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목 위의 가시밭길
수요일 아침, 은성예술고등학교 미술동 로비는 웅성거리는 학생들의 목소리로 가득 차 있었다. 평소라면 고요해야 할 아침 자습 시간이었지만, 벽면에 붙은 커다란 대자보가 전교생의 심장을 사정없이 흔들어 놓고 있었다.
[미술과 3학년 특별 실기 평가 공고: 기습 라이브 크로키]
- 일시: 금일 오전 10시
- 장소: 본관 대강당
- 방식: 무작위 선발된 무용수 모델의 역동적 포즈 시연 (포즈당 제한 시간 30초)
- 평가 기준: 형태의 정확성, 선의 속도감, 해부학적 골격 이해도
“미친 거 아냐? 준비 시간도 없이 30초짜리 크로키를 전교생 앞에서 하라고?”
“이거 완전 준서랑 아르케 애들 밀어주려고 갑자기 만든 시험이잖아!”
학생들은 패닉에 빠져 비명을 질렀지만, 소윤은 대자보 앞을 무표정하게 지나쳤다. 이미 화요일 밤, 유리 온실의 어둠 속에서 서지민과 송태문 과장이 나누던 대화를 도청했기에 충격은 없었다. 하지만 주머니 속에서 움켜쥔 오른손목 아대 안쪽이, 마치 그 음모에 반응하듯 지독한 통증으로 요동치기 시작했다.
‘내 손목이 망가진 걸 알고, 전교생 앞에서 낙제점을 주어 합법적으로 매장하겠다는 뜻이겠지.’
소윤은 실기실 제4실의 문을 열고 들어섰다. 교실 안의 공기는 평소보다 몇 배는 더 무겁고 차가웠다. 이젤 앞에 선 학생들은 소윤이 들어서자 일제히 시선을 던졌다. 그 시선들 속에는 가짜 표절 소문으로 인한 멸시와, 기습 시험에 대한 동정심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창가 최고의 명당자리, S등급 이젤 앞에 앉은 이준서가 비웃음을 흘렸고, 그 옆에 선 서지민은 팔짱을 낀 채 소윤을 향해 오만한 눈빛을 보냈다.
“어머, 표절 작가님 오셨네? 오늘 시험에서 손목이 부러져서 기권하는 일은 없길 바랄게.”
지민의 도발에도 소윤은 대꾸하지 않았다. 자신의 임시 자리인 구석진 F등급 이젤로 묵묵히 걸어갔다. 그런데 이젤 앞에 서는 순간, 절대적 형태 인지안이 바닥의 미세한 이질감을 포착했다.
이젤 다리 뒤편, 어두운 나무 바닥 틈새에 은밀하게 뿌려진 것들이 있었다. 은색으로 번뜩이는 날카로운 공업용 압정 더미였다. 지민의 지시를 받은 아르케의 하수인 박진우가 소윤이 시험 직전 이젤을 조절하려 뒤로 물러설 때 밟거나 넘어지도록 정교하게 깔아둔 덫이었다.
‘조잡한 짓을.’
소윤은 압정의 위치를 피해 이젤을 고정하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옆 자리에서 오민혁이 고의로 자신의 대형 캔버스를 도미노처럼 밀어 넘어뜨렸다. 육중한 나무 프레임이 소윤의 어깨를 강타했고, 중심을 잃은 소윤의 몸이 이젤 뒤편으로 사정없이 쏠렸다.
“앗!”
피해야 한다는 이성의 명령보다, 몸의 추락이 더 빨랐다. 압정 더미가 깔린 바닥으로 넘어지는 찰나, 소윤은 반사적으로 자신의 얼굴과 캔버스를 보호하기 위해 오른손으로 바닥을 짚었다.
푸욱!
날카로운 쇠 압정들이 소윤의 오른손바닥을 가차 없이 뚫고 들어왔다. 하지만 진짜 비극은 피부를 뚫는 고통이 아니었다. 체중이 오른손에 불균형하게 실린 상태에서, 손목이 기괴한 각도로 꺾이며 안쪽에서부터 끔찍한 파열음이 울려 퍼졌다.
드드득.
오른손 검지 손가락과 손목을 연결하는 깊은 인대가 미세하게 찢어발겨지는 소리였다. 뼈가 깎이는 듯한 날카로운 고통이 팔을 타고 뇌의 중추 신경을 사정없이 난도질했다. 소윤의 입에서 억눌린 비명이 터져 나왔다.
“으아아악!”
