등의 자리가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태희의 눈동자가 단호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그녀는 강박증의 사슬을 스스로 끊어내듯, 손에 쥐고 있던 붉은 펜을 천천히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리링-!!!
1교시 언어 영역의 시작을 알리는 예비종이 청아제일고 교정에 요란하고 날카롭게 울려 퍼졌다.
그 굉음과 동시에, 윤태희는 텅 빈 현우의 책상을 마지막으로 바라본 뒤, 단호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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