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틀리에 아르케의 유리 온실
최현준의 손가락이 파랗게 질린 채 MP3 플레이어의 재생 버튼을 누르자, 정막한 소나무 숲길 사이로 죽은 언니의 찢어지는 듯한 울음소리가 흘러나왔다.
[현준아…… 나 좀 살려줘…… 서 교수가…… 서 교수가 내 그림을 빼앗아서…… 나 이제 더 이상 못 그리겠어…… 살려줘……!]
차가운 가을바람이 소나무 잎사귀들을 흔들며 스산한 소리를 냈다. 녹음기 너머로 울려 퍼지는 언니 한소아의 처절한 비명은 소윤의 가슴을 송곳으로 찌르는 듯했다. 오른손 검지 끝의 찢어진 살점과 자가 침술의 반동 통증이 뼈를 갉아먹는 듯한 고통을 선사하고 있었지만, 소윤의 얼굴은 차가운 대리석처럼 고요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녀는 눈동자 하나 흔들리지 않은 채, 자신을 소나무 벽으로 밀쳐내고 있는 최현준을 똑바로 응시했다.
최현준의 은빛 도는 밝은 갈색 머리칼이 흥분으로 흐트러져 있었고, 그의 검은 가죽 아대를 찬 손목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의 서늘한 눈동자 속에는 걷잡을 수 없는 혼란과 분노, 그리고 깊은 죄책감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너는 누구야? 진짜 소아는 어디 있어?”
현준이 다시 한번 으르렁거리며 소윤의 오른손목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테이핑 안쪽의 인대가 비명을 질렀지만, 소윤은 오히려 왼손을 천천히 뻗어 최현준의 단정한 교복 깃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그리고 힘을 실어 그를 자신 쪽으로 바짝 끌어당겼다. 두 사람의 숨결이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소윤이 낮고 서늘하게 속삭였다.
“내 진짜 이름이 궁금해, 최현준?”
현준의 동공이 미세하게 수축했다. 소윤의 입술이 비틀리며 언니의 나약함을 지워버린 잔혹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 이름을 네 더러운 입으로 부를 자격이 있을까? 너는 방관자잖아.”
“뭐……?”
“언니가 자살하기 전날 밤, 저렇게 살려달라고 울부짖으며 너한테 전화를 걸었을 때, 넌 뭘 했지? 네 그 잘난 S등급 수석 자리를 지키느라, 서혜영 교수의 눈 밖에 나기 싫어서 그 절규를 외면했잖아. 네가 그날 밤 비겁하게 눈을 감고 귀를 막은 대가로 언니가 차가운 바닥에 떨어져 죽은 거야.”
소윤의 가스라이팅 역반사 화법은 최현준의 가장 아픈 아킬레스건을 정확히 관통했다. 현준의 얼굴에서 오만하던 천재의 가면이 무참히 깨져나갔다. 그의 안색이 순식간에 흙빛으로 변했고, 소윤의 손목을 쥐고 있던 그의 손귀에서 힘이 스르륵 빠져나갔다.
“내가…… 내가 외면한 게 아니야…… 난 그저 서 교수가……”
“아니, 넌 외면했어. 서혜영과 그 추악한 카르텔 놈들과 함께 언니를 죽인 공범이지.”
소윤은 현준의 멱살을 잡은 손을 거칠게 밀쳐냈다. 현준은 비틀거리며 한 걸음 물러섰다. 소윤은 주머니에서 정우진 교수의 구형 조각칼을 만지작거리며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내 정체를 학교에 폭로하고 싶으면 마음대로 해. 하지만 네 그 지독한 죄책감에서 평생 벗어나지 못하고 평생 지옥에서 썩어가기 싫다면, 입을 닥치고 내 방패가 돼. 서혜영을 파멸시키는 칼날이 되란 말이야.”
소나무 숲길에는 오직 두 사람의 가쁜 숨소리만이 맴돌았다. 최현준은 멍하니 자신의 손을 바라보다가, 이내 소윤의 눈 속에 서려 있는 지독한 살의와 집념을 마주했다. 그녀는 진짜 소아가 아니었다. 하지만 소아의 복수를 위해 지옥에서 걸어 나온 괴물이었다. 현준은 마침내 죄책감에 굴복하며 고개를 숙였다.
