찢겨진 캔버스 위의 분노
민재의 거친 발길질에 이젤이 크게 비틀거리며 캔버스가 바닥으로 추락하려는 찰나였다.
쿵, 하는 둔탁한 파열음이 실기실 제4실의 공기를 찢었다. 나무 프레임이 바닥에 부딪히며 부서지는 비명이 들려야 마땅한 타이밍이었다. 그러나 소음은 이어지지 않았다.
소윤의 왼손이 번개처럼 뻗어나가 흔들리는 캔버스 옆면을 단단히 움켜쥔 덕분이었다. 거친 소나무 프레임의 나뭇결이 손바닥을 사정없이 긁고 지나갔지만, 소윤은 신음 한 자락 흘리지 않았다. 검은색 두꺼운 아대로 감싼 오른손목은 이젤의 지지대를 움켜쥐며 단단히 무게중심을 잡았다. 아대 아래에서 인대가 비명을 질렀으나, 소윤의 얼굴은 차가운 대리석처럼 고요했다.
민재는 자신이 찬 이젤이 허망하게 제자리를 잡자 칫, 하고 혀를 찼다. 그의 발끝에 채인 물감 튜브들이 바닥을 굴러다녔다.
“의외로 악력이 좋네, 한소아? 병원에 누워 있는 동안 손가락 힘만 키웠냐?”
민재가 비열한 미소를 지으며 한 걸음 다가왔다. 그의 몸에서 풍기는 저급한 담배 냄새와 땀 냄새가 실기실 특유의 테레핀유 냄새와 섞여 역겨움을 유발했다. 소윤은 고개를 살짝 숙이며,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민재의 미세한 움직임을 관찰했다. 그의 오른쪽 어깨가 왼쪽보다 약간 처져 있었다. 평소 무거운 조소용 흙을 한쪽으로만 나르는 습관 때문에 생긴 해부학적 불균형이었다.
“치워.”
소윤은 언니 한소아의 유약하고 얇은 목소리를 완벽히 복제해 내뱉었다. 하지만 그 안에는 뼈를 얼려버릴 듯한 서늘함이 깃들어 있었다. 지민은 소윤의 기묘한 태도에 왠지 모를 위압감을 느끼며 민재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민재야, 가자. 서 교수님 곧 오실 시간이야. 굳이 저런 애랑 엮여서 시간 낭비할 필요 없어.”
민재는 지민의 말에 못 이기는 척 발을 뒤로 물렸다. 하지만 그의 눈빛에는 여전히 저열한 가학성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조심해라, 한소아. 다음번엔 이젤만 흔들리는 걸로 안 끝날 테니까.”
그들이 멀어지자 실기실의 긴장감도 느슨해졌다. 주변의 학생들은 다시 이젤로 눈을 돌렸지만, 그들의 시선 속에는 여전히 시기와 방관이 가득했다. 소윤은 묵묵히 바닥에 떨어진 미술 도구들을 주워 담았다. 붓끝이 한쪽으로 길들여진 언니의 낡은 돼지털 붓을 쥘 때, 손가락 끝에서부터 서늘한 분노가 타고 올라왔다.
‘그래, 마음껏 날뛰어봐. 너희가 높이 올라갈수록, 떨어질 때 부서지는 소리가 더 화려할 테니까.’
***
지옥 같은 첫 주가 지나고 주말이 찾아왔다.
소윤은 학교에서 멀리 떨어진 낡고 축축한 지하 단칸방에 박혀 불을 켰다. 단칸방의 벽면에는 구형 빔프로젝터가 쏘아 올린 언니의 생전 작업 영상이 프레임 단위로 재생되고 있었다.
영상의 빛이 어두운 방 안을 푸르게 물들였다. 영상 속 소아는 거침없이 붓을 휘두르고 있었다. 붓이 캔버스에 닿는 각도, 손목의 회전 반경, 손가락 마디마디가 수축하고 이완하는 타이밍. 소윤은 눈을 부릅뜨고 그 모든 움직임을 망막에 각인했다.
“아윽……!”
