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중독
지하 단칸방의 공기는 언제나처럼 차갑고 눅눅했다. 환풍기도 없는 좁은 창문 틈새로 흘러드는 가을바람은 먼지 섞인 물감 냄새와 기름 향을 방 안 구석구석으로 흩뿌렸다. 도서관에서 언니의 스케치북을 찾아내고 서혜영 교수의 사택 소환 명령을 받은 지 불과 몇 시간 후. 내일 아침 9시까지 양평 사택으로 가야 하는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오늘 밤뿐이었다.
나는 이젤 앞에 서서 미열이 가시지 않은 오른손목의 아대를 풀어헤쳤다. 최은경 한의사에게 맞았던 은침의 마취 약효는 이미 완전히 풀려 있었다. 손목 관절 안쪽에서부터 바늘로 쑤시는 듯한 신경통이 척추를 타고 뇌수까지 찌릿하게 올라왔지만, 나는 이빨을 악물고 통증을 무시했다. 내일 서 교수의 눈앞에서 완벽한 대작을 시연하려면, 언니 한소아 고유의 색감인 ‘소아 블루’ 안료를 미리 조색해 가야 했다.
“조금만 더…….”
나는 팔레트 위에 천연 청동석(Lapis Lazuli) 가루를 쏟아부었다. 유리 막대로 돌가루를 곱게 갈아내는 사각사각 소리가 정막한 방 안을 채웠다. 수입 린시드 오일을 몇 방울 떨어뜨리자, 탁했던 돌가루가 점차 빛을 흡수하는 듯한 칠흑 같은 심연의 푸른빛으로 변해갔다. 자외선 아래서만 미세하게 반응하도록 황 영감에게 얻은 특수 형광 안료까지 배합하는 순간이었다.
툭.
손끝에서 무언가 끊어지는 듯한 기괴한 감각이 일었다.
유리 막대를 쥐고 있던 오른손 검지 손가락이 갑자기 돌처럼 단단하게 굳어졌다. 손가락 끝을 움직이려 뇌에서 신호를 보냈지만, 검지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당황하여 손을 내려다본 나는 숨을 들이켰다.
오른손 검지 첫째 마디부터 손톱 밑바닥까지의 피부가 기괴할 정도로 푸르스름하게 변색되어 있었다. 마치 차가운 강물에 오랫동안 담가두어 피가 통하지 않는 시체의 손가락 같았다. 손끝을 왼손으로 꼬집어보았지만, 아무런 촉각도 느껴지지 않았다. 완벽한 무감각. 그리고 그 무감각의 장벽을 뚫고, 손가락 뼈마디 깊은 곳에서부터 불로 지지는 듯한 극심한 작열통이 휘몰아쳤다.
“아윽……! 흑…….”
비명이 새어 나오는 입을 왼손으로 틀어막았다. 식은땀이 이마를 타고 흘러내려 이젤 위의 캔버스를 적셨다. 단순한 인대 파열의 통증이 아니었다. 손가락 끝의 모세혈관이 마비되고 신경망 자체가 서서히 죽어가는 듯한 물리적인 파멸의 감각이었다.
이대로 손을 쓰지 못하게 된다면 내일 서 교수의 사택에서 대작을 그리는 척 위장하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복수를 시작하기도 전에 가짜라는 정체가 탄로 나 개처럼 끌려 나갈 터였다. 나는 파랗게 죽어가는 손가락을 움켜쥐고 외투를 걸쳤다. 그리고 깊은 밤의 인사동 골목길로 미친 듯이 질주했다.
***
인사동의 어둡고 좁은 미로 같은 골목 끝, 전통 안료 연구소의 미닫이문이 거칠게 열렸다. 매캐한 약재 냄새와 돌가루 먼지가 가득한 작업실 안에서, 백발의 전통 조색가 황 영감이 돋보기안경을 코끝에 걸친 채 나를 돌아보았다.
“이 시간에 웬 소란이냐, 소아야…… 아니, 네 손이 왜 그러냐!”
황 영감은 내 푸르게 변색된 오른손 검지를 보자마자 담배 파이프를 떨어뜨리며 내 손목을 낚아챘다. 그는 굳어버린 내 손가락 마디마디를 거친 손끝으로 누르며 안색을 굳혔다.
“네가 가져간 그 안료…… 설마 매일 밤 쓰고 있었던 게냐?”
“이 손가락이…… 갑자기 굳어버렸어요. 감각이 없어요, 할아버지. 제발 내일 아침까지만 움직이게 해 주세요. 그림을 그려야 해요.”
내 절박한 목소리에 황 영감은 깊은 한숨을 쉬며 나를 실험대 앞으로 이끌었다. 그는 현미경 아래에 내가 가져온 ‘소아 블루’ 안료 샘플을 올리고 슬라이드 글라스를 조절했다. 모니터 화면 위로 안료의 미세한 결정 구조가 붉고 푸른 스펙트럼으로 분석되어 나타났다. 수치들이 깜빡일 때마다 황 영감의 주름진 얼굴이 절망으로 일그러졌다.
“미련한 녀석…… 이 독물을 매일 밤 흡입하고 손에 묻혔으니 몸이 배겨낼 리가 있나.”
황 영감은 모니터를 가리키며 목소리를 높였다.
