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선자들의 비밀 금고와 영석 장부
어스름한 새벽빛이 청풍현 낙신애 절벽 옆에 자리 잡은 신성보험 본사 창문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전날 흑응방의 자해 공갈단 고독구를 완벽하게 참교육하고 블랙리스트에 올린 여파로 본사 1층 대기실은 여전히 묘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집무실 책상 뒤에 앉아 주판을 튕기던 서생 서지호는 가늘게 눈을 뜨며 생각에 잠겼다.
‘고독구 그 찌질한 사기꾼 놈이 우리 낙하 상해 보험 약관의 맹점을 정확히 꿰뚫고 있었어. 게다가 제자들이 낙신애에서 뛰어내리는 시간대와 순찰 동선까지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이건 단순한 사파의 정보력이 아니다. 문파 내부에 우리 준비금 금고를 통째로 털어먹으려는 거대한 빨대가 꽂혀 있는 게 분명해.’
지호가 차갑게 식은 눈으로 찻잔을 만지작거릴 때였다.
스스스슥.
소리도 없이 창문 틈새로 쥐색 옷을 입은 왜소한 사내가 미끄러지듯 들어왔다. 평범하고 특징 없는 얼굴에 바람처럼 가벼운 신법을 지닌 도둑 출신의 비밀 조사관, 정을용이었다.
“사장님, 다녀왔습니다.”
정을용은 품속에서 흙먼지가 묻은 가죽 주머니를 꺼내며 가쁘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의 쥐색 옷 여기저기에는 가시덤불에 긁힌 자국과 함께 기분 나쁜 보라색 독침 자국이 서너 개 박혀 있었다.
“을용 씨, 고생 많았어요. 그래, 청풍문 외문 장로 마귀안의 비밀 금고는 잘 털어왔습니까?”
정을용은 진저리를 치며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아이고, 말도 마십시오. 그 마귀안이라는 늙은 쥐새끼가 어찌나 의심이 많은지, 침실 지하 비밀 창고에 고대의 경보 진법을 삼중으로 깔아두었더군요. 제가 마지막 금고 자물쇠를 따는 순간, 천장에서 손가락만 한 독침이 사방으로 비처럼 쏟아졌습니다. 무영보법을 극한으로 끌어올리지 않았다면 고향에 계신 어머니 얼굴도 못 보고 그대로 해독제 보험 청구서가 될 뻔했습니다!”
“하지만 살아 돌아왔고, 물건은 챙겼으니 성공이군요.”
지호는 태연하게 책상 서랍을 열어 푸른빛이 감도는 하품 영석 3개를 꺼내 정을용의 앞에 놓았다.
“약속한 잠입 특별 성과급입니다. 목숨을 건 보람이 있죠?”
영석을 본 정을용의 눈이 순식간에 황금빛으로 번뜩였다. 그는 독침의 통증도 잊은 채 영석을 품에 소중히 쑤셔 넣으며, 가죽 주머니에서 낡고 두꺼운 가죽 장부 한 권과 붉은 직인이 찍힌 비밀 계약서 원본을 꺼내 지호에게 건넸다.
“그 위험한 진법 속에서 건져 올린 마귀안의 이중 유착 계약서입니다. 사장님이 말씀하신 대로 흑응방주 염도현의 친필 서명과 피 지장이 선명하게 찍혀 있더군요.”
지호는 안경을 치켜올리며 붉은 계약서를 펼쳤다. 깨알 같은 선협풍 서체로 적힌 계약 조항들을 읽어 내려가는 지호의 눈매가 점점 가늘어졌다. 이내 그의 입에서 어이없다는 듯한 한숨과 함께 혀를 차는 소리가 흘러나왔.
“쯧쯧쯧…… 이따위로 계약서를 발로 쓰다니. 사기꾼들이 금융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가 없군요.”
지호는 깃펜 끝으로 계약서의 한 조항을 콕 짚었다.
“보십시오. ‘청풍문 제자가 야외 임무 중 사고로 사망할 시, 발생하는 유품 및 문파 위로금 중 5할을 흑응방에 양도하며, 흑응방은 그 대가로 마귀안에게 매달 고정 영석 20개를 상납한다’라…… 이 무슨 조잡하고 비효율적인 수수료 배분 방식입니까? 사망 확률에 대한 통계적 요율 산정도 없고, 면책 조항이나 사전 고지 의무도 전혀 기재되어 있지 않아요. 그냥 제자들의 목숨값을 깡패들과 반씩 나눠 먹겠다는 단순 무식한 횡령 모의서에 불과합니다. 금융인으로서 참을 수 없는 모독이군요.”
