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방의 유령, 근육의 기억
“말해봐. 내 눈앞에 서 있는 너는, 진짜 내가 알던 한소아가 맞나?”
정막이 흐르는 소나무 숲길, 최현준의 낮게 깔린 목소리가 숲바람을 타고 소윤의 고막을 차갑게 찔렀다. 현준의 검은색 특제 가죽 아대가 햇빛을 받아 서늘하게 반짝이는 가운데, 그의 손끝은 소윤의 오른쪽 검지 둘째 마디를 강하게 내리누르고 있었다. 굳은살의 위치가 다르다는 기하학적 불일치. 소윤의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했으나, 그녀의 이성은 얼음처럼 차가운 연산을 가동했다.
여기서 당황하거나 피하면 정체가 완전히 탄로 난다. 최현준은 지금 의심을 확신으로 바꾸기 위해 덫을 놓은 것이다. 소윤은 떨림을 억누르며 차가운 포커페이스를 유지한 채 현준의 서늘한 눈동자를 똑바로 응시했다.
“의심스러우면 직접 확인해.”
소윤은 왼손으로 현준의 손목을 쳐내며 오른손목에 감겨 있던 낡은 아대를 거칠게 풀어헤쳤다. 아대 안쪽, 자살 시도의 흔적으로 위장된 길고 붉은 흉터와 밤샘 연습으로 부어오른 인대의 벌건 흔적이 햇빛 아래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소윤은 망설임 없이, 현준이 깎아 쥐여준 날카로운 연필의 흑연 끝을 자신의 오른쪽 검지 첫째 마디 옆면에 강하게 찔러 넣었다.
콰직, 하는 소리와 함께 날카로운 연필심이 부러지며 굳은살 옆 연약한 살점 속으로 파고들었다. 붉은 피가 순식간에 배어 나와 검은 연필가루와 뒤섞여 흘러내렸다. 현준의 눈동자가 충격으로 크게 흔들렸다.
“인대가 끊어졌었어.” 소윤이 낮게 읊조렸다. “그날 밤 이후로 내 손가락 뼈마디는 제 위치를 잃었지. 연필을 예전처럼 쥘 때마다 뼈가 어긋나는 통증이 와. 그래서 필압을 제어하는 축을 바꾼 거야. 살기 위해서. 내가 가짜 같아? 내가 한소아가 아니면 좋겠어? 그래야 방관했던 네 마음이 편할 테니까.”
이것은 완벽한 기술적 알리바이이자 가스라이팅 역반사였다. 소아의 자살 시도로 인해 신체가 망가졌다는 핑계는, 현준의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죄책감을 정확히 강타했다. 현준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한 채 한 걸음 물러섰다.
“부상…… 때문이라고?”
소윤은 피 묻은 연필을 그의 가슴팍에 툭 던지듯 돌려주고는, 아대를 다시 단단히 동여매며 소나무 숲길을 빠져나왔다. 등 뒤에서 현준이 멍하니 자신의 손을 바라보는 실루엣이 보였지만, 소윤은 뒤돌아보지 않았다.
***
학교에서 멀리 떨어진 외딴 골목길 구석. 소윤은 낡고 축축한 지하 단칸방의 철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마자 지하 특유의 눅눅한 습기와 곰팡이 냄새, 그리고 기름물감 향이 뒤섞인 차가운 공기가 코끝을 찔렀다. 이곳은 세상으로부터 철저히 격리된 한소윤만의 은밀한 은신처이자, 가짜 한소아의 가면을 벗을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었다.
소윤은 방 한구석에 설치된 구형 빔프로젝터의 전원을 켰다. 거친 콘크리트 벽면 위로 푸른빛이 쏘아지며, 생전 언니 한소아가 캔버스 앞에서 붓을 휘두르던 과거 작업 영상이 프레임 단위로 재생되기 시작했다.
‘프레임 단위 영상 분석 모사법.’
