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지 쌓인 지하의 비밀 영토
차가운 철문에 얹은 손끝에서 지독한 한기가 배어 나왔다. 구관 도서관 뒤편, 밤안개와 잡초 넝쿨 속에 파묻혀 있던 철문은 마치 청아제일고등학교라는 거대한 성채가 감추고 있는 추악한 비밀 같았다.
태희는 안경을 치켜올리며 까진 무릎의 통증을 곱씹었다. 본관 4층 자습실에서 쫓겨나 차가운 대리석 복도 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아이들의 얼굴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전교 1등이라는 타이틀도, 남궁진 학년 주임이 설계한 잔인한 연대책임제 앞에서는 아무런 방패막이가 되지 못했다. 이대로 차가운 복도에서 밤을 지새우며 선도부장 김태호의 벌점 딱지를 기다릴 수는 없었다. 공부할 공간, 어른들의 눈과 CCTV 감시망이 미치지 않는 우리만의 사각지대를 찾아야만 했다.
태희는 심호흡을 한 뒤, 구관 서쪽 모퉁이에 불이 희미하게 켜진 작은 경비실로 발걸음을 옮겼. 유리창 너머로 매캐한 담배 연기와 함께 콜록거리는 기침 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똑똑.
노크 소리에 문이 거칠게 열리며 낡은 남색 경비원 제복을 입은 노인이 얼굴을 내밀었다. 주름진 얼굴에 삐딱하게 물린 담배, 그리고 낡은 열쇠 꾸러미를 쥔 손. 구관 야간 경비원 박종두 옹이었다.
“이 밤중에 학생이 여긴 왜 기웃거려? 본관 자습실로 돌아가 임마.”
박종두의 목소리는 쇳소리가 섞여 거칠었다. 태희는 허리를 단정하게 굽히며 예의를 갖췄다.
“안녕하십니까, 경비 아저씨. 2학년 윤태희라고 합니다. 잠시 드릴 말씀이 있어서 찾아뵈었습니다.”
“할 말은 무슨. 순찰 돌 시간이니까 얼른 본관으로 넘어가. 요즘 본관 녀석들이 구관 근처 얼씬거리는 거 남궁 주임이 극도로 싫어하는 거 몰라?”
박종두는 귀찮다는 듯 손사래를 치며 문을 닫으려 했다. 태희는 재빨리 문틈 사이에 제 낡은 학습 플래너를 끼워 넣었다. 문이 덜컥 걸리며 박종두의 눈썹이 찌푸려졌다.
“이게 무슨 짓이야?”
“아저씨, 제발 3분만 제 이야기를 들어주세요.”
태희의 눈빛은 흔들림 없이 올곧았다. 그녀는 안경 너머로 노인의 피로한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저희 F조 다섯 명은 지금 본관 자습실에서 쫓겨났습니다. 남궁 주임님이 만든 ‘면학 분위기 저해자 격리 규정’ 때문입니다. 갈 곳이 없어서 차가운 복도 바닥에 앉아 책을 펴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곳마저도 선도부가 벌점을 주겠다며 쫓아내려 합니다.”
“그건 너희 사정이지, 나보고 어쩌라고? 난 규정대로 문 잠그고 순찰 도는 사람이야. 사고 치면 나 같은 비정규직은 당장 잘려.”
원칙적인 거절이었다. 박종두의 목소리에는 차가운 현실의 방어기제가 단단히 쳐져 있었다. 하지만 태희는 여기서 물러설 수 없었다. 그녀는 가방끈을 꽉 움켜쥐며 자신의 가장 아픈 고리를 꺼내 들었다.
“저한테는 만성 천식을 앓는 남동생이 있습니다. 아버지는 계시지 않고, 어머니는 요양병원에서 밤샘 교대 근무를 하며 하루 벌어 하루를 사십니다. 제가 이번 기말고사에서 전교 1등을 놓쳐 특별 장학금을 받지 못하면, 동생의 파란색 흡입기 약값조차 대지 못합니다. 그런데 저 아이들과 성적이 연동되어 한 명이라도 과락을 맞으면 전원 퇴학이라고 합니다. 공부를 해야 합니다. 밤을 새워서라도 저 아이들을 가르쳐야 동생을 살릴 수 있습니다.”
태희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거짓 없는 날것의 절박함이었다. 박종두는 담배를 한 모금 깊게 빨아들였다가 길게 내뿜었다. 연기 사이로 노인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청아제일고의 기괴한 등급제와 능력주의 속에서 신음하는 아이들을 가장 밑바닥에서 지켜봐 온 노인이었다.
“쳇, 학교가 아주 미쳐 돌아가는군. 애새끼들을 점수판때기로 만들어놓고 연대책임이라니...”
박종두는 투덜거리며 허리춤에서 크고 낡은 열쇠 꾸러미를 꺼냈다. 그리고는 거칠게 손을 흔들며 열쇠 꾸러미를 책상 위에 탁 내려놓았다. 놋쇠 종소리 같은 맑은 청동 방울 소리가 경비실 내부에 울렸다.
