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의 비밀 통로
복도를 채운 라벤더 오일 향과 피비린내 나는 폭력의 잔상이 코끝을 찔렀다. 서혜영 교수의 연구실 문이 닫히는 소리를 뒤로한 채, 나는 그림자처럼 계단참을 내려갔다. 서지민의 뺨을 사정없이 후려치던 서 교수의 그 차갑고 우아한 가면 뒤의 민낯을 도청한 직후였다. 통쾌함이 전신을 감쌌지만, 내 오른손목을 옥죄는 검은색 압박 테이프 안쪽에서는 인대가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가짜 레시피를 만들어 적들을 자멸하게 만든 대가는 내 육체에도 고스란히 누적되어 있었다.
‘이제 서혜영은 더 미쳐날뛸 거야. 가짜 레시피에 속아 대기업 회장과의 신뢰를 망쳤으니, 진짜 기술을 가진 나를 향한 집착이 광기로 변하겠지.’
머릿속 계산기가 빠르게 돌아갔다. 서 교수의 의심의 칼날이 나를 향해 좁혀오기 전에, 나는 그녀를 완벽히 파멸시킬 다음 무기를 손에 넣어야 했다.
그때였다. 미술동 4층 복도 저편에서 묵직한 군화 소리와 함께 붉은색 레이저 포인터의 불빛이 바닥을 휩쓸었다. 야간 보안팀장 백 팀장이었다. 최근 학내 전산망 리부팅과 미세한 경보 로그 때문에 야간 순찰의 강도가 기하급수적으로 높아진 상태였다. 심지어 그의 손에는 열화상 감지기가 들려 있었다. 체온을 감지당하는 순간, 심야 무단침입 규정 위반으로 즉시 현장 체포되어 퇴학 처분을 당할 터였다.
나는 숨을 죽이고 몸을 돌려 미술 도서관의 낡은 목제 문을 밀었다. 소리 없이 열린 문틈 사이로 퀴퀴하고 오래된 책 냄새와 먼지 쌓인 서가의 정막함이 나를 반겼다.
“여기서 뭐 하니, 소아야.”
어둠 속에서 나지막하고 온화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동그란 안경 너머로 지적이고 따뜻한 눈빛을 지닌 미술 도서관 사서, 김정희 선생이었다. 그녀는 낡은 카디건을 걸친 채 밤늦게까지 도서 정리 대장을 정리하고 있었다.
“선생님…….”
내가 오른손목의 검은 테이프를 슬그머니 가리자, 김정희 선생의 시선이 내 손끝에 머물렀다. 그녀는 소아가 생전 도서관 구석에서 홀로 눈물 흘릴 때마다 말없이 따뜻한 캔커피를 건네주던 유일한 어른이었다. 내 거친 숨소리와 손목의 상태를 본 그녀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따라오렴. 이쪽은 순찰 대원들도 함부로 들어오지 못하는 곳이란다.”
김정희 선생은 사서실 뒤편의 낡은 철문을 열쇠로 열어주었다. 그곳은 일반 학생들의 출입이 철저히 통제된 ‘폐기 도서 보관소’였다. 수십 년간 은성예고에서 버려진 희귀 도서들과 먼지 쌓인 미술 잡지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좁고 어두운 지하 서고였다. 실내 온도가 뚝 떨어지며 한기가 피부를 찔렀지만, 보안팀의 열화상 감지기를 피하기에는 더없이 완벽한 저온 공간이었다.
철문이 닫히기 직전, 도서관 입구 쪽에서 백 팀장의 거친 목소리가 들려왔다.
“김 사서님, 혹시 이 시간에 이쪽으로 들어온 학생 없습니까? 열화상 센서에 미세한 잔상이 잡혀서 말입니다.”
김정희 선생은 흔들림 없는 차분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글쎄요, 저는 지금 폐기 도서 대장을 정리하느라 먼지 구덩이에 박혀 있어서 보지 못했네요. 아시다시피 이 보관소는 고서 보존 때문에 먼지가 많아 외부인이 들어오면 센서가 오작동하기 쉽습니다. 순찰을 계속 도실 거면 저 바깥쪽 복도부터 확인해 보시겠어요?”
행정실 베테랑 사서다운 노련한 처세였다. 백 팀장의 발소리가 투덜거림과 함께 멀어지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나는 어두운 보관소 내부에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김정희 선생은 먼지 쌓인 서가 깊숙한 곳으로 걸어가더니, 낡은 오동나무 상자 하나를 꺼내 내 앞에 내려놓았다.
“소아야. 네가 다시 학교로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이 상자를 전해줄 날만 기다렸단다. 10년 전, 네 언니…… 아니, 네가 자살 소동을 벌이기 직전 밤늦게 이곳을 찾아와 내게 꼭 맡겨달라고 신신당부했던 물건이란다.”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언니 소아가 죽기 직전 남겨둔 진짜 마지막 유품.
