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소아는 어디 있지?
정우진의 그림자 아래에서 연필을 놀리던 소윤의 손끝이, 그의 차가운 한마디에 완전히 굳어버렸다.
“시험 종료. 모두 연필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선다.”
실기실 스피커를 타고 흐르는 송태문 과장의 기계적인 안내 방송이 들려왔지만, 소윤의 귀에는 그저 아득한 이명처럼 맴돌 뿐이었다. 손목 안쪽 외관혈에 침을 꽂아 강제로 마비를 풀었던 세 시간의 유효 시간이 정확히 끝나가고 있었다. 검지 끝에서부터 얼음장 같은 한기가 스멀스멀 올라오더니, 이내 바늘로 콕콕 찌르는 듯한 극심한 반동 통증이 신경을 타고 뇌를 때렸다. 테이핑을 칭칭 감아둔 손목이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소윤은 억지로 숨을 고르며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려 애썼다. 캔버스 하단 모퉁이에는 아까 연필을 깎다 흘린 미세한 핏자국이 붉은 낙인처럼 굳어 있었다.
“42번 한소아. 네 그림은 내가 직접 수거하지. 다른 학생들은 퇴실하고, 너는 나를 좀 따라와라.”
이젤 뒤에 서 있던 정우진 교수가 낮고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물감 얼룩투성이 앞치마에서는 찌든 담배 냄새와 차가운 테레핀 기름 냄새가 섞여 풍겼다. 헝클어진 머리칼 사이로 번뜩이는 그의 피로에 찌든 눈빛은 소윤의 심장을 무겁게 짓눌렀다. 주변의 아르케 멤버들이 시기 어린 눈빛으로 수군거리며 실기실을 빠져나가는 동안, 소윤은 굳어가는 오른손을 교복 주머니에 깊숙이 찔러 넣은 채 정우진의 뒤를 따랐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본관 2층 구석에 위치한 낡은 미술 도서관 사서실 뒤편의 폐기 도서 보관소였다. 사람들의 발길이 전혀 닿지 않아 퀴퀴한 종이 냄새와 먼지 냄새가 가득한 밀폐된 공간. 창문 틈새로 새어 들어오는 흐릿한 오전의 햇살만이 공기 중에 떠다니는 먼지 입자들을 비추고 있었다.
정우진은 들고 온 소윤의 라오콘 소묘 그림을 낡은 목재 테이블 위에 툭 던지듯 펼쳐놓았다.
“앉아라.”
소윤은 말없이 나무 의자에 깊숙이 앉아 오른손목의 아대를 만지작거렸다. 테이프 안쪽에서 느껴지는 맥박이 비정상적으로 가파르게 뛰고 있었다. 정우진은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려다 도서관 규정이 생각났는지 이내 손을 거두고, 테이블 위의 그림을 날카로운 눈으로 응시했다.
“이 선들을 봐라.”
정우진의 손가락이 캔버스 하단의 거칠고 정교한 선들을 가리켰다. 특히 조각칼 끝에 쓸려 핏자국이 묻은 모퉁이 부근이었다.
“필치와 질감, 겉보기에는 죽은 한소아의 화풍을 완벽하게 재현했더군. 펜치로 붓끝을 깎아 마찰력을 조절하고 왼손으로 문지른 마티에르까지…… 아주 지독할 정도로 정교한 복제품이야. 하지만 말이다.”
정우진이 상체를 숙이며 소윤의 얼굴 앞으로 다가왔다. 그의 매서운 눈동자가 소윤의 흔들림 없는 눈빛을 관통하듯 쏘아보았다.
“소아의 그림에는 항상 감정이 지배하고 있었다. 슬픔이 북받치면 선이 겉잡을 수 없이 흔들렸고, 서혜영의 압박에 공포를 느낄 때는 붓끝이 가늘게 떨려 캔버스를 찢어발기기도 했지. 그 아이의 천재성은 통제되지 않는 날것 그대로의 감정에서 뿜어져 나오는 비명이었다.”
정우진의 목소리가 한 옥타브 낮아졌다.
“그런데 이 라오콘은 어떠냐? 기둥 뒤 어둠 속에서 조명이 완전히 차단되었는데도, 석고상의 해부학적 골격과 관절의 회전축이 소수점 단위의 오차도 없이 완벽한 비례로 배치되어 있어. 이건 영감이나 감성으로 그린 그림이 아니다. 철저히 계산되고 이성적으로 설계된 차가운 건축 도면이지. 뼈를 깎는 반복 연습으로 단련된 기계의 선이란 말이다.”