“나이 먹으니까 손아귀 힘이 빠져서 큰일이야. 야, 학생. 내가 지금 본관 외곽 순찰 도는 데 30분 걸리거든? 그동안 경비실 바닥에 떨어진 저 낡은 황동 열쇠 꾸러미 치우지 마라. 내 눈에 띄면 절도죄로 신고할 테니까, 절대 만지지 마.”
박종두는 퉁명스럽게 내뱉고는 손전등을 든 채 경비실 문을 열고 어둠 속으로 걸어가 버렸다.
책상 모퉁이, 노인이 슬쩍 흘려두고 간 낡은 황동 마스터 키가 밤하늘의 희미한 달빛을 받아 노랗게 빛나고 있었다. 태희는 마른침을 삼키며 그 열쇠를 쥐었다. 묵직하고 차가운 놋쇠의 무게감이 손바닥을 타고 전해졌다. 어른의 양심이 건네준, 통제를 해제할 최초의 열쇠였다.
***
태희는 복도에서 기다리던 F조 조원들에게 달려갔다. 그녀의 손에 쥐어진 황동 열쇠를 본 아이들의 눈이 동그래졌다.
“야, 전교 1등. 그거 경비실 열쇠 아냐? 너 미쳤어? 도둑질까지 한 거야?”
현우가 삐딱하게 서서 미간을 찌푸렸다.
“도둑질이 아니라 정당하게 빌린 거야. 본관에서 쫓겨났으니, 이제 우리만의 영토로 간다. 따라와.”
태희는 망설임 없이 앞장섰다. F조 아이들은 서로 눈치만 보다가, 이내 가방을 메고 그녀의 뒤를 따랐다.
구관 도서관 지하 창고의 붉게 녹슨 철문 앞. 태희는 황동 열쇠를 자물쇠 구멍에 밀어 넣었다. 덜컥, 서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수년 동안 굳게 닫혀 있던 자물쇠가 열렸다. 현우가 힘을 보태어 철문을 옆으로 밀어내자, 끼이익 하는 소름 끼치는 마찰음과 함께 어두운 지하의 아가리가 열렸다.
“우왁, 먼지 장난 아니다!”
유진이 손으로 코를 막으며 뒤로 물러섰다. 문틈 사이로 뿜어져 나온 것은 지독하게 눅눅하고 썩은 곰팡이 냄새, 그리고 수십 년 묵은 잿빛 먼지 구름이었다.
손전등 빛이 어둠을 가르고 지하실 내부를 비추었다. 사방에 거미줄이 가득했고, 다리가 부러진 의자와 먼지 쌓인 책장들이 쓰레기 더미처럼 뒹굴고 있었다. 버려진 지하 보일러실 배후의 음침한 밀실. 자습실은커녕 당장 쥐가 튀어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폐허였다.
“야, 윤태희. 여기서 공부를 하겠다고? 미쳤냐? 난 이런 쓰레기장에서는 단 1초도 못 있어.”
민우가 닌텐도를 주머니에 넣으며 짜증 섞인 목소리로 외쳤다. 유진 역시 울상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현우는 팔짱을 낀 채 차가운 눈으로 지하실을 훑어보더니 비웃었다.
“전교 1등 수준 참 눈물겹네. 본관에서 쫓겨나더니 뇌까지 얼어붙었냐? 여기서 공부하다간 폐병 걸려 죽겠다.”
하은은 말없이 헤드폰을 더 세게 누르며 움츠러들었다. 모두가 거부감을 드러내며 돌아설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대로 흩어지면 내일부터 시작될 스터디 계획은 영원히 물거품이 될 터였다.
태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단정하게 목 끝까지 채워져 있던 교복 셔츠의 단추를 두 개 풀고, 가방에서 미리 챙겨온 걸레와 물티슈를 꺼냈다. 그리고는 거침없이 무릎을 꿇고 지하실 바닥의 시커먼 먼지 구덩이 위로 엎드렸다.
“...뭐 하는 거야, 너?”
현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태희는 대답 대신 굳은살 박힌 손가락으로 걸레를 꽉 쥐고 바닥을 쓸어내기 시작했다. 슥, 슥. 걸레가 지나간 자리에 시커먼 먼지가 밀려나며 낡은 콘크리트 바닥의 원래 살결이 드러났다. 까진 무릎의 상처가 바닥에 쓸려 찌릿한 통증을 유발했지만, 태희는 입술을 깨물며 손을 멈추지 않았다. 단정한 청아제일고 교복 치맛자락과 흰 칼라에 금세 검은 soot가 묻어 엉망이 되었다.
“너희가 공부하기 싫다면 억지로 시키지 않아. 하지만 난 오늘 여기서 시작할 거야. 갈 곳이 없다고 징징거리며 남궁진이 파놓은 덫에 걸려 퇴학당하는 것보단, 내 손으로 직접 쓸고 닦은 쓰레기장에서 살아남는 쪽을 선택하겠어.”
태희의 차분하고 단호한 목소리가 지하실의 콘크리트 벽면에 부딪혀 울렸다.
