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 긋기의 규칙, 사냥개들의 덫
교무실의 공기는 언제나 시큼한 잉크 냄새와 오래된 서류 뭉치에서 나는 곰팡이 내로 가득했다. 하지만 오늘, 미술과장 송태문의 개인 집무실은 유독 숨이 막힐 듯한 침묵이 지배하고 있었다.
“학내 분위기를 흐려? 한소아, 네가 편입하자마자 실기실 바닥에 그 해괴망측한 붉은 낙서를 그려놓고 전교생을 선동한 게 학내 분위기를 흐린 게 아니면 뭐지?”
송태문 과장은 반무테안경을 치켜올리며 책상을 탁 쳤다. 그의 목소리에는 아틀리에 아르케의 행동대장인 강민재를 어떻게든 비호하고, 소윤에게 모든 책임을 뒤집어씌우려는 비열한 의도가 노골적으로 묻어났다. 강민재의 아버지는 은성예고 재단의 유력한 후원자였고, 송태문에게는 그 자본의 줄타기가 자신의 안위보다 중요했기 때문이다.
소윤은 송태문의 위선적인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의 턱밑 살이 분노로 미세하게 떨리는 모양새가 해부학적으로 아주 우스꽝스러웠다. 소윤은 오른손목의 두꺼운 아대를 고쳐 매며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과장님. 저는 낙서를 한 것이 아닙니다. 찢어진 캔버스와 부서진 이젤이라는 ‘주어진 조건’을 활용해 즉석 크로키를 완성했을 뿐입니다. 예술고등학교에서 창작 행위가 징계 대상이 된다는 규정은 학칙 어디에도 없습니다.”
“이게 어디서 말대꾸야! 이젤이 부서진 건 단순한 사고였어! 그걸 가지고 동급생을 모함하는 그림을 그려서 선동을 해?”
송태문이 억지를 쓰며 소윤을 압박해 들어왔다. 그의 뒤편 가죽 소파에는 강민재가 억울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앉아 있었고, 교무실 구석에서는 정우진 교수가 팔짱을 낀 채 이 상황을 흥미롭다는 듯 지켜보고 있었다.
소윤은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갔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가짜 한소아의 껍데기를 쓰고 있지만, 지금 이 순간의 이성은 철저히 분석적인 한소윤의 것이었다.
“단순한 사고가 아닙니다. 은성예술고등학교 학칙집 제14조 ‘실기 시험 및 창작물 훼손 금지 규정’에 따르면, 타인의 창작물을 고의로 훼손하거나 오염시키는 행위는 발견 즉시 해당 시험 0점 처리 및 학칙에 따른 중징계, 심할 경우 퇴학 처분에 처한다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송태문의 안색이 순간 굳어졌다. 소윤이 학칙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읊조릴 줄은 예상하지 못한 기색이었다. 송태문은 헛기침을 하며 말을 돌리려 했다.
“그, 그건 고의성이 입증되었을 때의 얘기지! 증거도 없이 어떻게 고의라고 단정 짓나?”
“증거라면 있습니다.”
소윤이 담담하게 쐐기를 박았다.
“지난 토요일 아침 7시 12분, 미술동 3층 복도를 비추던 CCTV 카메라가 오프라인 상태로 잠시 전환되었다가 7시 35분에 다시 켜졌더군요. 그 전산 기록의 미세한 공백과, 행정실 메인 서버에 남은 강민재 학생의 출입 카드 태그 기록을 대조해 보면 고의성이 입증되지 않을까요?”
그것은 행정실의 계약직 주임 이선영을 통해 극비리에 확보한 정보였다. 이선영은 학교의 비정상적인 고용 환경과 아르케의 비리에 깊은 반감을 품고 있었고, 소윤의 냉철한 계산에 설득되어 밤중에 전산 로그의 복사본을 제공해 주었던 것이다. 물론 그 대가로 훗날 카르텔의 진짜 비리를 폭로할 때 그녀의 신변을 보장해 주겠다는 위험한 동맹 부채를 지게 되었지만, 지금 이 순간 송태문의 목을 죄기에는 더없이 완벽한 칼날이었다.
“너…… 그걸 어떻게……”
송태문의 반무테안경 너머로 비열한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전산 로그의 존재를 안다는 것은 학교 수뇌부의 은폐 공작을 통째로 꿰뚫고 있다는 뜻이었다. 만약 이 사실이 교육청 감사단이나 외부 언론에 흘러 들어간다면 송태문 자신의 목줄이 먼저 날아갈 터였다.