상자 뚜껑을 열자, 익숙한 가죽 냄새와 함께 소아의 때 묻은 옛 스케치북이 모습을 드러냈다. 겉면의 크라프트지는 군데군데 닳아 있었고, 언니가 즐겨 쓰던 붉은 돼지털 붓의 미세한 털 조각들이 책장 사이에 끼어 있었다. 손끝으로 스케치북을 쓸어내리자, 언니의 차가운 유령이 내 손을 맞잡는 듯한 기괴한 전율이 척추를 타고 흘렀다.
“고맙습니다, 선생님…….”
“조심히 보렴. 네가 찾으려던 진실이 그 안에 있기를 바란다.”
김정희 선생은 나를 혼자 두기 위해 사서실로 조용히 나갔고, 폐기 도서 보관소에는 오직 나만의 숨소리와 미세한 먼지 입자들만이 맴돌았다.
나는 스케치북의 첫 페이지를 넘겼다. 스케치북에는 언니가 그린 평범한 소나무 풍경화들이 가득했다. 하지만 내 절대적 형태 인지안은 그 그림들이 단순한 풍경화가 아님을 즉각적으로 감지했다.
‘이 구도는 이상해. 소아는 절대 비례를 어기는 아이가 아니야. 그런데 왜 소나무 바늘잎들의 길이와 간격이 이토록 불규칙하고 왜곡되어 있지?’
나는 붓터치 호흡 역추적술을 가동했다. 캔버스 표면에 눈을 바짝 대고, 언니가 연필과 붓을 쥘 때의 호흡과 맥박을 내 몸에 동조시켰다. 붓 터치의 두께와 선의 꺾임 각도를 현미경 보듯 분석해 나갔다.
소나무 잎사귀의 굵고 짧은 획들은 ‘0’과 ‘1’의 이진법 디지털 그리드로 치밀하게 계산되어 배치되어 있었다. 굵은 터치는 1, 가는 터치는 0. 그리고 나뭇가지가 꺾이는 각도는 16진수의 문자 코드를 가리키고 있었다.
소아는 천재적인 회화 구도 속에 서 교수의 가장 은밀한 범죄 흔적을 아날로그 방식으로 영구 박제해 둔 것이었다. 디지털 데이터는 지울 수 있지만, 종이 위에 새겨진 천재의 붓 터치는 서 교수의 권력으로도 지울 수 없다는 것을 언니는 알고 있었던 터였다.
나는 주머니에서 펜과 종이를 꺼내 소나무 바늘잎의 개수와 터치 두께를 숫자로 환환하기 시작했다. 손가락의 마비 통증이 다시 밀려와 펜을 쥔 손이 바르르 떨렸지만, 이빨로 입술을 물어뜯으며 숫자를 적어 내려갔다.
[00:1A:11:3D:FF:02...]
마지막 16진수 조합을 해독해 내는 순간, 머릿속에서 번개가 치는 듯한 전율이 일었다.
그것은 서혜영 교수가 교무실 금고에 보관된 시험 문제를 유출할 때 사용하던 개인 맥북의 고유 하드웨어 주소, 즉 맥 주소(MAC Address)였다. 그리고 그 옆의 불규칙한 나이프 긁힘 자국들은 서 교수가 아르케 멤버들의 단체 텔레그램 방으로 시험지 이미지를 전송할 때 거쳤던 사택 서재의 IP 주소 경로를 정확히 은유하고 있었다.
서 교수가 법망을 피해 가기 위해 ‘해킹으로 인한 유출’이라며 꼬리 자르기를 시도할 때, 이 고유 맥 주소와 전송 로그는 그녀가 직접 범행을 주도했음을 증명할 절대적인 스모킹 건이었다.
나는 극비 스마트폰을 꺼내 스케치북의 암호화된 구도와 내가 해독한 16진수 코드 대조표를 고화질로 촬영했다. 그리고 최현준과 해커 윤지민에게 이 데이터를 실시간 전송했다.
[서혜영 맥북 고유 MAC 주소 및 유출 경로 확보 완료. 전산망 침투 시 이 포트를 타깃으로 삼아.]
전송 완료를 알리는 파란색 로딩 바가 100%에 도달하는 순간, 내 스마트폰 화면이 기괴하게 깜빡였다. 그리고 서 교수로부터 발송된 짧은 메시지가 화면 상단에 떠올랐다.
[소아야, 내일 아침 9시까지 내 사택 지하 작업실로 오렴. 준서의 다음 작품 채색 방향을 너와 직접 논의해야겠구나. 손목 아대는 꼭 하고 오고.]
가짜 레시피 부식 사건으로 분노한 서 교수가, 마침내 나를 물리적으로 감금하고 진짜 기술을 뜯어내기 위해 쳐놓은 거대한 덫의 시작이었다. 내 손목을 옥죄는 검은 압박 테이프 안쪽에서, 다시 한번 차가운 통증이 가시처럼 돋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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