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계 톱니바퀴 아래의 아이들
주황색 백열등 불빛이 구관 지하의 눅눅한 공기를 노랗게 물들이고 있었다.
태희는 낡은 교탁 위에 올려놓은 오윤재 선배의 가죽 노트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손때 묻은 표지 중앙에 새겨진 문구, ‘숫자의 감옥을 깨뜨려라’라는 글귀가 주황빛 아래에서 기묘한 입체감을 띠고 있었다. 떨리는 손가락 끝으로 첫 페이지를 넘겼을 때, 태희는 숨을 쉴 수조차 없었다.
그곳에 그려진 것은 단순한 요약 정리나 기출문제의 족보가 아니었다. 국어, 영어, 수학, 그리고 탐구 영역에 이르기까지, 고등학교 교육과정의 모든 개념이 거대한 신경망처럼 서로 유기적으로 얽혀 있는 ‘개념 연결 마인드맵’이었다. 물리학의 벡터 원리가 수학의 기하학으로 흐르고, 인문학의 사상적 대립이 국어 비문학 지문의 논리 구조와 완벽히 맞물려 있었다.
“...말도 안 돼.”
태희는 안경을 치켜올리며 경탄을 금치 못했다. 교과서 수십 권을 통째로 씹어 삼켜 하나의 살아있는 유기체로 만들어놓은 듯한 지식의 지도. 주입식 암기와 기계적인 문제 풀이에 갇혀 있던 태희의 뇌리에 번개가 치는 듯한 충격이 일었다. 이것은 숫자의 감옥을 부수고 나갈 완벽한 설계도였다.
태희는 즉각 행동에 착수했다. 김현우가 교실 바닥에 찢어발겼던 자신의 플래너 파편들을 떠올렸다. 일방적인 강박과 통제는 아이들의 반발만 불러올 뿐이었다. 태희는 오윤재 선배의 바이블을 바탕으로 F조만을 위한 새로운 학습 콘텐츠이자 나침반인 ‘F조 성장 일지’를 집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조원들의 극한의 효율을 쥐어짜기 위해, 그녀가 가진 모든 인지공학적 지식을 총동원한 ‘극한의 시간 분할 플래닝’을 설계했다.
***
째깍, 째깍, 째깍.
구관 지하 비밀 스터디룸의 고요한 공기 속에서 기계적인 초침 소리가 날카롭게 울려 퍼졌다. 교탁 중앙에 놓인 빨간 토마토 모양의 아날로그 타이머가 태엽 감기는 소리를 내며 돌아가고 있었다.
“지금부터 2차 뽀모도로 세션을 시작해. 25분 동안은 절대 잡담 금지, 펜을 멈추는 것도 금지야. 25분이 끝나면 정확히 5분의 휴식을 줄게.”
태희는 타이머의 태엽을 25분 눈금에 맞추며 차갑게 선언했다. 조원들의 책상 위에는 태희가 오윤재 선배의 마인드맵을 분석해 직접 수작업으로 요약한 일일 학습 퀘스트 시트가 놓여 있었다.
“하아... 진짜 숨 막혀서 못 살겠네.”
민우가 헐렁한 후드티 소매를 만지작거리며 책상 위로 엎어지려 했다. 밤새 PC방에서 게임을 하느라 붉게 충혈된 눈이 반쯤 감겨 있었다.
탁.
태희가 샤프 끝으로 민우의 책상 모퉁이를 가볍게 두드렸다. 날카로운 노크 소리가 지하실 벽면에 부딪혔다.
“강민우, 엎드리지 마. 째깍거리는 타이머의 붉은 눈금이 사라지기 전까지는 뇌를 멈추지 마라.”
민우는 쳇, 하고 혀를 차며 마지못해 펜을 다시 쥐었다. 옆자리의 유진은 입술을 바짝 깨문 채 영어 단어장을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었고, 하은은 움츠러든 자세로 귀에 헤드폰을 쓴 채 국어 비문학 지문의 문장들을 조용히 분석하고 있었다. 오직 타이머의 초침 소리와 아이들의 무거운 숨소리만이 주황색 불빛 아래에서 교차했다.
그리고 맨 뒷자리, 김현우가 있었다.
현우는 거구의 몸을 책상에 잔뜩 밀착시킨 채, 수학 기하학 문제집과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그의 거친 손가락에는 하얀색 압박 붕대가 칭칭 감겨 있었다. 유도부 시절, 아버지의 가혹한 감금과 폭력 속에서 옥탑방 지하실 철문을 부수고 탈출하다가 입은 손가락 미세 골절상. 겉으로는 운동하다 다친 상처라 둘러댔지만, 그것은 현우의 영혼에 새겨진 가장 깊고 붉은 흉터였다.
스르릉.
현우가 샤프를 쥐고 좌표평면 위에 보조선을 그리려 시도했다. 하지만 손가락 뼈마디가 미세하게 뒤틀릴 때마다 찌릿한 통증이 신경을 타고 뇌 하부까지 직격했다. 그의 이마에 굵은 땀방울이 맺혔다.
‘젠장... 왜 수식이 안 풀리는 거야.’
현우의 눈가에 핏발이 섰다. 펜을 쥔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떨리더니, 이내 하얀 붕대 틈새로 붉은 핏방울이 아주 천천히, 그리고 선명하게 배어 나오기 시작했다. 골절 부위가 다시 벌어지며 가해지는 극심한 통증에 현우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툭.