소윤은 당황한 송태문을 향해 서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저는 그저 학칙대로 처리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제 찢어진 캔버스에 남은 칼자국의 깊이와 각도가 강민재 학생의 신체 조건과 일치한다는 정우진 선생님의 미학적 소견도 이미 확보되어 있으니까요.”
정우진 교수가 구석에서 나지막이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묵인과 동조는 송태문에게 거대한 바위처럼 묵직한 압박으로 다가왔다. 결국 송태문은 라이터를 쥐듯 손을 부르르 떨며 서류를 책상 위로 던지듯 내려놓았다.
“……이번 건은 양측의 오해에서 비롯된 해프닝으로 정리하겠다. 강민재는 실기실 청소 2주, 한소아 너는…… 경고 조치로 끝내지. 물러가 봐.”
사실상의 판정승이었다. 소윤은 비굴하게 고개를 숙이는 강민재를 뒤로하고 교무실 문을 열고 나왔다.
복도로 나오자마자 긴장이 풀리며 오른손목에서 날카로운 통증이 솟구쳤다. 찢어진 캔버스 위에서 무리하게 속사를 진행한 대가였다. 아대 안쪽의 상처가 욱신거리며 맥박에 맞춰 피가 도는 느낌이 생생했다. 소윤은 숨을 고르기 위해 미술동 뒤편에 위치한 한적한 소나무 숲길로 향했다.
숲길은 차가운 바람과 솔향으로 가득했다. 우뚝 솟은 소나무들 사이로 비쳐 드는 가을 햇살을 받으며 소윤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의 이성이 만들어낸 차가운 승리였지만, 언제 정체가 탄로 날지 모른다는 극도의 불안감은 여전히 가슴 깊은 곳에 가시처럼 박혀 있었다.
바스락.
마른 솔잎이 밟히는 소리와 함께 등 뒤에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소윤이 번개처럼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최현준이 서 있었다. 은빛이 도는 갈색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리고 있었고, 그의 깊고 서늘한 눈동자는 오만하면서도 날카롭게 소윤의 전신을 훑고 있었다. 그의 검은색 특제 가죽 아대가 햇빛을 받아 차갑게 반짝였다.
“한소아.”
현준의 목소리는 중저음의 단단한 톤이었다. 그는 천천히 다가와 주머니에서 날카로운 커터칼을 꺼내 들었다. 소윤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긴장시키며 주머니 속의 조각칼을 쥔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하지만 현준은 칼날을 소윤에게 겨누는 대신, 자신의 주머니에서 연필 한 자루를 꺼내 깎기 시작했다. 사각, 사각, 소나무 숲의 정적 속에서 연필나무가 깎여 나가는 규칙적인 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칼날이 연필심을 다듬는 각도는 소수점 단위로 정확하고 치밀했다.
“소묘의 기본은 선 긋기지. 그리고 선의 질감을 결정하는 건 연필을 깎는 각도와 그것을 쥐는 손끝의 힘이야.”
현준이 깎아낸 날카로운 연필을 소윤의 눈앞에 내밀었다.
“예전의 너는 연필을 깎을 때 칼날을 안쪽으로 눕혀 25도 각도로 길게 깎았어. 흑연의 단면을 넓게 써서 부드럽고 몽환적인 톤을 내기 위해서였지. 그리고 연필을 쥘 때는 언제나 검지 둘째 마디에 primary pressure를 실었어. 그 사소한 습관 때문에 네 오른쪽 검지 옆면에는 독특한 사선 모양의 굳은살이 박여 있었지.”
현준의 서늘한 시선이 소윤의 검지 손가락 끝으로 내려앉았다.
“그런데 지금의 너는 달라.”
정막이 흐르는 소나무 숲길, 현준이 손가락 끝으로 소윤의 검지 마디를 툭 건드리며 나직하게 속삭였다.
“지금 네 손가락의 굳은살은 검지 첫째 마디 아래쪽에 수평으로 박여 있어. 이건 펜을 쥘 때 손가락을 극도로 구부려 종이를 파고들 듯 힘을 주는 사람들의 전형적인 흔적이지. 필압을 제어하지 못하는 평범한 필기체의 흔적이야.”
소윤의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최현준의 비정상적일 정도의 정밀한 시각적 분석력은, 그녀가 밤새 연습한 모사의 한계를 단숨에 꿰뚫어 보고 있었다. 현준은 연필을 소윤의 손가락 사이에 억지로 끼워 넣으며 얼굴을 들이밀었다.
“말해봐. 내 눈앞에 서 있는 너는, 진짜 내가 알던 한소아가 맞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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