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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 속의 데생, 무너지는 경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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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어버린 손가락 끝에 차가운 침날이 닿는 순간, 소윤의 눈빛에 다시 서늘한 살기가 돌았다.


월요일 아침 8시 30분, 은성예술고등학교 미술동 실기실 제4실의 공기는 평소보다 무겁고 축축했다. 사방을 가득 채운 연필 흑연 가루와 마른 석고 가루 냄새, 그리고 캔버스 뒤편에서 풍겨오는 차가운 turpentine 기름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학생들은 저마다 자신의 이젤 앞에 서서 연필을 깎거나 지우개를 다듬으며 극도로 날카로워진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오늘은 편입학 후 일주일 만에 치러지는 첫 번째 정기 소묘 평가 날이었다.


“자리배치표 확인하고 각자 지정된 위치로 이동해라.”


미술과장 송태문의 차가운 목소리가 마이크를 타고 실기실 천장을 울렸다. 그의 반무테안경 너머로 비열한 미소가 슬쩍 스쳐 지나갔다. 소윤은 칠판 옆에 붙은 배치표를 확인했다. 그녀의 이름 옆에 적힌 번호는 ‘42번’.


실기실 제4실의 가장 구석진 자리이자, 중앙에 우뚝 솟은 거대한 콘크리트 기둥 바로 뒤편 사각지대였다.


소윤이 자신의 이젤을 들고 기둥 뒤로 걸어가자, 주변의 아틀리에 아르케 멤버들과 기회주의적인 동기생들이 킥킥거리며 야유 섞인 시선을 보냈다. 서지민은 창가의 채광 좋은 자리에 앉아 다이아몬드 피어싱을 만지작거리며 소윤을 조롱하듯 쳐다보았고, 이사장 아들 이준서는 고가의 명품 미술 도구를 펼쳐놓은 채 코방귀를 꼈다.


그 자리는 최악이었다. 정면에 놓인 라오콘 석고상의 각도가 기둥에 가려 절반밖에 보이지 않는 데다, 천장의 핀조명마저 기둥에 가로막혀 완벽한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 빛이 닿지 않는 어둠 속에서 석고상의 명암과 양감을 잡아내는 것은 일반적인 입시 미술 기법으로는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송태문이 아르케의 사주를 받아 기획한 합법적인 낙제 덫이었다.


‘빛이 없다면, 어둠 속에서 그리는 법을 보여주면 돼.’


소윤은 입술을 굳게 다물고 이젤을 고정했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다른 곳에서 터졌다. 자리에 앉아 연필을 쥐려던 순간, 오른손 검지 끝에서부터 얼음장 같은 냉기가 타고 올라왔다. 어젯밤 지하 단칸방에서 무리한 모사 연습을 하다가 발생한 급성 손목 신경 마비 증상이 다시 도진 것이었다. 검지 손가락이 굳은 나무토막처럼 뻣뻣하게 굳어지며 연필을 쥘 힘조차 들어가지 않았다.


이대로는 선 하나조차 그을 수 없었다. 시험 시작 전까지 남은 시간은 단 10분.


소윤은 자리에서 일어나 교무실 뒤편 대기실 화장실로 향했다. 차가운 타일 바닥 위에 서서 화장실 칸막이 문을 걸어 잠갔다. 그녀의 이마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소윤은 주머니 속에서 최은경 한의원 원장에게 극비리에 얻어낸 미세 은침 세트가 든 가죽 파우치를 꺼냈다.


“이 혈자리는 ‘외관혈’이다. 손목 안쪽의 정중앙에서 손가락 두 마디 정도 위쪽이지. 급성 신경 마비가 올 때 이곳을 깊숙이 찌르면 일시적으로 통증과 마비가 풀릴 거다. 하지만 이건 신경을 강제로 흥분시키는 자학적인 처방이야. 세 시간 뒤에 마비가 풀리면 기존 고통의 세 배에 달하는 반동 통증이 올 테니 절대 무리해서는 안 된다.”


최은경 원장의 경고가 귓전을 때렸지만, 소윤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녀는 은침 하나를 꺼내 들었다. 굳어버린 오른손목을 세면대 위에 올리고, 왼손으로 침날을 잡았다. 서늘한 쇠붙이가 살갗에 닿는 순간, 소윤은 눈을 질끈 감고 침을 손목 안쪽 외관혈에 깊숙이 찔러 넣었다.


“아윽……!”


비명이 새어 나오려는 것을 입술을 깨물며 막았다. 찌릿한 전류가 오른손 전체를 관통하듯 강렬한 신경통이 뇌를 때렸다. 붉은 피 한 방울이 침날을 타고 흘러내려 차가운 세면대 화강암 위로 툭 떨어졌다. 소윤은 이가 부러질 정도로 어금니를 악물며 침을 미세하게 돌렸다.


잠시 후, 기적처럼 굳어 있던 오른손 검지 마디에 뜨거운 혈류가 돌며 감각이 서서히 돌아오기 시작했다. 소윤은 침을 빠르게 뽑아 파우치에 넣은 뒤, 주머니에서 ‘관절염 치료용 특수 압박 테이프’를 꺼냈다. 그녀는 통증이 다시 고개를 들지 못하도록 오른손목부터 검지 첫째 마디까지 살점이 터져 나갈 정도로 팽팽하게 테이핑을 감아 고정했다. 아대 안쪽의 굳은살과 찰과상 위로 검은 테이프가 단단히 밀착되었다.


