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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족보의 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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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아침의 햇살은 은성예고 본관 미술동의 유리창을 통과하며 길고 차가운 그림자를 만들어냈다. 실기실 제4실의 공기는 언제나처럼 연필 흑연 가루와 눅눅한 기름물감 냄새로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나는 내 고정 이젤 앞에 앉아 오른손목을 내려다보았다. 교복 소매 아래로 가려진 검은색 압박 테이프가 살을 파고들 듯 단단히 감겨 있었다. 어젯밤 폐교 부지에서 송태문의 자물쇠를 뜯어내느라 무리하게 힘을 쓴 탓에, 찢어진 인대 부위가 맥박을 따라 지독하게 욱신거렸다. 검지 손가락 끝은 여전히 ‘소아 블루’ 안료의 미세한 중금속 독성으로 인해 차갑게 마비되어 있었다.


‘고통을 지워야 한다. 지금은 흔들릴 때가 아니다.’


나는 입술을 깨물며 고통 임계점 돌파 제어를 가동했다. 뇌로 향하는 통증 신호를 차가운 분노 아래로 억누르자, 이마에 맺혔던 식은땀이 서서히 식어갔다.


그때, 실기실 문이 열리며 서지민이 조아라를 대동하고 들어섰다. 지민은 평소보다 더욱 신경질적으로 다듬은 눈썹을 치켜세우며 나를 빤히 노려보았다. 그녀의 눈동자 속에는 수석 자리를 위협받는 자 특유의 비열한 질투와 음모가 넘실거리고 있었다. 조아라는 지민의 뒤에 서서 내 사물함의 위치를 힐끗거리며 손에 쥔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렸다.


절대적 형태 인지안을 가동한 내 망막 위로, 조아라의 미세한 시선 방향과 어깨의 긴장도가 붉은 그리드 라인으로 쪼개져 투사되었다. 그녀들의 목적은 명확했다. 내가 편입 시험과 라오콘 소묘에서 보여준 압도적인 색채감, 즉 언니의 독창적인 ‘소아 블루’ 조색 비결을 훔쳐내려는 것이다.


‘멍청한 쥐새끼들. 덫을 쳐놓았으니 밟아줘야지.’


나는 속으로 서늘한 미소를 지었다. 사실 이 상황은 내가 며칠 전부터 치밀하게 설계해 둔 함정이었다.


목요일 밤, 나는 인사동 깊은 골목에 위치한 황 영감의 조색 연구소를 찾았었다. 그곳에서 나는 황 영감에게 전수받은 안료 배합 지식을 바탕으로 하나의 ‘독이 든 성배’를 조제했다.


겉보기에는 완벽한 천연 청동석 가루와 수입 오일이 섞인 고귀한 푸른빛의 안료 레시피. 심지어 서 교수가 자외선(UV) 랜턴을 비추더라도 은은한 푸른빛으로 발광하여 의심을 완벽히 교란할 수 있도록 미량의 형광 첨가물까지 섞어 넣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치명적인 화학적 부메랑이 숨겨져 있었다. 나는 조색 비율을 교묘하게 비틀어, 은폐력이 강한 산화 아연(Zinc Oxide)과 공기 중의 수분을 흡수하면 급격히 산성화되는 불량 합성 바니시를 높은 비율로 혼합했다.


이 가짜 레시피로 조색 된 물감은 붓을 칠하는 순간에는 완벽한 발색을 자랑하지만, 공기 중의 산소 및 미술실의 습기와 접촉하여 12시간이 지나면 급격한 비누화 반응(Saponification)을 일으키게 된다. 유화 층의 결합이 내부에서부터 완전히 붕괴되어, 결국 물감이 누렇게 변색되며 캔버스 표면에서 찢어지듯 갈라지고 흘러내리는 시한폭탄인 셈이었다.


나는 이 가짜 레시피를 언니 소아가 쓰던 낡은 가죽 스케치북의 중간 페이지에 소아의 필체를 완벽히 모사해 적어두었다. 그리고 스케치북의 겉면에는 일부러 10년 전 소아의 손때와 오래된 유화 기름 냄새를 묻혀두어, 아카데미의 그 어떤 전문가도 의심할 수 없도록 철저한 위장 작업을 마쳤다.


“소아야, 오늘 점심은 어떻게 할 거니?”