손목에서 찌릿한 통증이 올라왔다. 소윤은 이가 부러질 정도로 입술을 깨물며 통증을 참아냈다. 오른손 검지 손가락 끝은 이미 연필과 붓대에 쓸려 굳은살이 박이고 갈라져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소윤은 차가운 물에 손을 담가 열감을 식힌 뒤, 최은경 한의사가 지어준 특제 소염 한방 파스를 손목에 칭칭 감았다.
천재성이 없는 평범한 인간이 천재의 화풍을 모사하는 길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근육이 파괴되고 다시 붙는 과정을 반복하여, 뼈와 신경이 그 필치를 완벽하게 ‘기억’하게 만드는 것. 소윤은 거울을 보며 언니의 슬픈 미소를 똑같이 지어 보였다. 거울 속에는 자신이 아닌, 죽은 한소아의 유령이 서 있었다.
월요일 아침 7시 30분.
소윤은 다른 학생들보다 한 시간 일찍 은성예고 미술동의 문을 열었다. 복도는 고요했고, 아침 안개가 창문을 넘어 실기실 내부로 스며들어 있었다. 소윤은 자신의 자리가 있는 실기실 제4실로 향했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코끝을 찌르는 이질적인 냄새가 났다.
시큼한 테레핀유 냄새 사이에 섞인, 낯익은 린넨 천의 찢어지는 냄새.
소윤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
실기실 구석, 그녀의 자리는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S등급 이젤은 중간 지지대가 완전히 부러진 채 바닥에 처참하게 쓰러져 있었고, 그녀가 주말 내내 밤을 새워 기본 초벌 칠을 해두었던 50호 크기의 린넨 캔버스는 날카로운 칼날에 의해 사정없이 찢겨 발겨져 있었다.
북, 북, 긁어내린 칼자국들이 하얀 젯소 층을 가르고 들어가 캔버스 천의 씨실과 날실을 잔인하게 끊어놓았다.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의 살점을 도려낸 듯한 참혹한 형상이었다. 바닥에는 찢어진 천 조각들과 부러진 이젤의 파편들이 먼지와 함께 굴러다녔다.
소윤은 천천히 다가가 쓰러진 캔버스 앞에 멈춰 섰다. 머릿속이 차갑게 식어 내렸다. 분노가 가슴을 짓눌렀지만, 그녀의 이성은 그 어느 때보다 날카롭게 작동하기 시작했다.
소윤은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찢어진 캔버스의 단면을 관찰했다.
‘칼자국은 총 일곱 개. 모두 왼쪽 위에서 오른쪽 아래로 비스듬히 그어졌어. 칼끝이 들어간 깊이는 시작점이 가장 깊고 끝점이 얕아. 가해자의 키는 최소 175cm 이상. 힘의 방향과 불안정한 압력을 보니 급하게 작업을 저지른 흔적이야. 칼날의 단면이 미세하게 뜯겨 나간 걸 보니, 미술실 공동 보관함에 있는 낡은 공업용 커터칼을 썼군.’
모든 단서가 한 사람을 가리키고 있었다. 강민재.
그때, 실기실 문이 열리며 학생들이 하나둘 등교하기 시작했다. 참혹하게 파괴된 소윤의 자리를 목격한 학생들의 입에서 나지막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어머, 저게 뭐야……?”
“누가 저렇게 찢어놓은 거래? 완전 미쳤다.”
“한소아 불쌍해서 어떡해. 편입 첫 주부터 저러면 학교 어떻게 다니냐?”
동정과 방관이 섞인 수군거림이 실기실을 채웠다. 그리고 그 소란을 뚫고, 강민재가 아르케 멤버들과 함께 거만한 걸음걸이로 실기실에 들어섰다. 민재는 한 손에 고급 캔커피를 들고 있었다. 그는 소윤의 부서진 이젤을 보더니, 짐짓 놀란 표정을 지으며 다가왔다.
“야, 이게 무슨 일이냐? 천재 한소아의 명작 캔버스가 하룻밤 사이에 누더기가 됐네?”
민재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비열하게 웃었다. 그의 눈에는 승리감과 약자를 짓밟았다는 쾌감이 가득했다.
“어쩌냐, 소아야. 실기실 문단속 좀 잘하지 그랬어. 요즘 학교에 쥐새끼들이 많아서 말이야. 선생님한테 고발이라도 할래? 아, 참. 우리 학교는 목격자나 확실한 증거 없으면 접수도 안 해주는 거 알지?”