결국 현우의 손에서 볼펜이 미끄러져 바닥으로 굴러갔다. 정적을 깨뜨리는 날카로운 마찰음이 스터디룸 바닥을 때렸다.
태희는 하던 공부를 멈추고 고개를 들어 현우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차가운 눈빛이 현우의 떨리는 손에 멈췄다.
“김현우, 펜 떨어뜨리지 마. 25분 세션이 끝나려면 아직 7분 남았어.”
“...시끄러워.”
현우가 다친 손을 책상 밑으로 숨기며 거친 목소리로 내뱉었다.
“이따위 수식 몇 개 푸는 게 무슨 의미가 있다고 난리야? 난 애초에 운동하던 몸이야. 머리 쓰는 건 너희 같은 모범생들이나 하는 짓이라고.”
태희는 자리에서 일어나 현우의 책상 앞으로 다가갔다. 그녀는 바닥에 떨어진 펜을 주워 현우의 책상 위에 올려놓으며 단호하게 다그쳤.
“이 정도 통증도 못 버티면 퇴학당하는 수밖에 없어. 남궁진 주임이 우리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 잊었어? 한 명이라도 과락을 맞으면 우리 전원 퇴학이야. 내 장학금도, 네 미래도 전부 날아간다고. 아프다고 징징거릴 시간 있으면 공식 하나라도 더 외워.”
“징징거린다고?”
현우가 의자를 거칠게 밀치며 일어섰다. 유도로 다져진 거구의 그림자가 태희의 작은 체구를 완전히 압도했다. 그의 눈빛에는 억눌린 짐승 같은 분노와 상처가 가득 차 있었다.
“네가 내 고통에 대해 뭘 알아? 전교 1등 타이틀 지키려고 우리를 기계처럼 굴리는 주제에, 위선 떨지 마, 윤태희!”
스터디룸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째깍거리는 뽀모도로 타이머 소리만이 두 사람의 팽팽한 대치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 민우와 유진은 숨을 죽인 채 눈치를 보았고, 태희 역시 입술을 굳게 다문 채 현우의 분노를 정면으로 받아내고 있었다. 태희의 강박적인 시간 제어가 아이들의 육체적, 정서적 임계점에 부딪혀 폭발하기 직전이었다.
그때, 옆자리에서 사락거리는 종이 소리가 들렸다.
선택적 함구증을 앓는 하은이 움츠러든 어깨를 조심스럽게 펴며, 자신의 스프링 노트를 태희 쪽으로 밀어내고 있었다. 노트의 하얀 지면 위에는 하은이 붉은색 볼펜으로 정갈하고 단호하게 적어 내린 글씨가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현우 오빠 붕대에 피가 배어 나오고 있어요. 공부보다 손이 먼저 망가질 것 같아요.]
태희의 시선이 하은의 필담 노트를 거쳐 현우의 오른손으로 향했다. 책상 모퉁이를 꽉 쥐고 있는 현우의 하얀 압박 붕대 위로, 붉은 피가 손가락 마디를 따라 번져나가고 있는 것이 그제야 태희의 눈에 들어왔.
태희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자신의 완벽주의적 조급함이, 기말고사까지 시간이 없다는 강박증이 동료의 진짜 아픈 상처와 신체적 비명을 외면하게 만들고 있었다. 지독한 자괴감이 태희의 가슴을 찔렀다. 그녀는 들고 있던 플래너를 꽉 쥐었다.
“...미안해.”
태희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나직하게 가라앉았다.
“내가... 미처 보지 못했어.”
현우는 태희의 흔들리는 눈빛과 사과를 바라보며 멱살을 잡으려던 손의 힘을 천천히 풀었다. 스터디룸 내부에 무거운 침묵이 흐르고, 오직 뽀모도로 타이머의 초침 소리만이 째깍거리며 아이들의 상처받은 영혼을 위로하듯 울렸다.
바로 그 순간.
현우의 바지 주머니 속에서 요란하고 날카로운 스마트폰 진동음이 스터디룸의 침묵을 사정없이 찢어발겼다.
징잉, 징잉, 징잉.
현우는 흠칫 놀라며 주머니에서 전화를 꺼냈다. 액정 화면에 뜬 발신자의 이름을 확인한 순간, 현우의 안색이 순식간에 피가 전부 빠져나간 것처럼 시체처럼 하얗게 질려버렸다.
[아버지]
화면에 뜬 세 글자가 주황색 백열등 불빛 아래에서 뱀의 혀처럼 번뜩였다. 유도 선수 출신의 거구인 현우의 어깨가 사시나무 떨듯 격렬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그의 눈동자에 형용할 수 없는 공포와 트라우마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웠다.
“...안 돼.”
현우는 떨리는 손가락으로 전화를 움켜쥔 채, 공부하던 문제집을 거칠게 밀쳐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의 호흡이 비정상적으로 가빠졌다.
“김현우? 무슨 일이야?”
태희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그를 부르며 다가서려 했지만, 현우는 들리지 않는 듯했다. 그는 붕대 감은 오른손으로 머리를 감싸 쥔 채, 쇠사슬을 끊고 도망치는 들개처럼 구관 지하 스터디룸의 무거운 철문을 향해 돌진했다.
쾅!
철문이 부서질 듯 열리고, 현우의 거구는 어둠이 짙게 깔린 지하 복도 너머로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닫힌 문틈 사이로 차가운 밤바람이 새어 들어오고, 교탁 위에서는 여전히 빨간 토마토 타이머가 째깍거리며 마지막 1분을 향해 무심히 달려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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