손바닥에서 붉은 피가 솟구쳐 바닥의 압정들을 붉게 물들였다. 소윤은 짚었던 손을 떼어내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오른손 검지 손가락이 마치 끊어진 실에 매달린 꼭두각시 인형처럼 힘없이 툭 꺾여 있었다. 뇌에서 손가락을 움직이라는 신호를 보내도, 손가락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완벽한 운동 기능 상실, 인대 파열이었다.
“어머! 소아야, 괜찮아? 왜 이렇게 덤벙대니?”
서지민이 가식적인 비명을 지르며 다가왔다. 그녀의 눈동자 속에는 계획이 완벽히 성공했다는 잔인한 희열이 가득 차 있었다. 소동을 듣고 교실 안으로 들어온 송태문 과장이 클립보드를 들고 다가와 차갑게 상황을 정리하려 했다.
“한소아, 손 상태가 그게 뭐냐? 곧 시험 개시인데 이대로는 실기 작성이 불가능하겠군. 학칙 제18조에 따라, 본인의 신체적 결함으로 시험을 치를 수 없을 때는 기권 서류에 서명하고 퇴실해라. 오늘 기권하면 이번 학기 실기 점수는 자동으로 F등급 처리된다.”
송태문은 미리 준비해 둔 기권 신청서를 소윤의 코앞에 들이밀었다. 이준서의 수석 자리를 위협하는 싹을 아예 행정적으로 잘라버리겠다는 수작이었다.
고통으로 인해 소윤의 시야가 붉게 물들었다. 이마에서 식은땀이 비 오듯 흘러내려 턱끝으로 뚝뚝 떨어졌다.
‘여기서 기권하면 끝이다. F등급을 받으면 추천서 쿼터도, 아르케 침투도 모두 수포로 돌아간다. 언니의 복수도…… 여기서 멈춘다.’
소윤은 피가 흐르는 오른손을 움켜쥐고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고통을 집어삼킨 지독한 살기가 번뜩이고 있었다. 그 서늘한 기세에 송태문이 찔끔하며 한 걸음 물러섰다.
그때, 감독관 자격으로 교실 구석에 서 있던 정우진 교수가 조용히 걸어 나와 소윤과 눈을 맞췄다. 정 교수는 송태문의 어깨를 툭 치며 제지했다.
“송 과장, 아직 시험 시작까지 30분 남았소. 학생이 보건실에서 응급 처치를 받고 오겠다는데, 기권부터 강요하는 건 학칙 위반이오. 내가 보건실까지 동행하지.”
정우진은 소윤에게 턱짓으로 신호를 보냈다. 소윤은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른손에서 흘러내린 피가 실기실 바닥에 붉은 궤적을 남겼지만, 그녀는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며 신음을 삼켰다.
***
은성예고 본관 1층 구석에 위치한 보건실.
하얀 가운을 입은 보건 교사 유미란은 소윤의 손 상태를 확인하자마자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인대 미세 파열이야. 손바닥의 압정 자국은 소독하면 되지만, 검지 힘줄이 안쪽에서 찢어졌어. 지금 당장 대학병원 정형외과로 가서 수술방 잡아야 해. 여기서 붓을 쥐겠다고 고집 피우면, 평생 오른손 손가락 전체를 쓰지 못하게 될 수도 있어.”
미란의 경고는 차갑고 현실적이었다. 그녀는 학교의 부조리한 서열 싸움으로 학생들이 다치는 것을 극도로 혐오하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소윤은 왼손으로 미란의 가운 자락을 강하게 움켜잡았다.
“선생님…… 제발요. 저 오늘 시험 꼭 쳐야 해요. 기권할 수 없어요.”
“너 제정신이니? 손가락이 완전히 불구가 될 수도 있다니까!”
“상관없어요.”
소윤의 목소리는 너무나 낮고 단단해서, 보건실의 에어컨 바람보다 더 차갑게 느껴졌다.
“서혜영과 그 카르텔 놈들이 내 손을 부러뜨려서라도 나를 쫓아내려 만든 시험이에요. 여기서 내가 도망치면, 그 사람들이 웃으며 언니의 캔버스를 짓밟을 거라고요. 제발…… 통증만이라도 없애주세요.”
미란은 소윤의 눈빛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 눈빛은 단순한 학생의 고집이 아니었다. 지옥 밑바닥에서 원수를 끌어내리기 위해 자신의 육체마저 제물로 바치겠다는 광기 어린 복수귀의 눈이었다. 미란은 깊은 한숨을 쉬며 캐비닛에서 붉은색 라벨이 붙은 강력한 소염진통제 주사기와 약물 앰플을 꺼냈다.