점심시간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리자, 저편에서 김하은이 조심스럽게 다가와 물었다.


“하은아, 미안하지만 오늘은 먼저 내려가 줄래? 보건실에 들러서 손목 물리치료를 받아야 할 것 같아서.”


나는 일부러 목소리를 키워 실기실 내부에 내 동선을 흘렸다. 이젤 정리를 하던 조아라의 귀가 미세하게 쫑긋 세워지는 것이 내 시야에 포착되었다.


학생들이 하나둘 실기실을 빠져나가고 사방이 고요해지자, 나는 가방을 챙겨 문으로 향했다. 사물함 자물쇠를 걸어 잠그는 내 손끝이 아주 미세하게 떨렸지만, 그것은 고통이 아닌 사냥을 시작하는 포식자의 짜릿한 전율 때문이었다. 나는 미끼가 든 사물함 문을 닫고 실기실을 나섰다.


하지만 나는 복도를 내려가지 않았다. 미술동 4층 계단참의 어두운 모퉁이, 감시카메라의 사각지대에 몸을 숨긴 채 숨을 죽였다.


몇 분 뒤, 예상대로 실기실 안에서 삐걱거리는 문소리가 들려왔다. 뒤이어 조아라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실기실 제4실 안으로 잠입하는 실루엣이 내 절대적 형태 인지안에 걸려들었다. 그녀의 손에는 작은 공업용 쇠 지렛대(빠루)가 쥐여 있었다.


콰직, 쇠붙이가 내 사물함의 낡은 경첩을 강제로 꺾어내는 불쾌한 마찰음이 복도 고요를 깼다.


나는 스마트폰을 꺼내 무음 카메라 앱을 켰다. 문틈 사이로 조아라가 내 사물함을 파손하고 내부 이중 바닥을 뜯어내 가죽 스케치북을 절취하는 현장을 정확히 고화질 영상으로 캡처했다. 이는 훗날 교내 실기 시험 캔버스 훼손 금지 규정 및 절도죄로 그녀들을 징계위원회에 회부할 결정적인 아날로그 물증이 될 터였다.


조아라는 스케치북을 품에 안고 흥분한 얼굴로 실기실을 뛰쳐나와 대기하고 있던 서지민에게 달려갔다. 복도 모퉁이 그늘에 숨은 내 눈동자 위로 그녀들의 비열한 미소가 차갑게 반사되었다.


***


같은 시간, 미술동 5층 서혜영 교수의 개인 연구실.


“교수님! 드디어 찾아냈어요. 한소아가 숨겨두었던 조색 비법이에요.”


서지민은 조아라가 훔쳐온 낡은 가죽 스케치북을 두 손으로 받쳐 들고 서 교수에게 바쳤다. 지민의 얼굴에는 자신이 이준서의 수석 자리를 지켜냈다는 오만한 승리감과 아첨이 가득했다.


서 교수는 고상한 라벤더 오일 향을 풍기며 안경을 고쳐 썼다. 그녀는 가죽 스케치북의 표면을 손가락 끝으로 쓸어내렸다. 오래된 유화 기름 냄새와 손때 묻은 가죽의 질감은 영락없는 10년 전 한소아의 유품이었다. 서 교수가 천천히 페이지를 넘기자, 소아 특유의 삐뚤빼뚤하면서도 날카로운 필체로 적힌 화학 기호와 배합 비율이 나타났다.


[청동석 가루 30%, 산화 아연 45%, 특제 바니시 오일 25%... 자외선 아래서 영원의 푸른빛을 발함.]


“이것이…… 소아 블루의 진짜 배합표란 말이지.”


서 교수의 눈동자 속에 탐욕의 불꽃이 번뜩였다. 그녀는 마침 태성그룹 장 회장으로부터 무기명 비자금 세탁용 대작을 의뢰받아 극비리에 작업을 진행해야 하는 압박을 받고 있었다. 이준서의 이름으로 출품될 대작에 이 조색 기법을 적용한다면, 전 세계 미술계의 극찬과 함께 완벽한 가문의 세탁이 완성될 터였다.


“지민아, 아주 큰 일을 해냈구나. 역시 내 조카다워.”


“교수님을 위해서라면 이 정도는 당연하죠. 이제 한소아 그년은 껍데기만 남은 가짜일 뿐이에요.”