“기꺼이…… 네 사냥개가 되어주지.”
그렇게 두 사람 사이의 위태롭고 차가운 비밀 동맹이 맺어졌다.
***
다음 날 아침, 은성예고 미술동 로비의 게시판 앞은 학생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첫 정기 평가인 라오콘 소묘의 결과가 공고된 것이다.
“대박…… 한소아 진짜 부활한 거야?”
“기둥 뒤 어두운 자리에서 그 구도를 잡아냈다고? 미친 거 아냐?”
공고판의 가장 윗줄, 이준서의 이름 바로 아래에 선명하게 적힌 글자.
[한소아 - A등급]
편입하자마자 단숨에 수석 자리를 위협하는 성적을 받아낸 소윤의 이름 앞을 학생들은 경외와 시기가 뒤섞인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무리 뒤편, 아틀리에 아르케의 핵심 멤버이자 서혜영 교수의 친척 조카인 서지민의 신경질적으로 얇은 눈썹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지민은 화려한 액세서리가 달린 스마트폰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이준서의 독점적인 수석 자리가 흔들린다는 것은, 자신들이 구축해 놓은 아르케 카르텔의 서열 피라미드가 무너진다는 뜻이었다. 지민의 눈동자에 독기가 올랐다.
“천재 코스프레도 여기까지야, 가짜 년.”
지민은 곧바로 교내 익명 커뮤니티 앱을 켜고 준비해 둔 글을 업로드하기 시작했다. 몇 분 뒤, 학교 전체가 조용한 소동으로 들끓었다.
[대나무숲: 이번에 편입한 천재 한소아 라오콘 소묘, 프랑스 신진 작가 장 뤽의 2024년 전시작 구도랑 100% 일치함. 천재의 부활이 아니라 교묘한 표절의 부활 아님? 비교 사진 첨부한다.]
교묘하게 짜깁기된 가짜 표절 비교 사진이 퍼지자, 학생들의 눈빛은 순식간에 차가운 멸시로 변했다.
점심시간, 실기실 제4실로 돌아온 소윤은 자신의 자리가 난장판이 되어 있는 것을 목격했다. S등급 이젤은 구석으로 팽개쳐져 있었고, 사물함은 강제로 열려 스케치북들이 무참히 찢겨 있었다. 바닥에는 훔쳐 가려다 짓밟힌 물감 튜브들이 터져 나와 붉고 푸른 얼룩을 남겼고, 엎질러진 린시드 오일의 시큼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어머, 표절 작가님 사물함이 왜 이렇게 됐을까?”
교실 문가에 기대선 서지민이 비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주변의 학생들이 동조하듯 낄낄거렸다.
소윤은 찢어진 캔버스 조각과 짓밟힌 물감들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가슴속에서 뜨거운 것이 치밀었지만, 그녀는 심장 박동을 의도적으로 늦췄다. 해명 글을 올리거나 소리를 지르는 것은 상대가 원하는 하책일 뿐이었다.
‘여론전이라는 화려한 연막을 칠 때가 가장 방심하기 좋은 법이지.’
소윤은 묵묵히 빗자루를 들고 바닥을 쓸어내기 시작했다. 그녀는 급식실 구석 자리에 홀로 앉아 묵묵히 식사를 하며, 주변 학생들의 수군거림과 아르케 멤버들의 스마트폰 타이핑 템포를 관찰했다. 절대적 형태 인지안이 서지민의 안도 섞인 입꼬리 각도와 이준서의 초조한 눈빛 떨림을 현미경 보듯 쪼개어 분석했다. 그들의 시선이 어디로 향하는지, 그들의 진짜 요새가 어디인지.
그들의 아지트는 교정 한구석에 위치한 최고급 유리 온실이었다.
그곳에 침투해야만 시험지 유출과 대작 거래의 물리적 물증을 잡을 수 있었다. 소윤은 청소 용역 직원인 김 씨에게 조용히 다가갔다. 평소 아르케 멤버들에게 벌레만도 못한 취급을 받으며 눈물 흘리던 김 씨의 손에, 소윤은 따뜻한 음료수와 함께 편의점 아르바이트 주급을 쪼개 만든 대타 경비 비용을 쥐여주었다.