“이건 임시방편일 뿐이야. 국소 마취 성분이 섞여 있어서 세 시간 동안은 통증을 느끼지 못하겠지만, 그 뒤에 찾아올 반동 통증은 상상을 초월할 거다. 그리고 감각이 무뎌져서 붓끝의 미세한 필압을 조절하기 힘들 거야.”
“주사해 주세요.”
소윤은 오른손목을 내밀었다. 미란이 주삿바늘을 손목 신경 차단 혈자리에 깊숙이 찔러 넣었다. 차가운 약물이 주입되는 순간, 소윤의 등 뒤로 소름이 돋았고, 이내 불타는 듯하던 오른손의 통증이 거짓말처럼 서서히 얼어붙으며 감각이 무뎌졌다.
통증이 사라지자 소윤은 보건실 침대 옆 테이블에 놓인 이젤 도구들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붓을 쥐어보려 했으나, 파열된 검지 손가락은 여전히 뇌의 지시를 따르지 않고 허공에 덜렁거렸다. 힘을 줄 수 없으니 붓을 고정할 수 없었다.
“부목을 대자.”
미란이 나무 부목을 꺼내 소윤의 검지 손가락에 대고 붕대를 감으려 했다. 하지만 소윤은 부목이 대어지는 순간, 형태 인지안을 가동해 붓이 캔버스에 닿을 각도를 계산했다.
‘안 돼. 부목을 대면 손가락의 굴곡 각도가 180도로 고정되어 버려. 30초짜리 라이브 크로키를 그리려면 모델의 역동적인 선에 맞춰 붓끝을 미세하게 회전시켜야 하는데, 부목이 붓의 회전 반경을 완전히 가로막아.’
소윤은 왼손으로 부목을 거칠게 뜯어냈다. 뜯겨나간 테이프와 함께 상처 부위의 살점이 벌어지며 피가 다시 배어 나왔다.
“뭐 하는 짓이야!”
미란이 깜짝 놀라 외쳤지만, 소윤은 흔들림 없이 서랍에서 최은경 한의사에게 얻었던 ‘관절염 치료용 특수 압박 테이프’를 꺼냈다. 그리고 낡은 붉은 돼지털 붓의 나무 대를 오른손 검지 손가락 안쪽에 밀착시켰다.
“부목은 쓰지 않아요. 대신…… 붓을 내 손가락에 직접 박아버릴 거예요.”
소윤은 왼손과 이를 이용해 특수 압박 테이프의 끝을 물어 팽팽하게 당겼다. 그리고 오른손목부터 시작해 찢어진 검지 손가락 첫째 마디까지, 붓대를 감싸 안으며 뼈가 으스러질 정도의 강한 인장력으로 테이프를 칭칭 감기 시작했다.
서걱, 서걱.
테이프가 살을 파고들며 압박할 때마다, 감각이 마비된 상태에서도 뼈 마디가 비틀리는 둔탁한 압박감이 전해졌다. 흰색 압박 테이프 위로 붉은 피가 배어 나와 기괴한 붉은 문양을 만들어냈지만, 소윤은 멈추지 않았다. 마침내 붓은 소윤의 오른손 검지와 완벽하게 일체화되어, 손가락을 움직이지 않아도 손목과 어깨의 회전만으로 통증 없이 붓질을 할 수 있는 ‘기계적 도구’로 개조되었다.
그 처절하고도 가혹한 자학의 과정이 끝난 순간, 보건실의 슬라이딩 도어가 스르륵 열렸다.
문가에 서 있는 사람은 최현준이었다.
현준은 은빛이 도는 갈색 머리칼 아래로 깊은 충격을 담은 채, 피 묻은 테이프로 붓을 손가락에 묶고 서 있는 소윤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의 검은 가죽 아대를 찬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소아의 죽음에 방조했다는 죄책감과, 눈앞의 가짜 소아가 보여주는 상상을 초월한 집념에 현준의 이성은 거대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소윤은 이마의 땀을 훔치며, 붓이 고정된 오른손을 가볍게 들어 올려 현준의 시선을 정면으로 받아냈다. 테이프 밖으로 스며든 피가 붓대를 타고 내려와 붓끝의 돼지털을 붉게 적시고 있었다.
“방해하지 마, 최현준.”
소윤은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현준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
“이제 내 차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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