정을용은 지호의 엉뚱한 분노 포인트에 마른침을 삼키며 슬쩍 물었다.
“그, 그렇다면 이 계약서로 마귀안을 당장 관청에 고발할 것입니까? 이수현 현령님께 보여드리면 당장 구속할 수 있을 텐데요.”
“아니요, 을용 씨. 관청의 힘을 빌려 장로 한 명을 치워버리는 것은 하책입니다. 그러면 청풍문 장로회와 백무현 문주가 가문의 명예를 핑계 대며 꼬리 자르기를 시도하고, 우리 신성보험을 사교로 몰아세워 더 큰 행정적 압박을 가해올 겁니다. 우리는 이 카드를 가장 자본주의적이고 영악한 방식으로 활용할 겁니다.”
지호의 입꼬리가 비열하고 유쾌하게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반격의 완벽한 카드를 쥔 설계사의 미소였다.
* * *
다음 날 아침.
쾅—!
신성보험 청풍현 본점의 1층 대기실 문이 거칠게 열렸다. 아니, 정확히는 전날 맹필두 장인이 두꺼운 흑철 프레임으로 보강해 둔 덕에 완전히 부서지지는 않고, 쩌억 하는 굉음과 함께 삐걱거리며 열렸다.
“무도한 사교의 괴수 서지호는 당장 기어나와라!”
우렁찬 호통 소리와 함께 대기실로 난입한 인물은 청풍문의 외문 장로, 마귀안이었다. 그의 뒤에는 칼을 차고 험악한 표정을 지은 청풍문 외문 제자 이십여 명이 대기실의 가구들을 발로 차며 위협적인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었다.
대기실에서 순서를 기다리던 평범한 주민들과 하급 수선자들이 비명을 지르며 구석으로 옹기종기 피신했다.
마귀안은 쥐새끼 같은 눈동자를 희번덕거리며, 가슴에 손을 얹은 채 근엄한 표정을 지었다.
“본 장로는 오늘 청풍문의 규율을 수호하고, 사파와 결탁하여 제자들을 가스라이팅하는 신성보험의 불법 영업 실태를 조사하기 위해 나왔다! 당장 이 사교 집단의 금고와 장부를 압수수색하겠다!”
문파의 권세를 등에 업고 지호의 준비금 금고를 합법적으로 털어버리겠다는 노골적인 선언이었다. 제자들이 겁에 질려 웅성거리는 가운데, 2층 계단 위에서 회색 도포를 단정하게 차려입은 지호가 천천히 걸어 내려왔.
지호의 얼굴에는 그 어떤 두려움이나 당황함도 없었다. 그는 허리를 꼿꼿이 펴고, 한국의 대기업 고객센터에서 단련된 가장 온화하고 기품 있는 ‘솔’ 톤의 목소리를 가동했다.
“안녕하십니까, 고객님. 신성보험 청풍현 본점 대표 서지호입니다. 이른 아침부터 저희 지사를 방문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정중하지만 묘하게 상대를 압도하는 기선제압 고객센터 보이스(기선제압 고객센터 보이스)가 대기실 전체에 맑게 울려 퍼졌다. 마귀안의 수하 제자들이 지호의 차분한 기세에 주춤하며 칼자루를 쥔 손에 힘을 풀었다.
마귀안은 미간을 찌푸리며 지호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 얄팍한 말장난으로 본 장로를 현혹하려 들지 마라! 당장 네놈의 추잡한 사기 계약서 장부들을 내놓아라!”
지호는 온화한 미소를 유지하며 마귀안에게 정중히 손짓했다.
“고객님, 화를 내셔도 규정상 대기실에서의 무단 압수수색은 불가능합니다. 다만, 문파의 원로이신 장로님의 고견을 경청하기 위해 2층 대표 집무실에 최고급 우롱차를 준비해 두었습니다. 장로님 정도의 귀하신 분이라면, 시끄러운 대기실보다는 조용한 밀실에서 1대 1로 상담을 나누시는 것이 품격에 맞지 않겠습니까?”