“네 언니 소아가 만든 이 ‘소아 블루’는 시중의 합성 물감과는 근본부터 다르다. 빛을 완벽히 흡수해 심연의 깊이를 내기 위해, 고대 유물에서나 쓰던 천연 청동석 원석과 극도의 비법을 혼합했지. 하지만 발색을 고정하고 광택을 내기 위해 사용된 유기 용제 안에는 인체에 치명적인 납(Pb)과 수은(Hg) 성분이 다량 함유되어 있어. 이건 안료가 아니라, 서서히 몸을 좀먹는 신경 독물이다!”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한 충격이 전신을 때렸다. 납과 수은 중독.
“장시간 이 안료를 흡입하고 피부로 흡수하면, 미세 운동 신경이 가장 먼저 마비된다. 손끝이 파랗게 변하는 건 혈관이 수축하고 신경망이 괴사하고 있다는 경고야. 더 심해지면 환각을 보고 두통으로 머리가 터져 나갈 게다. 네 언니가 생전에 왜 그렇게 극심한 두통과 공황에 시달렸는지 이제야 알겠더냐?”
황 영감의 다그침에 나는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었다. 언니가 작업실 구석에서 머리를 감싸 안고 신음을 흘리던 모습, 헛것을 본 듯 허공을 향해 붓을 휘두르던 소아의 생전 기억들이 퍼즐 조각처럼 맞춰졌다. 소아는 서 교수의 대작 압박 속에서, 자신의 영혼뿐만 아니라 육체까지 이 푸른 독물에 절여가며 그림을 그리고 있었던 것이다.
“치료해야 한다. 당장 이 안료를 폐기하고 대학병원으로 가라. 당장 해독 치료를 받지 않으면 네 오른손은 영구히 마비되어 평생 붓을 잡지 못할 게야!”
황 영감이 내 손에 쥐여 있던 붉은 돼지털 붓과 물감 튜브를 강제로 빼앗으려 손을 뻗었다.
“안 돼요!”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빼며 붓을 품에 안았다. 내 눈동자 속에 서린 지독한 광기에 황 영감이 멈칫했다.
“이 안료가 아니면 안 돼요. 서혜영의 현미경 감정법을 통과하려면 오직 이 진짜 소아 블루만 써야 해요. 합성 물감 따위로는 그 여자의 눈을 속일 수 없단 말이에요!”
“네 손이 썩어 들어가고 있어, 이 미련한 것아! 목숨보다 복수가 더 중하단 말이냐!”
“네, 중해요.”
나는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내 눈에서 흐른 눈물 한 방울이 파랗게 마비된 검지 손가락 위로 떨어져 흘러내렸다.
“언니는 이 뼈가 깎이는 고통을, 머리가 깨질 듯한 환각을 혼자 견디다 죽었어요.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어둠 속에서 홀로 독을 마시며 그림을 그렸다고요. 내가 이 고통을 똑같이 느끼지 않는다면 어떻게 완벽한 가짜가 될 수 있겠어요? 어떻게 서혜영의 심장 가장 깊은 곳으로 칼날을 들이밀 수 있겠냐고요.”
내 지독한 집념과 살의 앞에 황 영감은 붓을 뺏으려던 손을 천천히 내렸다. 그의 늙은 눈동자에 깊은 슬픔과 안타까움이 소리 없이 차올랐다.
“소아나 너나…… 어쩜 이리도 지독한 게냐…….”
황 영감은 포기한 듯 작업실 안쪽 약재 서랍을 뒤져 붉은 한약재 주머니와 미세한 가루가 든 약병을 내밀었다.
“수은과 납의 흡수를 일시적으로 지연시키고 신경 마비를 완화하는 전통 해독 초재다. 물에 타서 매일 밤 마셔라. 하지만 이건 임시방편일 뿐이야. 네 손목의 수명은 길어야 세 달이다. 그 안에 끝내지 못하면, 너는 정말로 손을 잃게 될 게다.”
“세 달이면 충분해요.”
나는 해독 약재를 낚아채듯 쥐고 일어섰다.
지하 단칸방으로 돌아온 나는 거울 앞에 섰다. 거울 속 내 얼굴은 밤샘과 중독의 여파로 초췌하게 말라 있었지만, 눈빛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 서늘하게 빛나고 있었다.
나는 황 영감이 준 해독 가루를 물에 타 단숨에 들이켰다. 목구멍을 넘어가는 기괴한 쓴맛에 인상을 찌푸렸지만, 이내 오른손 끝에 미세한 온기가 도는 것이 느껴졌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손가락을 굽힐 수 있을 정도의 감각은 돌아왔다.
나는 구형 은침을 꺼내 손목 안쪽 외관혈에 다시 한번 깊숙이 찔러 넣었다. 통증 차단 신호가 뇌로 전달되는 순간, 나는 관절염 치료용 특수 압박 테이프를 꺼내 파랗게 멍든 오른손가락부터 손목까지 칭칭 감아 고정했다. 검은 테이프가 살을 파고들며 손목을 단단한 기계처럼 고정해 주었다.
내일 아침 9시, 서혜영의 사택 지하 작업실.
나는 검게 묶인 오른손으로 붉은 돼지털 붓을 쥐어 들고 거울 속 나를 향해 서늘하게 미소 지었다.
‘기다려, 서혜영. 당신이 원하는 완벽한 노예가 가 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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