민재의 도발에 주변 학생들은 눈치를 보며 침묵했다. 그 누구도 민재의 앞을 가로막으려 하지 않았다. 이것이 은성예고의 법칙이었다. 권력을 쥔 아르케 멤버들의 만행은 묵인되고, 가난한 약자의 피해는 방치되는 것.
소윤은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머리카락이 얼굴을 가려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민재는 그녀가 절망에 겨워 울고 있다고 확신했다.
“거봐, 예전이랑 똑같잖아. 질질 짜는 것밖에 할 줄 모르는 년.”
민재가 비웃으며 돌아설 때였다.
소윤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눈물 자국 하나 없었다. 대신, 그녀의 눈동자는 먹이를 노리는 뱀처럼 차갑고 섬뜩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 순간적인 표정 변화를 목격한 몇몇 학생들이 헉, 하고 숨을 들이켰다.
소윤은 울지 않았다. 그녀는 찢어진 캔버스의 상처를 보는 순간, 이것을 가해자를 완벽히 사회적으로 고사시킬 ‘최고의 캔버스’로 역이용하기로 결심했다.
‘송 과장이나 선생님에게 고발하는 건 아무 의미가 없어. 어차피 저들은 한패니까. 그렇다면 이 학교의 룰로 받아쳐 주마. 오직 실력과 시각적 충격만으로 너를 매장하겠어.’
소윤은 말없이 바닥에 흩어진 찢어진 캔버스 천 조각들을 하나씩 줍기 시작했다. 거친 린넨 천의 올이 손가락 상처를 자극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녀는 부서진 이젤 파편들을 실기실 한가운데 바닥에 넓게 펼쳐놓았다. 그리고 그 위에 찢어진 천 조각들을 마치 기괴한 퍼즐처럼 비대칭적으로 배치했다.
학생들은 소윤의 기이한 행동에 숨을 죽이고 지켜보았다. 민재 역시 눈살을 찌푸리며 그녀의 행동을 주시했다.
“너 지금 뭐 하냐? 미쳤어?”
소윤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미술 가방에서 낡은 수채화 상자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가장 무겁고 어두운 안료인 ‘카드뮴 레드(Cadmium Red)’ 물감 튜브를 집어 들었다. 오일이나 테레핀유는 섞지 않았다. 오직 원액 그대로의 무겁고 끈적이는 붉은 안료만을 조색판에 들이부었다. 그 색감은 마치 갓 흘러내린 동물의 신선한 혈액처럼 붉고 섬뜩했다.
소윤은 오른손에 언니의 낡은 붉은 돼지털 붓을 쥐었다.
손목의 아대를 고쳐 매는 소윤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녀는 자가 침술로 일시 마비시킨 손목의 감각을 느끼며, 어깨와 팔꿈치의 큰 근육만을 사용해 선을 긋는 정우진 교수의 조형학적 피드백을 뇌 속에서 가동했다.
스윽.
첫 번째 붓질이 찢어진 캔버스 천 조각 위를 가르고 지나갔다. 거친 돼지털 붓끝이 찢긴 린넨의 올을 긁으며 둔탁하고 거친 마찰음을 냈다.
“……!”
실기실 내부의 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소윤의 손놀림은 인간의 한계를 시험하듯 빠르고 정교했다. 밑그림은 없었다. 그녀의 머릿속에 존재하는 해부학적 형태 인지 그리드가 찢어진 천 조각들 위로 투사되고 있었다.
소윤은 바닥에 엎드린 채 폭풍 같은 필치로 드로잉을 해나갔다. 거친 돼지털 붓이 갈라진 천의 틈새를 메우고, 때로는 틈새를 가로지르며 강렬한 붉은 선들을 토해냈다. 붓질이 더해질수록, 찢어진 천 조각들의 불규칙한 균열과 상처들이 하나의 거대한 형태를 이루기 시작했다.
그것은 얼굴이었다.
하지만 단순한 얼굴이 아니었다. 광기에 젖어 타인의 재능을 짓밟을 때의 추악한 욕망, 비열하게 일그러진 입꼬리, 탐욕으로 가득 찬 눈동자. 해부학적으로 완벽하게 분해되고 재구성된 그 얼굴은, 다름 아닌 눈앞에 서 있는 강민재의 민낯이었다.