실기실로 돌아온 소윤의 눈빛은 이전보다 훨씬 더 서늘하고 살기 어린 독기로 가득 차 있었다. 그녀는 이젤 앞에 섰다.


댕, 댕, 댕.


시험 개시를 알리는 종소리가 실기실을 울렸다. 제한 시간은 세 시간. 주제는 ‘라오콘의 고뇌’.


주변 학생들은 일제히 연필을 놀리며 스케치를 시작했다. 하지만 기둥 뒤 어둠 속에 갇힌 소윤의 시야에 비친 라오콘은 그저 거대하고 기괴한 검은 실루엣에 불과했다. 석고상의 세부적인 굴곡과 눈매, 고통스러운 입 모양은 어둠 속으로 완전히 묻혀 있었다.


소윤은 깊은 호흡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눈동자를 미세하게 수축시키며 ‘절대적 형태 인지안’을 가동했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던져주는 무작위 형태의 사물들을 단 1초만 보고 모눈종이 위에 정확한 밀리미터 단위 비례로 그려내던 가혹한 훈련의 기억이 뇌 속에서 살아 움직였다. 소윤의 망막 위에 푸른빛의 가상 그리드 라인이 투사되며, 어둠 속에 숨겨진 라오콘의 기하학적 비례와 관절의 회전축이 소수점 단위의 수식처럼 해체되어 캔버스 위로 오버레이되었다.


사각, 사각, 사사각.


소윤의 오른손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붕대로 묶인 연필 끝이 종이 위를 거침없이 긁어 내려갔다. 다른 학생들이 석고상의 명암을 눈으로 확인하며 조심스럽게 선을 긋는 동안, 소윤은 오직 뇌 속에서 계산된 기하학적 수치와 뼈대의 비례만을 바탕으로 선을 던졌다. 그것은 그리는 행위가 아니라, 정밀한 기계가 도면을 출력하는 것에 가까운 속도였다.


중간에 연필심이 뭉툭해지며 선이 흔들릴 뻔한 위기가 찾아왔다. 소윤은 칼을 꺼내 연필을 깎을 시간조차 아까웠다. 그녀는 주머니 속에 숨겨둔 정우진 교수의 구형 조각칼을 꺼내 들었다. 날이 퍼렇게 선 조각칼로 연필의 나무통을 단 두 번의 거친 손놀림으로 깎아내며 필선의 템포를 유지했다. 조각칼 끝에 쓸린 손가락 끝에서 다시 미세한 피가 배어 나와 캔버스 하단 모퉁이에 붉은 낙인처럼 묻었지만, 소윤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녀의 그림은 일반적인 명암 소묘의 규칙을 완전히 파괴하고 있었다. 조도가 너무 낮아 빛과 그림자의 경계를 눈으로 구별할 수 없자, 소윤은 선의 굵기와 필압의 강약만을 이용해 사물의 입체적인 양감을 표현하는 ‘구조적 데생’으로 전략을 수정했다. 어둠 속에서 라오콘의 뒤틀린 근육들이 칼로 깎아낸 듯한 강렬한 선들로 살아나기 시작했다.


그 필치는 표면적으로는 죽은 언니 한소아 특유의 부드럽고 긁는 듯한 마티에르를 완벽히 흉내 내고 있었다. 소윤이 펜치로 깎아 개조한 ‘낡은 붉은 돼지털 붓’을 왼손에 쥐고 연필 선 위를 미세하게 문지르자, 소아의 시그니처 질감이 캔버스 위로 마술처럼 덧씌워졌다.


하지만 그 그림의 뼈대는 소아의 것과 완전히 달랐다. 소아의 그림이 감성적이고 즉흥적인 천재성의 발현이었다면, 지금 기둥 뒤 어둠 속에서 만들어지는 그림은 철저히 계산되고 이성적으로 설계된 차가운 건축물과 같았다.


시험 종료 한 시간을 앞두고, 감독관 자격으로 실기실을 순찰하던 비주류 미술 교사 정우진이 학생들의 이젤 뒤를 천천히 걸어 다니기 시작했다. 그는 이준서의 그림 앞에서 잠시 멈춰 서서 혀를 차고는, 마침내 가장 구석진 기둥 뒤편, 소윤의 이젤 앞으로 다가왔다.


정우진은 소윤의 그림을 내려다보는 순간, 걸음을 우뚝 멈추었다.


그의 헝클어진 머리칼 사이로 날카로운 눈빛이 번뜩였다. 정우진은 소윤의 그림과 그녀의 오른손목에 칭칭 감긴 검은 압박 테이프, 그리고 테이프 사이로 흘러내리는 붉은 핏자국을 교차해서 바라보았다.


소윤은 정우진의 시선이 자신의 이젤 뒤에 고정되었음을 느꼈다. 심장이 쿵쾅거렸지만, 붓을 쥔 손가락은 얼음처럼 고정된 채 마지막 라오콘의 발가락 관절 비례를 계산하고 있었다. 연필 끝이 종이를 긁는 날카로운 ‘사각’ 소리만이 기둥 뒤의 어둠을 가득 채웠다.


정우진은 말없이 소윤의 이젤 뒤에 멈춰 서서, 그녀의 붓끝이 만들어내는 정교하고도 차가운 선들의 궤적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의 눈동자 속에 기괴한 경탄과 함께,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깊은 의심의 불꽃이 소리 없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HẾT CHƯƠ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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