정우진의 지적은 정확했다. 소윤은 절대적 형태 인지안을 가동해 머릿속 그리드로 형태를 계산해 그렸다. 그것은 소아의 직관적 천재성과는 완전히 궤를 달리하는, 소윤만의 지독한 설계의 결과물이었다.
“게다가 이 밑바닥에 깔린 지독한 독기와 살의…… 이건 내가 알던 나약하고 섬세한 소아의 영혼이 아니야.”
정우진이 테이블을 쾅 소리 나게 짚었다.
“말해봐. 내 눈앞에 서 있는 너는, 진짜 내가 알던 한소아가 맞나? 진짜 소아는 어디 있지?”
순간 사서실 뒤편의 공기가 비명 소리조차 집어삼킬 듯 얼어붙었다. 정체의 실마리가 완전히 밟힌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소윤의 머릿속이 빠르게 회전했다. 오른손목의 통증이 심장을 찌르는 듯했지만, 그녀의 얼굴은 마치 차가운 대리석 조각상처럼 고요하게 가라앉았다. 그녀는 주머니에서 손을 천천히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렸다. 검은 테이프 위로 붉은 피가 미세하게 스며 나오는 손이었다.
소윤은 차갑고 서늘한 미소를 지으며 정우진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리고 언니의 목소리 톤을 완벽히 모사하되, 그 안에 칼날 같은 독설을 실어 내뱉었다.
“선생님.”
그녀의 목소리가 좁은 보관소 내부를 나직하게 울렸다.
“지금 제 그림의 ‘영혼’을 논하시는 건가요?”
소윤은 가볍게 콧방귀를 뀌며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언니가…… 아니, 제가 서혜영 교수의 아틀리에 아르케에서 영혼을 난도질당하고 대작 노예로 착취당할 때, 선생님은 어디 계셨죠? 제가 그 고통을 견디다 못해 손목을 긋고 죽어갈 때, 선생님은 그 잘난 미학적 분석력을 가지고 무엇을 하셨나요?”
정우진의 안색이 순간 흙빛으로 변했다. 그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소윤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그의 심장 가장 깊은 곳에 박힌 대못을 사정없이 흔들었다. 과거 정우진이 소아를 도우려다 서 교수의 모함에 걸려 ‘여학생 성추행범’이라는 가짜 누명을 쓰고 방관자로 몰락했던 비극적인 과거를 정면으로 저격한 것이다.
“방관자였던 주제에, 이제 와서 내 그림의 영혼이 바뀌었느니 기계의 선이니 왈가왈부하지 마세요. 그 비겁한 침묵을 덮기 위한 구차한 핑계에 불과하니까요. 선생님이 지키지 못해 괴물로 변해버린 제 영혼을, 이제 와서 분석하려 들지 마시란 말입니다.”
“소아 너…… 그건……”
정우진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그의 눈동자에 깊은 죄책감과 자기혐오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쳤다. 소윤의 서늘한 가스라이팅 역반사 화법은 그의 도덕적 방어벽을 완벽히 박살 냈다. 그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자신이 소아를 지키지 못했다는 부채감이 그의 목구멍을 꽉 막아버린 것이다.
소윤은 차갑게 식어버린 손으로 테이블 위의 그림을 거칠게 낚아챘다.
“이 그림은 정식 평가를 거쳐 제출된 걸로 알겠습니다. 선생님이 채점 기준을 조작하지 않는 한, 전 당연히 A등급이겠죠.”
의자 끄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소윤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우진은 숙인 고개를 들지 못했다. 사서실 뒤편을 빠져나오는 소윤의 등 뒤로, 비겁한 스승의 무거운 침묵만이 먼지처럼 가라앉았다.
도서관 건물 밖으로 나오자마자 매서운 가을바람이 소윤의 뺨을 때렸다. 긴장이 풀리자 오른손목의 통증이 폭발하듯 밀려왔다. 자가 침술의 반동 통증이었다. 손가락 마디마디가 불에 달군 바늘로 쑤시는 듯한 작열감에 소윤은 신음을 삼키며 어깨를 움츠렸다. 그녀는 떨리는 오른손을 아대로 감싸 쥔 채, 혼란스러운 머리를 식히기 위해 미술동 뒤편에 위치한 한적한 소나무 숲길로 향했다.
울창한 소나무들이 하늘을 가려 어두컴컴한 오솔길에는 바스락거리는 솔잎 밟히는 소리만이 적막하게 울렸다. 소윤은 소나무 둥치에 몸을 기대고 깊은 숨을 내쉬었다. 살을 에이는 듯한 신경통에 눈물이 핑 돌았지만, 그녀는 이를 악물었다.