소윤은 민재의 측두골과 광대뼈의 비대칭을 극대화하여 묘사했다. 찢어진 캔버스의 날카로운 균열들이 민재의 얼굴 피부가 찢겨 나간 듯한 극적인 착시를 일으켰다. 붉은 카드뮴 안료는 갈라진 실밥을 타고 번져나가며 실제 피가 흐르는 듯한 생생한 질감을 연출했다.
“이, 이게……”
구경하던 학생들 사이에서 경악어린 탄식이 터져 나왔다. 그 누구도 이것이 강민재의 초상화임을 부정할 수 없었다. 그림에서 뿜어져 나오는 압도적인 독기와 광기 어린 생명력은 실기실 전체를 지배했다.
소윤은 마지막으로 붓끝을 강하게 내리치며 민재의 비열한 눈동자에 붉은 점을 찍었다. 탁, 하는 소리와 함께 붉은 물감 방울이 민재의 구두 끝으로 튀었다.
드로잉 시간은 단 5분.
소윤은 천천히 이젤 파편 위에서 일어섰다. 그녀의 오른손 검지 손가락 끝에서 붉은 물감과 미세한 피가 섞여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에는 흔들림 없는 서늘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내 캔버스를 완성해 줘서 고마워, 민재야. 찢어진 틈새가 네 추악함을 담기에 아주 완벽한 구도가 됐네.”
민재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주변 학생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의 얼굴과 바닥의 붉은 초상화를 번갈아 보기 시작했다. 수군거림은 이제 비웃음과 경멸로 변해 있었다. 학교의 절대 권력자였던 그가, 단 5분 만에 바닥에 깔린 ‘찢겨진 걸작’의 제물이 되어 만천하에 발가벗겨진 것이다.
“이 개같은 년이……!”
민재는 이성을 잃고 발을 들어 바닥의 그림을 짓밟으려 했다.
“그만두지 못해!”
그때, 실기실 입구에서 정우진 교수의 단호하고 묵직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학생들은 모세의 기적처럼 갈라섰고, 정 교수가 찌푸린 얼굴로 실기실 한가운데로 걸어 들어왔다. 그의 시선이 바닥에 펼쳐진 붉은 초상화에 닿는 순간, 그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정 교수는 바닥의 캔버스 찢어진 단면의 각도와 민재의 서 있는 위치를 매섭게 눈으로 대조했다.
“강민재. 이 이젤과 캔버스, 네가 훼손한 건가?”
“아, 아닙니다! 제가 안 그랬습니다! 저년이 혼자 쇼하는 겁니다!”
민재가 당황하여 소리쳤지만, 정 교수의 목소리는 차갑기 그지없었다.
“찢어진 단면의 칼자국 각도와 깊이, 그리고 칼날의 흔적이 네 키와 힘의 방향에 완벽히 일치하는군. 게다가 네 손끝에 묻은 젯소 가루는 어떻게 설명할 거지?”
민재는 자신의 손끝을 내려다보았다. 주말에 캔버스를 찢을 때 묻은 미세한 석고 가루가 손톱 밑에 남아 있었다. 그는 더 이상 변명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정 교수는 소윤을 바라보았다. 소윤은 손가락에서 피를 흘리며 묵묵히 서 있었다. 그녀의 눈빛은 흔들림이 없었다. 정 교수는 그녀의 지독한 집념과 영리한 역공에 속으로 깊은 감탄과 경외감을 느꼈다.
“한소아. 손 씻고 보건실로 가라. 그리고 강민재, 너는 지금 당장 교무실로 따라와.”
민재는 주먹을 쥐고 소윤을 노려보았지만, 주변 학생들의 차가운 시선과 정 교수의 압박에 짓눌려 비굴하게 발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아르케의 행동대장이었던 그가, 편입생 한 명에게 완벽하게 예술적으로 처단당하는 순간이었다.
소윤은 멀어지는 민재의 뒷모습을 보며 마음속으로 조용히 뇌뇌였다.
‘이제 시작이야. 다음은 너희들의 카르텔 전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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