“김 아주머니, 오늘 밤 온실 측면의 작은 환기창 하나만 잠그지 말고 열어두어 주세요. 순찰 동선 매뉴얼도 필요해요.”
김 씨는 소윤의 단단한 눈빛을 보며 침을 삼키고 고개를 끄덕였다.
밤 12시, 은성예고 교정은 거대한 무덤처럼 적막했다. 차가운 달빛만이 유리 온실의 투명한 벽면을 비추며 기괴한 푸른 그림자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온실 내부의 열대 식물들은 어둠 속에서 거대한 발톱처럼 뻗어 있었다.
소윤은 검은 후드를 깊게 눌러쓰고 온실 뒤편 사각지대로 은밀히 접근했다. 김 씨가 말해준 대로 측면의 작은 환기창이 미세하게 열려 있었다. 유연하게 몸을 집어넣어 온실 내부로 침투한 순간, 흙 냄새와 비료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서지민의 가짜 뉴스 연막 덕분에 보안팀의 경계가 느슨해진 틈을 탄 침투였다. 소윤은 아르케 멤버들이 정기적으로 모이는 유리 테이블로 다가가 쓰레기통을 뒤졌다. 그 안에서 파쇄기에서 대충 걸러진 아틀리에 아르케 비밀 회의록 파쇄 조각들을 발견하고 신속히 비닐봉지에 담았다.
서걱.
갑자기 온실 외벽 유리창 너머로 날카로운 손전등 불빛이 sweep하며 다가왔다. 야간 보안팀장 백 팀장의 순찰이었다. 손전등 불빛이 소윤이 서 있는 테이블 바로 앞까지 뻗어왔다. 퇴로가 차단된 절체절명의 위기.
소윤은 반사적으로 바닥에 있던 작은 흙 화분을 들어 어둠 속 반대편 유리벽을 향해 가볍게 던졌다.
쨍그랑!
“누구야? 쯧, 또 길고양이 놈들이 쓰레기통을 건드렸나 보군.”
밖에서 백 팀장의 투덜거리는 목소리가 들렸고, 불빛은 서서히 멀어졌다. 소윤은 거친 호흡을 억누르며 이마의 식은땀을 닦아냈다.
하지만 위기는 끝나지 않았다. 온실의 메인 철문이 소리 없이 열리며 두 개의 그림자가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소윤은 숨을 죽이고 가장 울창한 몬스테라 잎사귀 뒤편의 어두운 사각지대로 몸을 숨겼다.
들어온 사람은 서지민과 미술과장 송태문이었다.
그들이 테이블 조명을 켜자 흐릿한 노란 불빛이 온실 내부를 채웠다. 서지민은 신경질적으로 가방을 던지며 말했다.
“과장님, 확실하게 처리해 주셔야 해요. 한소아 그년, 이번 소묘 평가에서 A등급 받은 걸로 기고만장해 있어요. 준서 수석 자리가 흔들리면 고모도 가만히 안 계실 거예요.”
송태문 과장이 비열한 미소를 지으며 안경을 치켜올렸다.
“걱정 말거라, 지민아. 교무실에서 이미 손을 써두었다. 다음 주 정기 평가 때 기습적으로 ‘라이브 크로키 시험’을 도입하기로 결정했다.”
“라이브 크로키요?”
“그래. 준비 시간 없이, 현장에서 즉석으로 움직이는 모델을 단 30초 안에 그려내야 하는 시험이지. 아무리 천재라도 손목 인대가 완전히 망가진 상태라면 30초 안에 정밀한 선을 긋는 건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년의 망가진 손목을 만천하에 까발려 낙제점을 줄 생각이다.”
어둠 속에서 그들의 대화를 도청하던 소윤의 눈동자가 차갑게 굳어졌다. 주머니 속에서 움켜쥔 그녀의 오른손목 테이핑 안쪽이, 마치 그 음모에 반응하듯 지독한 통증으로 요동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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