‘정우진은 막았어. 그의 죄책감은 내 가장 완벽한 방패야. 하지만 최현준은…….’
그때였다.
바스락.
소나무 숲길 구석에서 마른 솔잎이 밟히는 날카로운 소리가 들려왔다. 소윤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기도 전에, 검은색 그림자가 그녀의 시야를 가로막았다.
은빛이 도는 밝은 갈색 머리칼, 날카로운 턱선과 서늘한 눈동자. 오른손목에 검은색 특제 가죽 아대를 착용한 소년.
은성예고 실기 부동의 1위, 최현준이었다.
그는 차가운 눈빛으로 소윤을 내려다보며 한 걸음씩 다가왔다. 소윤은 본능적으로 소나무 뒤로 물러서려 했으나, 현준은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와 그녀의 어깨를 짚고 소나무 껍질 위로 강하게 밀쳐냈다.
“읍……!”
등 뒤로 느껴지는 거친 소나무의 감각과 손목의 통증이 겹쳐 소윤의 입에서 신음이 새어 나왔다. 현준은 그녀를 벽에 가두듯 양팔로 가로막은 채, 얼굴을 바짝 들이밀었다. 그의 차가운 숨결이 소윤의 이마에 닿았다.
“부상 때문에 그림 쥐는 버릇과 모든 습관을 바꿨다?”
현준의 목소리는 낮고 위협적이었다. 그의 깊은 눈동자 속에는 걷잡을 수 없는 혼란과 분노가 뒤섞여 불타오르고 있었다.
“그럴듯한 거짓말이었어, 한소윤.”
그가 뱉은 진짜 이름에 소윤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하지만 그녀는 눈동자 하나 흔들리지 않고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가짜 한소아의 가면은 여전히 견고했다.
“무슨 소린지 모르겠네, 현준아. 나 손목이 너무 아파. 이거 놓아줄래?”
“연기하지 마.”
현준이 소윤의 오른손목 아대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상처 부위가 눌리며 소윤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소아는 아무리 손목이 부러져도 물통을 왼손으로 씻는 오랜 습관을 절대 바꾸지 않아. 물통을 씻을 때 물이 튀는 것을 극도로 싫어해서, 항상 왼손 끝으로만 조심스럽게 문지르지. 그리고 연필을 깎을 때 조각칼을 쥐는 각도…… 소아는 칼날을 몸 바깥쪽으로 밀어내며 깎았어. 하지만 너는 아까 기둥 뒤에서 칼날을 네 몸쪽으로 당기며 거칠게 깎아내더군. 그건 가난한 길거리 화가들이나 쓰는 위험하고 무식한 방식이야.”
현준의 매서운 지적에 소윤은 입술을 깨물었다. 절대적 형태 인지안으로도 미처 계산하지 못한, 몸에 밴 아날로그적 버릇의 꼬리가 밟힌 것이다.
현준은 주머니 속에서 먼지 묻은 낡은 블루 색상의 MP3 플레이어를 꺼내 소윤의 눈앞에 들이밀었다. 그것은 생전 소아가 늘 보물처럼 들고 다니며 서 교수의 가스라이팅 상황을 녹음해 두었던 유품이었다.
“이게 뭔지 알지? 소아가 자살하기 전날 밤, 나한테 전화를 걸어 울부짖었던 녹음 파일이 여기 담겨 있어.”
최현준의 손가락이 파랗게 질린 채 MP3 플레이어의 재생 버튼을 누르자, 정막한 소나무 숲길 사이로 죽은 언니의 찢어지는 듯한 울음소리가 흘러나왔다.
[현준아…… 나 좀 살려줘…… 서 교수가…… 서 교수가 내 그림을 빼앗아서…… 나 이제 더 이상 못 그리겠어…… 살려줘……!]
녹음기 너머로 울려 퍼지는 언니의 처절한 비명 소리에 소윤의 가슴이 갈기갈기 찢겨 나가는 듯했다. 주먹을 쥔 그녀의 손톱이 살을 파고들었다.
현준은 녹음을 끄고, 피가 맺힐 정도로 입술을 깨물며 소윤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소아는 자살하기 전날 밤, 나한테 살려달라고 저렇게 울부짖었어. 내가 외면했던 그 처절한 목소리가 여기 고스란히 박혀 있단 말이야. 그런데 너는……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게 이 학교를 다시 다니며 생글생글 웃고 있지? 너는 누구야? 진짜 소아는 어디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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