마귀안은 지호의 전투력이 제로인 평범한 범인임을 알고 있었다. 비록 뒤에 거구의 곽두팔과 백서연이 도끼와 몽둥이를 들고 서 있었지만, 1대 1로 방에 들어간다면 자신이 언제든 손가락 하나로 서생의 목을 부러뜨릴 수 있다는 오만한 자신감이 있었다.
“흥, 잔머리를 굴리는구나. 좋다! 네놈이 무슨 변명을 늘어놓는지 내 친히 들어주마. 제자들은 입구를 지키고 서 있거라!”
마귀안은 도포 자락을 휘날리며 지호의 뒤를 따라 2층 집무실로 걸어 올라갔다.
* * *
2층 대표 집무실.
정갈한 대나무 책상 위에는 따뜻한 김이 피어오르는 찻잔 두 개가 놓여 있었다. 문이 닫히자마자 마귀안은 태도를 돌변하여 연기기 중기의 강력한 내공 압력을 뿜어내며 지호를 압박했다.
“서생 놈아, 내 침실의 비밀 창고가 털렸다는 소식을 들었다. 네놈이 보낸 쥐새끼가 내 금고를 뒤졌더군. 하지만 어쩌겠느냐? 물증이 없으면 네놈은 그저 문파의 자산을 훔치려 한 도둑놈의 수괴일 뿐이다. 당장 내 금고에서 가져간 영석을 돌려놓고 청풍현을 떠나지 않으면, 오늘 밤 네놈의 목이 낙신애 아래로 떨어질 것이다!”
마귀안의 살기 어린 협박에도 지호는 찻잔을 들어 가볍게 한 모금 들이켰다. 그의 겉옷 내부에는 수만 장의 계약서 폐지를 압착해 만든 ‘계약서 방탄 도포’가 버티고 있었기에, 연기기 중기 수준의 영압 따위는 미세한 바람결처럼 느껴질 뿐이었다.
지호는 조용히 찻잔을 내려놓고, 책상 서랍에서 붉은 직인이 찍힌 종이 한 장을 꺼내 마귀안의 코앞에 툭 던졌다.
탁.
“장로님, 귀신을 부르는 음풍공(음풍공) 수련법의 부작용으로 최근 왼쪽 어깨에 극심한 음기 통증을 느끼고 계시죠? 데스 카운트 스캔 결과, 장로님의 남은 수명은 대략 D-3년이더군요. 흑응방에서 받는 푼돈 영석으로 연명하기에는 장로님의 목숨값이 너무 아깝지 않습니까?”
마귀안은 지호가 자신의 극비 수련 부작용과 수명을 정확히 언급하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하지만 그의 시선이 책상 위에 떨어진 종이 조각에 닿는 순간, 그의 안색은 종이처럼 하얗게 질려버렸다.
그것은 어젯밤 정을용이 목숨을 걸고 훔쳐낸 마귀안과 흑응방주 염도현의 이중 유착 계약서 사본이었다.
“이, 이것이 왜 네놈의 손에……!”
마귀안의 목소리가 사시나무 떨듯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이마에는 비 오듯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이 서류가 대중 광장에 공개되는 순간, 자신은 장로직 박탈은 물론 정파의 이름으로 낙신애에서 강제로 다이빙을 당할 처지였다.
지호는 가장 정중하고 단호한 목소리로 쐐기를 박았다.
“장로님, 선택지를 드리겠습니다. 이 이중 계약서 원본을 이수현 현령님과 문파 광장의 제자들 눈앞에 홀로그램으로 대대적으로 상영할까요? 아니면, 청풍문 외문 제자 전원을 저희 신성보험의 ‘단체 재해 안심 패키지’에 공식 가입시키고 매달 문파 예산으로 보험료를 납부하시겠습니까?”
마귀안은 지호의 비열하고도 완벽한 금융적 굴복 요구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지호는 펜을 마귀안의 손에 쥐여주며 속삭였다.
“단체 가입 시 장로님께는 특별 ‘실버 등급’ 혜택과 함께, 음기 통증을 완치해 줄 김철수 의원의 무료 진료권을 사은품으로 제공해 드리겠습니다. 자, 서명하시죠. 고객님.”
마귀안은 결국 절망적인 표정으로 펜을 쥐고 단체 가입 계약서 위에 자신의 지장을 쾅 찍을 수밖에 없었다. 지호의 입꼬리가 승리의 미소로 가득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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