현우는 칠판에 밀어붙여 멱살을 잡았을 때도 결코 꺾이지 않던 태희의 눈빛을 떠올렸다. 전교 1등이라는 완벽한 가면 뒤에 숨겨진, 동생을 살리기 위해 밑바닥까지 기어 다니며 무릎을 꿇는 처절한 독기. 그의 가슴속 깊은 곳에 자리 잡은 꺾인 유도 선수의 자존심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비켜 봐, 비켜 보라고.”
현우가 거친 한숨을 내쉬며 태희의 손에서 걸레를 뺏어 들었다.
“유도관 매트 청소만 5년을 한 몸이야. 공부는 몰라도 쓸고 닦는 건 네까짓 모범생보다 내가 백배는 잘해.”
현우는 넓은 어깨를 움직이며 무거운 부러진 책상과 부서진 가구들을 한구석으로 번쩍 들어 옮기기 시작했다. 그의 붕대 감은 손가락이 팽팽하게 당겨졌지만 거침이 없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유진의 눈에 눈물이 조금 고였다.
“아, 진짜... 내 명품 운동화 다 망가지겠네.”
유진이 투덜거리면서도 가방에서 빗자루를 꺼내 거미줄을 걷어내기 시작했다. 민우는 한숨을 쉬더니, 구석에 버려진 낡은 멀티탭과 전선 더미를 뒤적거리며 쓸만한 전원을 연결할 콘센트를 찾기 시작했다. 하은 역시 조심스럽게 다가와 깨진 유리 조각들을 종이 상자에 쓸어 담았다.
스슥, 슥, 슥.
어둡고 차가운 지하실 안에서 다섯 아이들의 거친 숨소리와 먼지 쓰는 소리가 기분 좋은 박자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본관의 차갑고 인공적인 대리석 복도와는 대조적으로, 낡고 먼지 가득한 이 지하 공간은 아이들의 땀방울과 온기로 서서히 채워지고 있었다. 처음으로 강제로 묶인 오합지졸들이 서로를 원망하는 대신, 공동의 생존을 위해 함께 몸을 움직이는 최초의 연대감이 싹트는 순간이었다.
민우가 구석의 두꺼비집을 만지자, 틱 하는 소리와 함께 천장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던 오래된 아날로그 백열전등에 주황색 불빛이 깜빡이며 들어왔. 따뜻하고 아늑한 노란 불빛이 지하실 구석구석을 비추었다. 먼지는 말끔히 쓸려 나갔고, 부러진 책상들을 모아 만든 간이 공부 책상과 의자들이 제법 그럴싸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우리만의 비밀 기지, 구관 지하 비밀 스터디룸이 마침내 그 모습을 드러냈다.
“하아... 죽겠다, 진짜.”
현우가 땀에 젖은 반삭 머리를 쓸어올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아이들의 얼굴과 옷은 온통 검은 먼지로 뒤덮여 엉망진창이었지만, 누구도 불만을 터뜨리지 않았다. 오히려 서로의 우스꽝스러운 몰골을 보며 풋 하는 작은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태희는 숨을 몰아쉬며 스터디룸 중앙에 놓인 낡은 교탁(교사의 단상)을 닦기 위해 다가갔다. 마지막 남은 찌든 때를 닦아내기 위해 교탁 밑바닥 안쪽 깊숙한 곳으로 걸레를 밀어 넣었을 때였다.
깡.
손가락 끝에 단단하고 이질적인 금속의 감각이 걸렸다. 태희는 안경을 고쳐 쓰며 교탁 밑으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교탁 밑바닥 안쪽, 나무 틈새에 검은색 절연테이프로 단단히 고정되어 있는 낡은 철제 상자가 보였다.
“이게 뭐지...?”
태희의 나직한 중얼거림에 조원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녀에게 쏠렸다. 태희는 손가락 끝에 힘을 주어 테이프를 뜯어냈다. 툭, 하는 소리와 함께 묵직한 철제 상자가 그녀의 손으로 떨어졌다.
상자 표면에는 두꺼운 먼지가 쌓여 있었지만, 30년 전 청아제일고등학교의 초대 설립 마크가 선명하게 음각되어 있었다. 태희는 조심스럽게 상자의 걸쇠를 열었다. 끼이익 하는 낡은 소리와 함께 뚜껑이 열리며, 상자 내부의 내용물이 드러났다.
그 안에는 손때가 타서 모서리가 까맣게 닳아 빠진, 낡은 가죽 표지의 바이블 같은 노트 한 권이 들어있었다.
태희가 떨리는 손으로 노트를 꺼내 먼지를 훅 불어냈다. 희뿌연 먼지 구름 너머로, 가죽 표지 중앙에 날카롭고 유려한 필체로 새겨진 글귀가 빛을 받아 선명하게 떠올랐다.
[숫자의 감옥을 깨뜨려라. - 오윤재]
전설의 선배이자 이 학교의 역사상 가장 완벽한 천재로 불렸던 오윤재의 이름이었다. 태희가 조심스럽게 첫 페이지를 넘기자, 단순 암기가 아닌 전 과목의 개념들이 거대한 신경망처럼 유기적으로 얽혀 있는 기묘하고 아름다운 마인드맵의 궤적이 주황색 백열등 불빛 아래에서 찬란하게 그 모습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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