소윤은 벽면 앞에 이젤을 펼치고 섰다. 0.1초 단위로 멈추는 화면 속에서 소아의 손목 스냅 각도, 붓이 캔버스에 닿는 순간의 필압 변화, 손가락 마디마디가 수축하고 이완하는 타이밍을 현미경 보듯 분석했다. 소윤의 본래 필치는 거칠고 공격적이었으나, 소아의 화풍은 부드러우면서도 뼈대가 단단한 이중성을 지니고 있었다. 자신의 원래 화풍을 완전히 지워버리고 언니의 근육 기억을 강제로 뇌와 손에 각인시키는 과정은 뼈가 깎이는 고문이었다.
“아윽……!”
오른손 검지에 쥐가 나며 관절이 퉁퉁 부어올랐다. 소윤은 펜치를 꺼내 들어 언니의 유품인 ‘낡은 붉은 돼지털 붓’의 뻣뻣한 붓끝을 미세하게 깎아내기 시작했다. 물리적인 마찰력을 강제로 조정하여, 자신의 둔해진 손끝 감각으로도 소아 특유의 긁는 듯한 거친 질감을 재현할 수 있도록 도구를 개조한 것이다. 이젤 옆에는 ‘소아의 비밀 일기장과 스케치북’이 펼쳐져 있었다. 언니의 고통스러운 필체로 적힌 조색 레시피와 스케치들을 바이블처럼 읽어 내리며, 소윤은 언니의 영혼과 동조하려 애썼다.
그때, 낡은 폴더폰이 요란하게 진동했다. 화면에 뜬 이름은 김하은. 아르케의 횡포에 착취당하던 1학년 후배였다.
“소아 선배…… 들으셨어요? 송태문 과장이 이번 실기 시험 자리 배치를 바꿨대요.”
하은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선배 이젤을 실기실 제4실의 거대한 콘크리트 기둥 뒤 사각지대로 밀어버렸어요. 거긴 조명이 아예 차단돼서 석고상의 양감을 잡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자리예요. 아르케 애들이 선배를 떨어뜨리려고 송 과장에게 로비한 게 틀림없어요……”
“알았어, 하은아. 정보 고마워.”
소윤은 차분하게 전화를 끊었다. 송태문 과장이 아르케의 압력을 받아 자신을 떨어뜨리기 위해 음모를 완료한 것이다. 어두운 구석 자리라니, 일반적인 입시 미술생이라면 절망했겠지만 소윤의 눈빛은 더욱 서늘하게 빛났다.
“빛이 없다면, 어둠 속에서 그리는 법을 배우면 돼.”
소윤은 단칸방의 불을 완전히 껐다. 오직 빔프로젝터의 희미한 잔광만이 남은 어둠 속에서, 그녀는 석고상 대신 벽면에 비친 희미한 실루엣을 보며 크로키를 시작했다. 형태를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대상의 기하학적 비례를 뇌 속에서 수식처럼 계산해 선으로 옮기는 극한의 훈련이었다.
하루 3시간도 자지 못한 채 편의점 알바와 밤샘 연습을 병행하느라 면역력은 바닥나 있었다. 손등에는 ‘관절염 치료용 특수 압박 테이프’가 칭칭 감겨 있었지만, 통증은 이미 테이프의 압박력을 넘어서고 있었다.
사각, 사각…….
어둠 속에서 연필을 놀리던 순간, 갑자기 오른손 검지 끝에서부터 얼음장 같은 냉기가 타고 올라왔다.
“……!”
손가락 끝의 감각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연필을 쥐고 있던 손가락 마디마디가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지며 제어력을 잃었다. 무리한 모사 훈련과 피로 누적으로 찾아온 급성 손목 신경 마비 증상이었다.
툭.
손가락 사이에서 연필이 미끄러져 먼지 쌓인 지하방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소윤은 굳어버린 자신의 오른손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검지 손가락은 구부러지지도, 펴지지도 않은 채 기괴한 각도로 굳어 있었다. 내일 아침이 첫 정기 실기 평가였다. 절망적인 신체적 한계 앞에서, 지하 단칸방의 유령 같은 정적만이 그녀의 숨소리를 집어삼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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