지민은 의기양양하게 미소 지었다. 서 교수는 즉시 연구실 내부의 정밀 저울을 꺼내 가짜 레시피에 적힌 비율대로 안료 조색을 시작했다. 청동석 가루와 산화 아연이 불량 바니시 오일과 섞이면서, 조명 아래서 눈이 시릴 정도로 매혹적이고 깊은 푸른빛의 물감이 완성되었다.


“완벽하군. 죽은 소아의 손끝이 다시 내 지배 아래 들어왔어.”


서 교수는 감탄을 금치 못하며, 준비된 대형 100호 캔버스 위에 물감을 거침없이 칠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녀는 이 물감이 하룻밤 사이에 어떤 파멸적인 화학 반응을 일으킬지 꿈에도 모른 채, 오직 탐욕에 눈이 멀어 붓질을 휘둘렀다.


***


토요일 아침.


나는 정우진 교수의 개인 화실에서 밤새 오른손목의 관절 고정 훈련을 마치고 이른 아침 학교로 향했다. 새벽의 안개가 걷히며 미술동의 전경이 드러났다.


내가 미술동 5층 서 교수의 연구실 복도를 지나갈 때, 연구실 내부에서 깨지는 듯한 비명 소리와 함께 유리잔이 바닥에 산산조각 나는 요란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지민이 너, 당장 이리로 오지 못해!”


서 교수의 고상하던 목소리는 온데간데없고, 마치 악마의 단말마 같은 쇳소리가 복도를 찢었다.


나는 닫힌 연구실 문틈 사이로 흐르는 공기의 진동을 느끼며 걸음을 멈추었다.


연구실 내부 중앙 이젤 위, 어젯밤 서 교수가 그토록 의기양양하게 칠해 두었던 대형 캔버스는 처참한 몰골로 변해 있었다. 어젯밤까지만 해도 고귀한 푸른빛을 자랑하던 유화 표면은 공기 중의 수분과 반응해 급격한 비누화 반응을 일으키며 썩은 진흙처럼 흘러내리고 있었다.


산화 아연과 산성 오일이 충돌하며 발생한 화학적 가스가 유화 층을 부풀려 터뜨렸고, 캔버스 천 자체도 화학적 부식으로 인해 사정없이 찢겨 나가 누런 얼룩만 가득했다. 대기업 회장에게 전달되어야 할 수십억 가치의 그림이 하룻밤 사이에 쓰레기 더미로 전락한 것이다.


“교수님! 그럴 리가 없어요! 분명 한소아의 사물함에서 직접 훔친 스케치북이었는데……!”


서지민은 무릎을 꿇은 채 사시나무 떨듯 떨며 눈물을 흘렸다. 그녀의 옆에는 사물함을 부수었던 조아라가 얼굴이 흙빛이 된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입 닥쳐! 너희가 나를 속인 거야! 이따위 쓰레기 가짜 레시피를 가져와 내 그림을 망쳐놓다니!”


짝!


서 교수의 매서운 손바닥이 서지민의 뺨을 가차 없이 후려쳤다. 날카로운 파열음과 함께 지민의 고개가 돌아갔고, 그녀의 화려한 귀걸이가 카펫 위로 툭 떨어졌다.


“당장 내 눈앞에서 사라져! 아르케고 뭐고, 너희 같은 무능한 쥐새끼들은 내 카르텔에 존재할 가치가 없다!”


문틈 너머로 적들의 자멸과 내부 분열의 현장을 지켜보는 내 입꼬리가 느슨하게 올라갔다.


‘그래, 서로를 물어뜯어라. 너희들의 위선적인 동맹은 오직 이익으로만 묶여 있으니, 그 이익이 부서지는 순간 가장 잔인하게 붕괴할 터였다.’


하지만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것도 잠시, 내 오른손 손목 안쪽에서 찢어지는 듯한 날카로운 신경통이 다시 한번 요동쳤다. 서 교수의 비명 소리가 잦아들 무렵, 그녀의 매서운 눈빛이 문틈 너머의 허공을 향해 천천히 돌아가기 시작했다. 진짜 기술을 갈구하는 그녀의 집착이 이제 광기로 변할 시간이었다.

HẾT CHƯƠ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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